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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특별조명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특별조명
  • 김문 논설위원
  • 승인 2019.04.11 10: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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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특별조명①
임시정부는 왜 상하이를 택했나

 


4월 11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는 역사적인 날이다. 정부는 지난해 7월 '대통령 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발족하고 임시정부 100주년의 다양한 기념사업들을 준비하고 있다. 우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떠올릴 때 상하이를 대표적으로 떠올린다.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태동했고 이후 여러 곳을 옮기며 활동한다. 임시정부는 왜 상하이를 택했을까?

글 김문 논설위원 | 사진 양우영 기자, 서울신문

1912년 상하이의 가을밤. 한 젊은 청년이 모자를 푹 눌러쓰고 김신부로 인근 신천 지역에서 서성인다. 담배를 피울까 말까 고민하다가 주머니에서 성냥을 꺼내 불을 붙인다. 길게 담배연기를 내뿜는다. 좁다란 골목길을 따라 걷는 발걸음이 무거워보인다. 그러나 곧 비장한 모습으로 초라하게 생긴 집으로 들어간다. 낡은 책상과 의자에 오며 가며 걸터앉았다 일어선다. 잠시 상념에 빠진다. 파르르 떨린 입술에서 뭔가 내뱉는다. ‘마음이 죽어버린 것보다 더 큰 슬픔이 없고, 망국(亡國)의 원인은 이 마음이 죽은 탓이다. 우리의 마음이 곧 대한의 혼이다. 다 함께 대한의 혼을 보배로 여겨 소멸되지 않게 하여 먼저 각자 자기의 마음을 구해 죽지 않도록 할 것이다.’

신규식, 3.1운동과 상하이임시정부의 주춧돌을 놓은 사람이다. 그는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을 기획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설계자’로 평가받는다. 나라를 위해 세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을 만큼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다. 그런 과정에서 한쪽 눈을 잃었다. 그래서 호를 예관(睨觀)이라 했다. 흘겨볼 ‘예’자인데 일본놈들을 흘겨보겠다는 뜻에서 그렇게 정했다. 그가 초기 임정을 중국 상하이에 뿌리내리게 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은/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이 목숨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할 양이면/나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종로의 인정(人定)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두개골로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기뻐서 죽사오며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상록수’의 작가 심훈이 일제 강점기때 조선광복을 염원하며 쓴 시다. 1960년대 세계적인 시학 이론을 세운 C. M. 바우라(영국 옥스포드대 교수)는 그의 책 ‘시와 정치’에서, 놀랍게도 한국의 심훈을 얘기한다. 당시 세계는 한국이 어디에 붙어있는 땅덩어리인지도 잘 모를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심훈의 시 ‘그날이 오면’이야 말로, 세계 저항시의 으뜸이라고 평가했다.

광복은 글자 그대로 ‘빛을 되찾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일제에 의해서 나라를 빼앗기고 식민지 통치를 받고 있는 상태는 곧 암흑이며 이에 대한 대치관념으로 통한다. 따라서 광복은 나라를 되찾고 스스로를 다스리는 국가가 있는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오는 것을 의미한다. 논리적인 개념이 아닌 국권을 회복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말하자면 민족독립의식이며, 국권회복의식이며, 자주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이후부터는 한국인의 정치의식 속에서 ‘광복=왕권국가회복’이라는 의식이 종국적으로 청산되었고, 광복과 더불어 우리가 가져야 할 나라, 즉 정권형태나 정치·사회제도를 현대 정치사상에 입각해서 생각하게 됐다. 광복운동의 역사는 곧 이러한 현대 정치사상, 다시 말해서 시민적 민족주의사상이며 그 중심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다.

우리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떠올릴 때 상하이를 대표적으로 떠올린다.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태동했고 이후 여러 곳을 옮기며 활동한다. 이동 경로는 이러했다. 상하이(1919년 4월~1932년 5월)-항저우, 자싱(1932년 5월~1934년 10월))-난징, 전장(1934년 11월~1937년 11월))-창사(1937년 12월~1938년 7월)-광저우, 퍼산(1938년 7월~1938년 10월)-류저우(1938년 11월~1939년 4월)-치장, 충칭(1939년 5월~1945년 11월) 등을 거쳐 광복을 맞는다. 이동과정에서 임시정부 인사들은 한 곳에 집중해서 있기보다 분산해서 거주했다. 일제의 눈을 피해서이기도 하지만 도시 지역보다 주변 지역이 거주비가 싸다는 현실적인 이유가 가장 컸다.

