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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팔경 ‘착한여행’ 도전기
단양팔경 ‘착한여행’ 도전기
  • 이시종
  • 승인 2019.01.25 09: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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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여행

겨울이 깊어지니 다시금 병이 도지는 것일까. 요 며칠 주말만 되면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충동이 엄습했다. 텔레비전 뉴스에서 첫눈 소식을 전하는가 싶더니, 전국적으로 폭설이 내렸다는 보도가 뒤따랐다. 철이 덜든 탓인지, 뉴스를 보며 다음날 출근길을 걱정하기보다 공기 좋은 곳에서 눈 구경이라도 했으면 싶은 마음이 더 간절해졌다.

일 핑계를 대서라도 맑은 공기를 마시고 싶다는 생각에 이런저런 궁리를 했다. 그러다 며칠 전 봤던 여행 프로그램이 생각났다. 단양팔경을 보여준 프로그램이었는데, 문득 그곳을 자전거를 타고 달려보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올겨울 들어 가장 추웠다는 날, 그것도 며칠 전 폭설이 내려 길마저 꽁꽁 얼어붙었던 날 자전거 투어라니, 어쩌면 바보스러울 정도로 무모한 도전이었다.

‘불편’과 ‘느림’에서 찾는 또 다른 기쁨

전날 밤 10시가 넘어서야 단양IC를 빠져나왔다. 눈길 탓에 차가 밀려 예상시간보다 두 시간이나 더 걸렸다. 장시간 운행으로 일행이 모두 피곤해 되도록 가까운 곳에 숙소를 잡기로 했다. ‘길목 팬션 민박’. 취재진이 하루를 묵은 곳이다. 이곳이 톨게이트에서 가장 가깝게 있던 숙박업소였던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길목’이라는 간판이 정겨웠다.

오전 8시가 좀 넘어서 알람도 울리기 전에 일어났다. 전날 신경 써서 운전한 탓인지 몸은 약간 찌뿌듯한데도 무척 잘 잤다는 느낌이 들었다. 같이 간 일행은 벌써 일어나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서로 아침식사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중 주인할머니가 “먹는 김에 같이 먹자”며 아침상을 들고 들어왔다.

주인할머니도 친절했고 음식도 기대 이상이었다. 쌀밥에 된장을 푼 아욱국, 무말랭이, 김치가 전부인 소박한 밥상이었지만 집에서 먹던 밥만큼 입에 맞았다. 아침부터 기분이 날아갈 듯했다. 가뿐한 하루가 되리라는 예상이 들었다.

단양은 여름철 휴양지로 유명한 곳이지만, 운치 있는 여행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겨울 여행도 추천할 만하다.
단양은 여름철 휴양지로 유명한 곳이지만, 운치 있는 여행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겨울 여행도 추천할 만하다.

오전 10시 15분. 차는 숙소에 세워놓고 자전거로 갈아탔다. 그런데 맙소사, 칼날 같은 바람이 뼛속까지 불어왔다. 애초에는 단양팔경을 모두 돌아볼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런 날씨에 강행했다가는 서울에 올라가 바로 병원 신세를 질 수도 있겠다 싶어 불가피하게 행로를 줄일 수밖에 없었다. 목표지를 숙소에서 약 15km 떨어진 사인암으로 정했다.

무릇 여행은 무리하게 하기보다 여유를 갖고 해야 한다고 했다. 무엇보다 이번 여행의 테마는 착한 여행, 이른바 ‘공정여행’인 만큼 목표보다는 방법에 충실하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공정여행이란 여행에서 책임의식을 강조하는 새로운 여행 문화다. 현지의 전통과 문화, 자연을 존중하고 체험하면서 쓰는 경비가 지역 주민들의 삶에 보탬이 되는 여행 형태를 말한다. 자전거 여행을 선택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계곡을 따라 달리는 여정

관광객들이 단양을 많이 찾는 계절은 사실 여름이다. 소백산과 남한강을 끼고 있어 물놀이를 할 수 있는 곳이 많은 까닭이다. 여름이면 계곡마다 야영객들로 붐비고, 민박집도 활기를 띤다. 하지만 겨울 여행도 나쁘지 않았다. 눈이 덮인 겨울산도 운치가 있으며, 얼음이 언 물길을 따라 달리는 것도 꽤나 낭만적이었다. 시끌벅적한 것보다 조용하고 운치 있는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겨울 단양행도 추천할 만하다.

숙소에서 물길을 따라 30분 정도 지났을까. 마을이 사라지고 몇몇 집만이 드문드문 보였다. 어디선가 나무 태우는 냄새가 코끝을 간질이기 시작했다. 나무 타는 냄새는 묘하게 향수를 자극한다. 시골집에서 아궁이를 지피던 할머니 모습이 스쳐가고, 할머니 몰래 불장난을 하다가 혼쭐나던 기억이 지나가기도 했다.

