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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 흥행돌풍 ‘보헤미안 랩소디’ 문화진단
기획특집 | 흥행돌풍 ‘보헤미안 랩소디’ 문화진단
  • 김문 논설위원
  • 승인 2019.01.24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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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헤미안 랩소디’ 문화진단 ①
‘보헤미안 랩소디’ 영화의 힘, 흥행 돌풍 3개월… 1천만 관객

 

밴드 ‘퀸’과 보컬 프레디 머큐리의 삶과 죽음을 다룬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가 흥행 돌풍을 3개월째 이어가고 있다. 누적 관객 수가 1000만이다. 외국 영화, 특히 음악영화로서는 보기 드문 일이다. 흥행수익은 7000만 달러를 훌쩍 넘었다. 보헤미안 랩소디가 흥행돌풍을 이어가는 '영화의 힘' 문화진단.

글 김문 논설위원 | 사진 20세기폭스코리아


보헤미안 랩소디를 우리말로 풀어쓰면 자유인의 광시곡이라고 할 수 있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보헤미안의 어원은 프랑스어 보엠(Boheme)이며, 체코의 보헤미아 지방에 유랑민족인 집시가 많이 살고 있었으므로, 15세기경 프랑스인은 집시를 보헤미안이라고 불렀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사회의 관습에 구애되지 않는 방랑자,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는 예술가·문학가·배우·지식인들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고, 실리주의와 교양 없는 속물근성의 대명사로 되고 있는 필리스틴(Philistine)에 대조되는 말이다.

집시 인구는 약 180~400만으로 추정하며, 그 가운데 유럽에는 제2차 세계대전 전에 75만~150만, 근동(近東)에는 6~20만, 북아메리카 대륙에는 10만 내외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집시라고 해서 모두 가난하며 떠돌이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다.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남서쪽 약 80km 거리에 있는 부제스쿠에 살고 있는 집시들은 화려한 저택을 갖추고 부유하게 살아가기도 한다. 이들은 금속공예로 부를 축적했으며 현재에도 그들만의 전통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보헤미안 랩소디’는 2018년 10월 말 국내 개봉한 전기, 음악, 드라마 영화이다. 브라이언 싱어와 덱스트 플레처가 감독을, 앤서니 매카튼이 각본을 맡았다. 영화의 주요 줄거리는 리드싱어 프레드 머큐리의 삶을 중심으로 밴드 퀸의 결성부터 1985년 라이브 에이드 공연까지, 15년 간 일어난 얘기를 다룬다.

영화는 2017년 9월 영국 런던에서 브라이언 싱어의 지휘 아래 촬영이 시작됐다. 하지만 2017년 12월, 제작과정 내에서 싱어의 태만함과 출연진·제작진과의 불화로 인하여 브라이언 싱어가 감독직에서 해고당한다. 이후 덱스터 플레처가 감독직을 이어 받아 촬영 마무리와 후반 제작을 맡았다. 완성 후 제75회(2018) 골든 글러브상 드라마 작품상을 수상했다. 우선 주인공 프레디 머큐리 역할을 맡은 라미 말렉은 외모도 닮았지만 몸짓을 통한 인물묘사가 실제 머큐리와 너무도 닮았다는 것이 대표적 강점이다. 실제로 라미 말렉은 머큐리의 제스처에 대한 연구를 굉장히 많이 했다고 한다.

이 영화는 전설을 남기며 일찍 사망한 인간 프레디 머큐리의 삶을 전반적으로 재조명한다. 특히 그와 그의 연인이자 친구인 메리 오스틴과의 사랑과 우정을 비중 있게 그리고 있다. 프레디 머큐리가 메리 오스틴에게 청혼을 하는 장면, 그의 성적 지향을 눈치 챈 메리 오스틴이 그를 떠나는 장면, 프레디 머큐리에게 동성 연인이 생기고 결국 메리 오스틴과 평생의 친구로 남는 장면 등을 세밀히 묘사한다. 시대가 사랑한 예술가였지만 이민자이자 성소수자로서 평생을 외로움에 맞서야 했던 이면의 이야기를 심도 있게 담아냈다. 이후 영화는 프레디 머큐리가 에이즈로 사망했다는 자막으로 마무리된다.

이 영화에 감동받은 배우 송윤아는 '보헤미안 랩소디'를 보고 난 뒤 피아노 연주를 선보였다. 송윤아는 인스타그램에 “이 곡에 감히 도전하다니. 영화의 힘. 25년 전 나를 울게 했던 보헤미안 랩소디”라는 글과 함께 영상을 공개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시대가 사랑한 예술가였지만 이민자이자 성소수자인 머큐리, 그만이 안고 있는 외로움, 그리고 연인 메리 오스틴과의 아슬아슬한 관계가 보는 관객으로 하여금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보헤미안 랩소디’ 문화진단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명작 감상

인간은 어느 날 매뉴얼도 없이 세상에 내던져져 방랑자로 살아간다. 한 번 왔다가 떠나는 삶이지만, 그 과정에는 감동이 있어야 할 테고 기승전결도 있어야 할 것이다. 2018년이 떠나고 새해를 맞이했다. 한 해의 기승전결 중 뭔가 새로운 것을 시작할 때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는 그런 메시지를 남긴다.