2019년 1월 상하이 영안백화점 옥상에 있는 기운각(綺雲閣, 비단 구름의 누각) 앞에서 1921년 신년회 기념사진을 찍은 것이 최근 공개됐다. 사진에는 신규식, 신익희, 김구, 안창호 등의 얼굴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있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물이었다. 그렇다면 임시정부 탄생지가 왜 상하이였을까. 근대 개화기부터 한국인들이 드나든 주요 도시 중 하나가 상하이였다.

처음에는 인삼 장사를 비롯한 상인들이 왕래하다가 점차 정치적 목적을 가진 인사들이 드나들었다. 그러다가 1910년 나라를 잃자 독립운동가들이 드나들면서 상하이는 한국 독립운동사의 중요한 도시가 됐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자료집 편찬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던 김희곤 안동대 교수는 상하이에서 출발하게 된 특징 중 하나가 조계(租界), 그러니까 주로 개항장에 외국인이 자유로이 통상 거주하며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도록 설정한 구역에 있었다는 사실을 ‘임시정부 시기의 대한민국 연구’라는 책에서 말한다. 1845년 영국 조계가 만들어졌고 미국은 성공회 주교가 나서서 1848년 홍커우(虹口) 일대를 거류지로 장악했다. 그리고 1849년 프랑스 조계가 만들어졌다. 나중에 미국과 영국은 공동조계로 통합관리됐다.

프랑스 조계
이런 가운데 한국인들에게 주목을 받은 지역은 단연 프랑스 조계였다. 프랑스는 자유와 평등을 이상으로 하는 국가이기 때문에 조계 안에서 비교적 간섭을 덜 받는 분위기였다. 게다가 일본의 주권이 미치지 않아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프랑스 조계를 중심으로 활동하기에 용이한 편이었다. 프랑스 영사관이 신변보호를 해줄 것이라는 기대감도 있었다. 따라서 독립지사들이 이곳으로 자연스럽게 집결하게 됐다는 것이 김 교수의 말이다. 게다가 상하이는 망명객, 위험인물, 낙오자, 부패분자, 낭인호객 등 잡다한 인물들이 모여들었으며 이와 동시에 한국을 비롯해 말레이시아, 베트남, 인도, 태국 등 여러나라 애국지사들이 이 틈에 끼여 있어 신분노출이 쉽지 않다는, 즉 익명성이라는 장점도 있었다. 이처럼 상하이는 자유의 도시이며 평화의 이상향이나 마찬가지였다.

1920년대초 상하이는 중국무역의 50% 가까이 이루어진 곳이다. 그것은 좋은 지리적 위치 때문이다. 세계와 중국을 이어주는 다리역할을 한 셈이다. 무역의 중심이었던 만큼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이고 상하이만이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게 된다. 1930년대 상하이는 ‘오리엔탈 헐리우드’라고 할 만큼 영화산업이 발전했고 이에 따라 음악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영화배우이자 가수인 저우 쉬안은 상하이 영화계의 아이콘으로 유명해지기도 했다. 이런 문화환경으로 동남아와 유럽 등 여러 나라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상하이에서 태어나 김구, 이동녕, 이시영 등 독립운동가들의 품에서 자란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은 최근 발간한 자신의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1920년대 상하이는 애국지사들에게 천혜의 망명지이자 항일투쟁의 근거지 역할을 톡톡히 했다. 당시 우리 임시정부는 상하이 주재 프랑스 조계내에 청사를 두고 항일투쟁을 벌였다. 상하이는 민족지사들에게 눈물과 애환의 현장이기도 했다. 백범 선생의 부인이 둘째 아들 김신을 낳고 폐병으로 생을 마친 곳도 상하이다. 그런데 이들과 별개로 사업가나 모리배들에게 상하이는 ‘기회의 땅’이기도 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수많은 한국인들이 상하이로 건너가 새 삶을 개척했다.”