냄새의 근원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어린 남매가 서로 뒤를 좇듯 개울을 건너는 모습을 보았다. 아마도 놀러 나왔다가 점심참이 되어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듯 보였다. 아이들 사진을 찍고 싶어 카메라를 들려 했는데, 그만 놓치고 말았다. 외진 곳으로 여행을 다니면서 늘 궁금한 게 어린아이들의 삶이다. 서울의 어린이들과 이곳의 어린이는 어떻게 같고, 또 어떻게 다를까. 집으로 들어간 아이들을 보며 한참을 이런 생각을 했다.

‘사인암’ 방향을 가리키는 표지판을 지나는데 고라니인지, 노루인지가 우리 일행을 보고 달아났다. 여행을 하면서 만날 수 있는 건 사람만이 아니다. 도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생명들과의 조우, 빠뜨릴 수 없는 여행의 매력이다.

운선계곡에 위치한 사인암은 마치 해금강을 옮겨놓은 듯 하늘을 향해 뻗은 붉은 암벽과 바위 틈새에 뿌리를 내린 노송이 인상적이다.
운선계곡에 위치한 사인암은 마치 해금강을 옮겨놓은 듯 하늘을 향해 뻗은 붉은 암벽과 바위 틈새에 뿌리를 내린 노송이 인상적이다.

여행자를 꿈꾸게 하고 추억하게 하는 사인암

한 시간 반 정도 달려서 사인암에 도착했다. 오는 길에 오르막이 꽤 있어서 그런지 추운 날씨에도 이마에 땀이 제법 흘러내렸다. 자전거에서 내려 숨을 돌리고 나니 사인암의 절경이 한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인암이 왜 단양팔경 중 하나인지는 직접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마치 해금강을 옮겨놓은 듯 하늘을 향해 뻗은 붉은 암벽과 중력의 법칙을 무시한 채 수직의 바위 틈새에 뿌리를 내린 노송(老松)은 세상 어떤 조각가도 흉내 낼 수 없을 듯한 신기의 결정체다. 오죽했으면 조선 최고의 화원으로 불린 단원 김홍도가 사인암을 담으려 붓을 잡았다가 1년여를 고민했을까.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로 유명했던 단릉 이윤영도 사인암과 첫 대면을 한 후 감흥을 이렇게 표현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서로 이끌며 흐르는 물에 씻고 선대(仙臺)에서 옷깃을 여몄다. 계류를 따라 북쪽으로 향하다가 바라보니 이른바 사인암이 우뚝 솟아 마치 몸을 낮춰 절을 하려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 절로 무릎이 꿇어졌다. 백 걸음 밖에서부터 걸음마다 우러르며 그 아래에 이르렀다. 서서 보고, 앉아서 보고, 누워서 보며 한참 동안이나 떠나지 못했다.”

이 글을 보며 이윤영이 사인암을 처음 대했을 때의 표정과 몸짓을 상상해봤다. 입은 벌어졌을 것이며 눈은 휘둥그레진 채 거듭 경외의 감탄사를 내뱉을 것만 같았다. 또한 자연을 대할 때도 공경해 마지않는 선비를 대하는 듯한 그의 인품도 느껴졌다. 사인암에는 그가 새겨놓은 시가 아직도 남아 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곳에 자전거가 아닌 자동차로 왔다면 이런 감흥에 동의할 수 있었을까. 가깝지 않은 길을 자전거를 타고 오며 그에 대한 기대를 나도 모르게 키웠을 것이며, 천천히 오며 사인암의 절경을 자세히 음미했기에 감흥이 더했던 것은 아닐까. 자동차로 대뜸 그 앞에 다가섰더라면 그 감흥은 덜했을 것이다.

사인암은 조선 후기 문인화가인 이윤영이 은거했던 곳이기도 하다.
사인암은 조선 후기 문인화가인 이윤영이 은거했던 곳이기도 하다.

웅장한 사인암 건너편에는 많은 민박집과 슈퍼들이 모여 있었다. 만약 이것을 한 프레임 속에 놓고 사진을 찍을 수 있다면 ‘자연과 삶의 동시성이 보여주는 신화’라는 제목을 붙여보는 게 어떨까, 라는 생각도 해봤다. 그곳에는 자연이란 풍경이 있고, 거기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으며, 그들이 살아온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사인암 건너편 조그만 구멍가게에서 커피를 사먹다 주인할아버지와 말문이 트였다. 그의 말을 통해 단양팔경을 처음 말한 이가 퇴계 이황이라는 것을 알게 됐고, 사인암이 팔경 중 제5경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또 겨울에는 이곳을 찾는 이들이 드물어 가게 문을 잘 열지 않는다는 것과 그의 아들이 여섯이나 있다는 소소한 이야기까지 나누며 가게 문을 나섰다.

비록 1박 2일의 짧은 일정이고 추운 날씨로 인해 쉽지도 않았지만 많은 것을 얻은 여행이었다. 밤늦게 서울로 돌아오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오늘 하루 달려온 길에 우리네 삶의 신화가 고인돌처럼 남아 있다고.

글 이시종 사진 권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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