글 김문 논설위원 | 사진 20세기폭스코리아

자연이라는 세월이 봄·여름·가을 동안 지천에 멋진 그림을 실컷 그려 놓더니 1월 추운 겨울의 한복판에 우리를 데려다 놓는다. 그렇게도 빠르게 말이다. 세월이라는 것이 쏜 화살 같다고 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고. 누가 나이를 묻거든 “나도 왕년에 25살이었소”라고 하든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40이었소”라고 대답하면 어떨까. 이런 계절에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를 네 번씩 봤다. 춥고 외롭고 쓸쓸했을 법한 계절에 명작과 만났기에 그나마 다행스럽게 마음이 푸근해졌다. 늘 그렇듯, 명작의 감상은 짜릿하고 흥분된다.

대강의 줄거리는 이렇다. 탄자니아 잔지바르 태생으로 영국에서 차별을 당하며 공항에서 수하물 노동자로 일하던 이민자 출신의 아웃사이더 ‘프레드릭 버사라’는 보컬을 구하던 로컬 밴드에 들어가게 되면서 ‘프레디 머큐리’라는 이름으로 밴드 ‘퀸’을 이끌게 된다. 그는 사회적 부적응자였다.

이민자로서의 부적응도 그렇거니와 양성애자로 사회적 부적응자로 살았다. 자신의 성향과 다른, 록그룹이 하지 않는 새로운 음악 시도 등은 평생에 걸쳐 그를 사회적으로 적응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부적응자들을 위한 음악을 하는 부적응 Queen’이라는 영화 속 대사처럼 어쩌면 그의 삶은 사회적 관습과 편견, 차별, 부당함 등에 대한 반항이자 록 스피릿 그 자체였다. 퀸의 다른 멤버들 역시 부적응자이긴 마찬가지. 천체물리학을 전공한 기타리스트 브라이언 메이, 전자공학을 전공한 베이스리스트 존 디콘, 치의학을 전공한 드러머 로저 테일러. 이들은 모두 자신이 전공한 분야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들 모두는 차별화된 음악을 시도하면서 부적응을 분출해낸다.

퀸을 등지고 솔로앨범을 내려던 프레디는 에이즈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과 함께 했던 가족 퀸, 애인 메리의 곁으로 돌아온다. 영화에서는 마지막 20여분이 압권이다. 퀸의 전설적인 공연인 'Live aid'로 마무리되는데 가히 떼창이 가능하도록 전율을 만들어낸다. 영화 제목인 ‘보헤미안 랩소디’로 시작으로 하는 이 공연은 첫 소절에서부터 온몸에 소름을 돋게 한다.

‘이게 현실인가 아니면 그저 환상인가/산사태에 휩쓸린 것 마냥 현실로부터 벗어날 수 없네/엄마 방금 한 남자를 죽였어요/총구를 그의 머리에다 대고 방아쇠를 당겼죠~’

한 편의 오페라를 연상시키면서 불교적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장면을 연출한다.

이어 ‘라디오 가가’ ‘위 아더 챔피언’으로 이어지면서 ‘패배자를 위한 시간은 없어 그러니 여기 살아 이렇게 살아남은 우리는 모두 챔피언이야’를 외칠 때 관중 모두가 일어서서 열광한다.

퀸은 그렇게 전 세계인의 마음을 쥐고 흔들었다.

머큐리는 1991년 11월 47세에 에이즈로 세상을 떠났다.

‘너무 늦어 버렸어, 내 차례가 오고 있어. 등골이 오싹해지고, 항상 몸이 아파와. 모두들 안녕, 난 가야해. 너희 모두를 등지고 떠나 난 진실을 봐야 하니까. 엄마, 난 죽고 싶지 않아. 가끔 난 내가 애초에 태어나지 않았었기를 바랬어’

지난 해 머큐리 사망 27주기를 맞아 본 영화이기에 더욱 가슴이 찡했다. 아니 전 세계인의 가슴을 훔쳤다. 보헤미안은 체코의 보헤미안 지방에 사는 유랑민족이고, 프랑스인들은 그들을 ‘집시’라고 했다. 영어로는 방랑자(vagabond)를 뜻한다. 이들에게 머큐리가 랩소디를 붙였을 뿐인데 불후의 명작이 됐다.


‘보헤미안 랩소디’ 문화진단
그는 누구인가, 프레디 머큐리의 음악과 생애

‘아마 난 하루 중 몇 시간만 정신 들 거야. 그럼 그때마다 노래를 부르게 해줘. 난 록 스타가 아니라 전설이 될 거야.’ 프레드 머큐리가 생을 마감하면서 병상에 누워 친구들에게 한 말이다. 영국에는 퀸이 둘이 있다. 하나는 엘리자베스 여왕이고 하나는 밴드 퀸이다. 프레드 머큐리가 밴드 이름을 ‘퀸’으로 정한 이유는 영국의 전설이 되고 싶어서였다. 도전적이고 강인함이 있다. 도대체 어떤 인물일까.