상하이가 독립운동 기지로 시선이 모아진 것은 1912년에 결성된 ‘동제사’(同濟社)가 상하이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가 효시가 되면서였다. 이후 박달학원(1913), 신한독립당(1915), 신한청년당(1918) 등을 거치면서 1919년 3.1운동 직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파리에서 열린 강화회의가 결정적 계기가 됐다. 1918년 11월 독일이 항복함으로써 전쟁을 마무리짓고자 강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은 상하이 지역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이 회의를 통해 독립을 달성할 수 있는 기회로 판단하고 대표자를 뽑는 과정에서 임시정부가 세워졌다. 결국 1919년 4월 11일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각도 대의원 30명이 모여서 임시헌장 10개조를 채택했으며 이틀 뒤 한성임시정부와 통합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특별조명 ②
3.1 항거와 여성독립운동가들

 

여성들의 임시정부 홍보와 선전활동.민영주유관순, 어윤희, 신관빈, 임명애, 권애라 등 여성독립운동가들.
여성들의 임시정부 홍보와 선전활동.민영주유관순, 어윤희, 신관빈, 임명애, 권애라 등 여성독립운동가들.

대한민국 독립에서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떠올리긴 쉽지 않다. 그러나 100여명의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대한민국을 위해 항거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있다. 임시정부 100년을 맞아 다시 조명해 보는 잊혀진 여성 독립운동가들. 당대 활약한 여성독립운동가 3명의 활약상을 찾았다.

권기옥
권기옥(權基玉, 1901.1.11~1988.4.19)은 1901년 1월 평안남도 평양부 상수구리에서 권돈각(權敦珏)과 장문명(張文明)의 4녀 1남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때에는 상당히 부유한 편이었으나 놀기 좋아하던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유산을 모두 날려 선생이 4살 되던 해에는 남의 집 문간방 신세를 질 정도로 가난하게 되었다. 11살 되던 해에 은단공장에 취직하여 집안 살림을 돕던 그는 이듬해 12살의 나이로 장대현교회(章臺峴敎會)에서 운영하던 숭현(崇賢) 소학교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 숭의여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수학 교사 박현숙(朴賢淑)의 권고로 당시 숭의여학교에 결성된 비밀결사대 송죽회(松竹會)에 가입,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19년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신흥식으로부터 만세운동에 관한 연락을 받은 박현숙의 지휘 아래 한선부(韓善富), 김순복(金順福), 차진희(車鎭姬), 최순덕(崔順德), 김명덕(金明德), 장성심(張聖心) 등과 함께 기숙사의 일본인 사감 호시코의 눈을 피해 태극기를 만드는 한편 애국가 가사도 등사하였다.

그리고 그것들을 대찰리(大察里)의 어느 집 장롱 속에 깊숙이 숨겨 두었다가 치마 속에 감추어 숭덕(崇德)학교 지하실로 운반하였다. 3월 1일 숭덕학교에 모인 사람들은 강규찬(姜奎燦) 목사의 개회선언에 이어 김선주(金善柱) 목사가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곽건응(郭權應) 목사가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교정을 뛰쳐나와 거리에서 만세운동을 펼쳤다. 3월 4일 교사 박현숙이 체포되고 학교 주변에 형사들이 깔린 가운데 선생은 한선부, 김순복 등 20여 명과 함께 거리로 뛰쳐나가 만세를 불렀다. 며칠 후 선생은 이 일로 길을 가다 형사에게 붙잡혀 평양경찰서에서 3주의 구류처분을 받고 유치장에 감금당하였다.

유치장에서 풀려난 권기옥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연락원인 임득삼(林得三), 김정직(金鼎稷), 김순일(金淳一) 등과 함께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고 임시정부 공채를 대량으로 판매하여 그 자금을 임시정부로 송금하는 등의 일에 투신하였다. 권기옥은 숭의여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였는데, 학생들은 자신들의 긴 머리를 잘라 판 돈을 가져오거나 어머니의 패물을 판 돈을 내놓기도 하였다.

