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시간뉴스
[옛날 Queen 다시보기] 1990년 12월호 -포토에세이
[옛날 Queen 다시보기] 1990년 12월호 -포토에세이
  • 양우영 기자
  • 승인 2019.04.28 09: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90년 12월호
1990년 12월호 -포토에세이1
1990년 12월호 -포토에세이1
1990년 12월호 -포토에세이2
1990년 12월호 -포토에세이2

 

12월에 까치밥 등불을 다는 까닭

입동이 지나자 파초를 분에 옮겨 거실로 들여왔고, 소설이 가까워 오자 뜰나무의 모과를 따내렸다. 파초는 키가 너무 커서 둥치를 자를까하다가 넓고 헤어진 파초잎이 소리 없이 흐르는 늙은 강물 같기도 하고 소매 접어 걸어 둔 도포자락 같기도 하여 잎이 천장에 가 닿은채로 세워 두기로 하였고, 모과는 백자 주발에 담아 먼 마을 개 짖는 소리로 문갑 위에 앉혀 두었다.

파초를 뜰에서 집안으로 옮겨 오고 모과를 서리나무에서 따내려 털고나니 이미 대설(大雪)의 절기를 바라보는 12월로 접어들었다.

12월!

허참, 어느새 12월이라니. 가랑잎 같은 손을 마주 잡아 보느라니 이 손이 눈엽(嫩葉)처럼 고왔던 어릴적 시절은 그만 두고라도 언제 그 창창한 날의 빛나는 바람에 나부껴 보았으며, 가을 물 곱게 흘리는 단풍나무 눈부신 잎은 되어 보았던가 하는 생각에 세월의 덧없음을 새록새록 느끼는 것이다.

담배 한 대를 피워물고 까투리 빛으로 가라앉아 있는 창 너머 관악산을 무연(憮然)히 바라보고 앉아 있는 나를 자실(自失)에서 깨워나게 해주는 전화 벨 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려 온다.

"선생님! 저에요"

B시인의 밝은 목소리다. 내 기간에 방해가 안되면 당장 내집으로 찾아 오겠단다. 무슨 용건이냐고 물으니 특별한 용건은 없고 '불시에 선생님이 뵙고 싶어서', '차나 한 잔 나누고 싶어서'란다.

있는 곳을 물으니 광화문이라고 했고, 그렇다면 나도 마침 울적하던 참이라 내가 그리고 나가겠다고 했다. 늘상 입고 다니던 옷을 옷걸이에서 따내려 입고 넥타이도 매지 않은 채 낡은 코트만 걸치고 길을 나선다. 집에서 한5분 거리. 버스 정류장까지의 행기을 오고 가는 아낙네들의 발길이 오소소 바빠진다. 행객(行客)을 부르는 노점상들의 목소리도 바빠진다.

51번 좌석버스. 이 버스는 내가 이 마을로 이사를 온 날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7년 동안 종로거나, 광화문이거나, 명동이거나 할 것 없이 내 용처가 닿는 곳에 그때마다 나를 업어다 내려 준 충직한 노복(奴僕)이었다.

이 버스의 등에 업히기만 하면 나는 이내 굴러가는 엔진 소리에 안도감이 오고, 저도 모르는 사이에 잃은 잠의 감미로움에 젖어들곤 하는 것이다.(중략)

글/정완영(시인)

 

 

Queen DB

[Queen 사진_양우영 기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