글 김문 논설위원 | 사진 20세기폭스코리아

프레디 머큐리는 1946년 영국의 식민지였던 잔지바르에서 영국 총독부 공무원의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파로크 버사라’였다. 가계나 이름, 외모 등의 면에서 일반적인 영국인은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는 인도 국적을 가졌으며 8세기에 무슬림들에게 쫓겨 인도로 망명한 페르시아인 조로아스터 교도의 후손이었다.

프레디 머큐리는 인도의 뭄바이에 보내져 10년간 기숙학교에 다녔다. 학창 시절 프레디는 '헥틱스(Hectics)'라는 밴드를 결성하였는데, 그때는 리드 보컬을 맡지 않고 키보드를 연주했다.

1964년에 잔지바르에서 아랍인과 인도인을 규탄하는 운동이 일어나자 프레디 머큐리의 가족은 영국으로 완전히 이주하였고, 프레디는 1969년에 런던의 일링 칼리지(현 웨스트 런던대학)에서 그래픽 디자인 학위를 받았다.

프레디는 1960년대 후반 아마추어 밴드 아이벡스에서 리드 보컬로 활약했는데, 후에 퀸의 앨범에 수록되는 ‘Stone Cold Crazy’와 ‘Liar’의 기본이 되는 곡을 이 시기에 작곡했다. 1970년대에 접어들어 팀 스태플, 로저 테일러, 브라이언 메이 등과 활동하다가 브라이언과 로저와 함께 ‘퀸’을 결성하였으며, 베이시스트로 존 디콘을 직접 선발했다.

1980년대 초에는 ‘퀸’ 활동을 잠시 쉬면서 프로듀서 리처드 울프(Richard Wolf)의 작업에 참여하고 영화 ‘메트로폴리스’의 재개봉 사운드트랙 작업에도 참여하는 등 활동의 폭을 넓혔다. 1985년에는 솔로앨범 ‘미스터 배드 가이’를 발매하였고, 영국 음반 차트 6위에 올랐다.

1991년 11월 자신이 에이즈 투병중이라는 사실을 언론에 공개하였고, 에이즈와의 투쟁에 동참해 줄 것을 호소한 지 하루 뒤인 11월 24일 자신의 집에서 폐렴 등의 합병증으로 45세 나이에 숨을 거두었다.

1992년 4월 부활절. 그를 추모하기 위한 거대한 공연이 영국 런던 웸블리 경기장에서 거행되었으며 퀸의 나머지 멤버들과 엘튼 존, 데이비드 보위, 조지 마이클 등 최정상급 가수들이 대거 참여 했다.

연인 오스틴은
 

영화 속 머큐리의 연인 메리 오스틴(오른쪽).
영화 속 머큐리의 연인 메리 오스틴(오른쪽).

영화에서 보듯 머큐리의 연인으로 메리 오스틴이 등장한다. 오스틴과 머큐리는 1969년 처음 만났다. 19살과 24살의 나이였다. 이때 머큐리는 슈퍼 스타가 되기 전이었다. 그 당시 오스틴은 “내가 만났던 어떤 사람과 달랐다. 자신감이 넘쳤다”고 말했다.

둘의 데이트가 시작됐고 1973년 머큐리가 오스틴한테 프로포즈를 한다. 이에 대해 오스틴은 “크리스마스 때 큰 박스를 받았다. 박스 안에 또 박스가 있었고 또 또 있었다. 마침내 작은 박스 안에 보석반지가 있었다. 깜짝 놀랐다. 그리고 속삭였다. 결혼하자고…”

이후 두 사람은 좋은 관계로 발전했다. 머큐리는 부모에게 오스틴을 소개했고 자신의 마음을 담아 불후의 명곡 ‘Love of my life’를 선사했다. 그러나 결혼식은 취소됐다. 왜? 세월이 지난 2013년 오스틴이 데일리메일 인터뷰에서 “머큐리가 양성애자임을 털어놓은 뒤 결혼식은 취소됐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후 두 사람은 누구보다 가까운 소울 메이트가 됐다. 1985년 머큐리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나의 유일한 친구는 메리 오스틴이며 다른 누구도 원하지 않는다. 내게 그는 관습법상 아내이고 우리는 서로 신뢰하고 그걸로 충분하다”고 말했다.

머큐리는 사망할 때 유언장에 오스틴에게 자신이 거주하던 영국 런던의 부촌인 캔싱턴의 방 28개짜리 저택 가든 로지와 132억 원 상당의 자산을 상속했다. 그러면서 “나의 아내가 됐을 것이기 때문에 이 집은 너의 것”이라고 말한다(일부 자료 위키백과 참조).

[Queen 김문] 사진 20세기폭스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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