김원봉의 아내 박차정
영화 ‘암살’과 ‘밀정’에 김원봉이 등장한다. 부인과 함께 등장한다. 이름이 박차정이다. 만난 지 1년만에 결혼했다. 북경대학에서 인연을 맺었다. 중국 공산청년동맹의 비밀 초청강연회에 참석했다. 강연이 끝나고 토론회에서 만났다. 끝날 무렵 인력거를 같이 타게 됐다. 이때 좋아하는 책 얘기를 했다. 소설 쓴 얘기 등등. 독립운동가인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두 잃어 고아가 된 채 겨울밤을 지내는 오누이가 등장한다고 스토리도 얘기했다. 이런 인연으로 박차정은 의열단 핵심 멤버가 됐다.

1932년 남경으로 거주지를 옮겨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서 임철애. 임철산 등의 가명을 사용하며 여자교관으로 활동했다. 김원봉은 1935년 남경에서 좌우 독립단체 9개를 통합하여 조선민족혁명당을 창당했다. 이때 부인은 1936년 이청천 장군의 부인 이성실과 함께 민혁당남경조선부녀회를 결성하고 모든 조선의 여성들이 총단결하여 민족독립운동과 여성해방운동에 참여할 것을 주창했다. 또 조선민족전선연맹이 창립되자 산하군사 조직인 조선의용대의 부녀복무단장으로 활동하면서 의용대원의 사기진작과 선전활동에 매진했다.

그러던 1939년 2월, 강서성 곤륜산 전투 중에 큰 부상을 입고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1944년 5월 27일 중경에서 37세 일기로 세상과 이별을 했다. 정부는 이러한 사실을 뒤늦게 알고 순국한 박차정에게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신채호의 아내 박자혜
박자혜는 1895년 12월 11일 경기도에서 출생했다. 부친은 중인 출신의 박원순이다. 어린 시절 나인으로 궁궐로 들어갔다. 그 당시 궁궐 밖에서는 여성들이 근대교육을 받으며 전통에서 벗어나고 있었지만 녹록하지 않았다. 박자혜는 이러한 생활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1910년 일제강점에 의해서였다. 1910년 12월 30일 일제는 ‘황실령 제34호’로 ‘이왕직관제’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한 달 뒤 궁내부소속 고용원 340명과 원역(員役) 326명을 해직시켰다.

이 과정에서 박자혜는 궁녀 신분을 벗어나게 되었고, 함께 나인 견습생 생활을 한 상궁 조하서를 따라 숙명여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가 3년여 이상을 간호부로서 근무하고 있을 때, 나라 안에서는 독립에 대한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고 이는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으로 나타났다. 만세운동은 3개월 이상 전개되었고. 3월 1일부터 서울에 있는 각 병원에는 부상자들이 줄을 이었다.

총독부의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선생을 비롯한 한국인 간호원들은 18명이었으며 한국인 남자 의사로는 내과에 김용채, 산부인과 김달환, 외과 신창엽, 소아과 권희목, 피부과 김형익 등이 있었다. 그리고 연구과에는 김영오가 있었다. 이들은 환자들과 나라 잃은 슬픔을 함께 느꼈다. 박지혜도 단지 자신의 생계를 위해서 간호사로 일을 하고 있다가 이들을 보면서 민족의 울분을 느꼈다. 그리고는 자신도 만세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목사 이필주와 연결되어 ‘간우회’를 조직하였다. 선생은 의사 김형익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간호사들에게 동맹파업에 참여할 것을 주창하였다. 이 사건으로 총독부의원장이 간호사들의 만세운동에 책임을 지고 유치소에 수감되어 있던 간호사들의 신병을 인수하였다.

박자혜는 만주에 있는 지인을 찾아갈 요량으로 병원에는 2주간의 휴가를 내놓고 서울역으로 가서 봉천행열차를 탔다. 그는 봉천에서 동래상회라는 정미소를 경영하고 있던 석운 우응규를 수소문하여 찾아가 그에게 국내 정세와 망명을 하게 된 경위를 털어 놓고 도움을 청했다. 우응규는 박자혜의 숙소를 마련해주었다. 그리고 이십여 일이 지난 후 북경의 명망 있는 인사에게 연경대학 편입학을 부탁한다는 편지 한 통과 노자를 마련해주었다. 그리고 1919년 연경대학 의예과에 입학하였다.

