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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사람들이 주인공인 자서전 ‘기억의책’ 펴내는 박범준 편집장
평범한 사람들이 주인공인 자서전 ‘기억의책’ 펴내는 박범준 편집장
  • 백준상 기자
  • 승인 2019.01.25 09: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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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이 유명인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제주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일대기를 ‘기억의책’으로 펴내는 주식회사 꿈틀의 박범준 편집장으로부터 자서전의 새로운 활용과 모색에 대해 들었다.
 

꿈틀 박범준 편집장.
꿈틀 박범준 편집장.

저술이나 출간이 유명인이나 특정인의 전유물이라는 생각은 고루하다. 이제 온라인에서 누구나 글을 쓰고 발표할 수 있는 세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술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은 쉽게 바뀌지 않고 있다. 활자의 힘, 책(冊)의 위세는 아직도 대단하다. 여기 활자와 책의 세계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사람들을 위해 책을 만들어주는 곳이 있다. 제주에 자리 한 ‘주식회사 꿈틀’은 평범한 사람들의 일대기를 다룬 ‘기억의책’을 펴내 오고 있다.

지난 2005년부터 지금까지 평범한(?) 어르신들의 신산한 삶을 담은 자서전 형식의 기억의책 110여 권을 선보였다. 자서전이지만 주로 칠순, 팔순을 넘긴 노인들이 대상으로 그 특별함이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온다.

‘기억의책’에 평범한 어르신들의 일대기 담아 “모든 삶은 기록될 가치가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기록됨으로써 하나의 역사가 되며, 자손들에게 그의 존재를 알리고 유훈을 남길 수 있습니다. 가문의 족보가 많이 퇴색한 요즈음 자서전의 큰 가능성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기억의책’을 주관하는 박범준 편집장은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자서전의 영역을 개척해가고 있다. 이전에도 주문형 개인출판은 존재했다. 기업체 대표, 고위 정치인이나 퇴직 관료, 유명 연예인 등 우리 사회에서 나름 화려한 삶을 산 사람들이 자서전을 펴내는 출판사의 주 고객이었다.

하지만 ‘기억의책’의 주인공들은 그런 삐까번쩍한 사람들과는 거리가 있다. 미래보다는 과거를 향한 사람들. 그래서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노인이 대부분이다. 책은 자신의 업적과 위업을 자랑하기보다는 자신의 힘들었던 순간과 행복했던 순간 등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보고 후손들에게 자신의 존재와 뜻을 알리는데 중점을 둔다. 그런 과정에서 살아온 삶의 의미를 되새기고 가족 간의 화합을 도모하며 그간의 오해를 풀기도 한다.

기억의 책 ‘세풍에 굽은 손, 행복을 쓰다’는 서울에 사는 딸의 의뢰로 제주 해녀 김복희 씨의 일대기를 기록한 책이다.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 홀로 해녀 일과 장사로 삼남매를 장성시킨 어머니의 고생담과 자녀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글과 사진으로 고스란히 표출되어 있다. 어머니의 고생담을 접한 자녀들의 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사랑 표현 또한 느낄 수 있다.

“구술 정리를 위한 인터뷰 때,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처음에는 ‘나 같은 사람들이 뭔 할 말이 있다고…’ 하는 식으로 손사래 치시다가 나중에는 당신들 얘기에 스스로 빠져드십니다. 결국 가슴에 묻었던 얘기들을 모두 풀어놓은 다음에는 후련하고 행복하다고들 말씀하십니다. ”

박 편집장은 드라마와 같은 자서전 주인공의 스토리에 인지상정(人之常情)으로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고, 한 번도 눈물을 쏟지 않은 인터뷰가 없었다고 밝혔다. 아울러 우리의 부모 세대가 얼마나 어려운 시절을 보냈는지를 알 수 있었다고 했다.

박 편집장은 언젠가는 가뭇없이 사라질 어르신들의 기억을 책으로 고정하는 이 일을 하는 것이 즐겁고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사회적으로도 꼭 필요한 일이라 생각해 자비 출판 비용도 기존의 20~30% 수준으로 내려 접근성을 높였다. 주식회사 꿈틀은 사회적 기업으로서 16명의 임직원을 고용하며 일자리 창출에도 기여하고 있다.


‘기억의책’ 해외에서도 만들어진다
 


‘기억의책’ 프로젝트는 박범준 편집장이 아버지의 자서전 ‘기억의 연(緣)’을 출간하며 본격화됐다. 서울 출신에 명문대를 나온 박 편집장은 졸업 후 4년간 IT회사를 운영한 이후로는 대전 무주 광양 등을 떠돌며 10년간 뚜렷한 직업 없이 지냈다. 몽고 여행 이후 전원생활에 푹 빠져 제주에 정착하기 전까지 도시를 등졌던 것이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와는 대화가 안 되어 답답함을 느껴왔던 그와, 명문대를 나오고도 거지반 백수생활을 하는 아들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아버지가 사이좋을 리 없었다.

그러던 중 그는 호주 심리학자인 스티브 비덜프의 책 ‘남자 그들의 이야기’에서 “당신이 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하며, 나이든 다른 남자들의 사랑과 존경들 받을 수 있는 상태에 이를 때까지 당신은 소년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다”라는 문구를 접하고 아버지와의 관계 개선에 나섰다. 방법은 그 심리학자의 추천대로 아버지의 어린 시절 얘기를 듣는 것이었다.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옛날 기억으로 책을 만들어보자고 아버지께 제안했다. 아버지의 흔쾌한 수락으로 책이 만들어졌으며, 그동안 아버지의 몰랐던 면을 알게 되어 이해의 폭이 넓어지면서 부자관계도 좋아졌다.

“그동안 아버지로부터 가끔 짧은 에피소드 형태로 과거사를 듣기는 했지만 당시 상황과 배경에 대해 자세히 듣고 나니 제가 아버지를 전혀 몰랐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버지에 관한 책을 만들면서 이런 게 필요하구나, 예전에는 족보라는 것이 그런 역할을 했는데 이제 그것을 보완할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겠구나, 라는 절실한 생각이 ‘기억의책’으로 귀결되었습니다.”

그는 ‘기억의책’에는 스토리가 있어 족보보다 재미있으므로 일가친척은 물론 손주들도 읽어볼 것이라고 자신했다. 박 편집장은 현재 ‘기억의 책’ 프로젝트는 제주에서 전국으로 확대되었으며, 이제 해외로도 넓혀 나가고 있다. 호주 동포의 의뢰로 독립유공자인 남편과 시아버지를 평생 모신 할머니의 얘기를 조만간 책으로 출간한다. 상반기 중 대만에 지사를 설립할 계획이다.

“가족공동체에 대한 생각을 공유하는 아시아에서 먼저 시작해서 세계 각국에서 기억의책이 만들어지는 꿈을 꾼다”는 그는 “기억의 책이 의미 있는 자료로 남길 원하며, 하나하나 모여 역사를 이루는 그날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Queen 백준상 기자] 사진 퀸 사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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