이후 북경에서 우당 이회영 선생 부인의 소개로 신채호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그때가 1920년 봄이었다. 첫 번째 부인과 별거한 뒤 10년간을 독신으로 지냈던 신채호 선생과 당시 24살이었던 박자혜 선생은 이렇게 해서 함께 북경 금시방가(錦什坊街)의 한 셋집을 얻어 가정을 꾸리게 되었다. 1921년 음력 1월 선생은 첫 아들 수범을 출산하였다. 신채호 선생으로서는 너무나 기쁜 일이었다. 그는 약간의 원고료와 후원으로 겨우 생계를 유지해왔지만 항상 하는 일은 독립운동과 관련된 일뿐이었다. 1922년 둘째 아들을 임신했을 때, 신채호는 더 이상 경제적으로 감당할 수 없어 국내로 돌려보냈다.

국내로 돌아온 박자혜는 인사동에 ‘산파 박자혜’라는 간판을 내걸고 생계를 유지하였다. 연경대학에 다닐 때는 여학생 축구부까지 만들 정도로 활달했지만 경제적 궁핍함으로 남편과 생이별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는 하루도 눈물 마를 날이 없었다. 가족들이 국내에서 어려움을 견디며 지내는 동안 신채호 선생은 1923년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 활동에 가담하였다. 이러한 어려운 생활을 더욱 괴롭히는 것은 일경들의 감시와 폭력이었다. 큰 아들 수범이 학교에 가려고 집을 나서면 일경이 책가방을 뒤져 검색을 했다. 혹시라도 어린 수범을 시켜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어떤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943년 홀로 셋방에 살다가 병고로 세상을 떠났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특별조명 ③
임시정부 수립 100년과 ‘여성사’ 재해석

 

‘여성독립운동가, 미래를 여는 100년의 기억전’. 고양시 국립여성사전시관.
‘여성독립운동가, 미래를 여는 100년의 기억전’. 고양시 국립여성사전시관.

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맞아 올해는 지난 100년과 함께 해온 ‘여성사’를 재해석한다. 판결문·관보 등을 통해 미진했던 여성독립운동가를 추가 발굴하는 등 산업화 과정에서 여성의 역할을 복원한다. ‘여성사’의 재해석, 늦은 감이 있지만 제대로 연구, 발전시켜 나가길 기대해본다.

1919년 3월 1일 이후 전국방방곡곡을 가득 메운 하나의 외침, 대한독립만세!
여성들은 종교, 학교, 배움, 신분, 연령 등의 위치는 달랐지만 하나의 열망을 담아 한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총포를 앞세운 일제의 탄압 속에서 갇히고 고문받고 심지어 학살당했으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현재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는 내용이 명시돼 있다. 이처럼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우리 민족사의 큰 전환점이었으며, 현재의 우리나라를 있게 한 커다란 밑거름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우리나라 최초의 삼권 분립에 기초한 민주공화제 정부였고, 독립운동을 총지휘하는 중추적 역할을 수행했다. 임시정부는 수립 이후 끝없는 갈등과 내분으로 수차례 해체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27년간 우리 민족 독립운동의 핵심체로 큰 역할을 했다. 특히 임시정부의 지도이념인 자유주의와 삼균주의(三均主義)는 1948년 대한민국 헌법에 반영되어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기초가 되었다.

특히 올해는 지난 100년과 함께 해온 ‘여성사’를 재해석한다. 판결문·관보 등을 통해 미진했던 여성독립운동가를 추가 발굴하고, 특별 전시 및 공연 등을 통해 이를 홍보한다. 또 기림의 날(8.14) 행사 등을 통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지원 사업(추모 사업 등)을 추진한다. 아울러 피독 간호사, 청계천·구로공단 등 노동·민주화 역사를 조사해 산업화 과정에서의 여성의 역할을 복원한다. 또 독립·전쟁·산업화·민주화 과정의 여성사 전시 및 교육을 위한 여성사박물관(가칭) 건립도 검토한다. <출처,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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