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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오신날] 법정스님 9주기 추모법회 영상 법문...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부처님오신날] 법정스님 9주기 추모법회 영상 법문...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 법정스님
  • 승인 2019.05.1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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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오신날] 법정스님이 남긴 지혜의 말씀을 듣는다
부처님 오신 날. 법정스님 9주기 추모법회 영상 법문...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부처님오신날] 법정스님 9주기 추모법회 영상 법문...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지난 3월 11일 길상사에서 가진 법정스님 9주기 추모법회. 이날 추모법회에서는 1994년 3월 26일 서울 양재동 구룡사에서 법정스님이 말씀하신 법문이 영상을 통해 전해졌다. ‘행복은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것, 선행은 마음을 나누는 것, 무소유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게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 행복에 이르는 지혜와 자비의 삶에 대한 법정스님의 큰 말씀들이 아프고 복잡한 현대인들의 마음을 다독여주었다. 이날의 법정스님 영상법문 전문을 옮긴다.(Queen 4월호)

‘서편제’란 영화 보셨죠? 보고 눈물들 많이 흘리셨습니까?

저도 아주 모진 사람인데 서편제를 보고 눈물 흘리고, 또 오늘 불우한 우리 이웃의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본성입니다. 과일에 씨앗이 들어 있듯이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하나의 씨앗을 지니고 세상에 나옵니다. 그것을 불성(佛聖) 혹은 영성(靈性)이라고 이름합니다. 그 씨앗을 움트게 하고, 꽃 피우는 일이 삶의 의미이고 보람입니다. 영성과 불성의 씨앗을 움트게 하고, 꽃을 피우려면 우리들 마음을 맑히는 일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흔히 마음을 맑혀라, 마음을 비워라 얘기합니다. 원래 종교적인 세계에서는 지극히 관념적인 말을 많이 합니다. 이 얘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마음을 맑히고 비울 것인가. 절에 열심히 나가는 사람 중에도 절에 안 나가는 사람보다 옹졸하고, 꽉 막혀서 뭐 하나 배울 것이 없는 이들도 많이 있어요. 관념적으로만 알기 때문입니다.

관념적인 것으로는 마음이 맑혀지지 않습니다. 물론 참선이나, 염불, 기도를 지극히 해서 마음을 맑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쪽이에요. 자칫 잘못하면 관념으로 빠지기가 쉬워요. 현실적으로 선행을 해야 합니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두루 착한 일을 행할 때 저절로 우리들 마음이 열리고 맑아집니다.

불교 신자들은 잘 아시겠지만 ‘칠불통계(七佛通戒)’라는 것이 있습니다.

제악막작(諸惡莫作) 중선봉행(衆善奉行)
자정기의(自淨其意) 시제불교(是諸佛敎)

나쁜 짓 하지 말고 착한 일을 두루 하라.
절로 마음이 맑아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시절 인연이 오면 스스로 연꽃이 피어납니다. 마찬가지로 두루 착한 일을 하면 우리의 마음은 저절로 맑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또 한 사람의 마음이 맑아지면 그의 둘레도 점점 맑은 기운이 번져 갑니다. 마침내는 온 세상이 다 맑아질 수 있습니다.

가령 부처님과 예수님, 공자님 같은 성인들을 생각해 봅시다. 그분들의 맑은 마음은 메아리가 되고, 두루 비추는 빛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만일 그분들이 인류 역사상 안 계셨다면 현재의 우리는 전혀 다른 삶의 모습을 하고 있을 겁니다.

너의 마음 따로 있고, 내 마음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마음은 하나예요. 한 뿌리에서 파생된 가지가 당신의 마음이고, 나의 마음이고, 그의 마음입니다. 아까 우리가 어려운 이웃의 이야기를 듣고 눈물지을 수 있었던 건 바로 마음이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한 뿌리에서 나온 가지가 아파하니까 우리도 아픔을 느낀 겁니다. 이것이 마음의 묘리(妙理)예요. 마음의 메아리입니다.

그럼 선행이란 무엇일까요? 선행, 착한 일. 그것은 나누는 일입니다. 나눈다는 건 많이 가진 것을 그저 퍼주는 게 아니에요. 나눔이란 가진 사람이 이미 받은 것에 대해 마땅히 지불해야 할 보상의 행위이고, 감사의 표현입니다. 본래 내 것이란 없습니다. 지금 내가 가진 것은 이 우주의, 법계의 선물을 잠시 맡아 가지고 있는 것뿐입니다.

육바라밀(六波羅蜜) 가운데 첫째 가는 것이 보시 바라밀입니다. 보시란 나누는 겁니다. 또 바라밀이란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는 일, 세상을 사는 일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보시 바라밀이란 세상을 사는데 제일 가는 덕이 보시, 곧 나누는 일이란 뜻입니다. 기쁨은 나누면 곱으로 커집니다. 반대로 괴로움과 슬픔은 나누면 몇 분의 일로 줄어들어요. 나누는 일에는 이처럼 미묘한 율동이 따릅니다.

관계는 일방적인 것이 아닙니다. 서로 주고받는 가운데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그 관계는 우리 자신을 만들어 갑니다. 좋은 관계는 우리를 좋게 만들고, 언짢은 관계는 우리를 언짢게 합니다.

세상 만물은 시간이 감에 따라 시들고 쭈그러듭니다. 새 차도 한 5~6년 타고 나면 폐차 직전에 이르지 않습니까? 거죽은 언젠가 늙고 허물어집니다. 생로병사(生老病死)하고 생주이멸(生住異滅)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중심은 언제나 새롭습니다. 영혼에 나이가 있습니까?

거죽에서 살지 않고 중심에서 사는 사람은 어떤 여건 속에서도 시들거나 허물어지지 않습니다. 유행을 따르는 사람들은 빨리 시들어요. 끝도 없는 것을 따르려니 안 그러겠어요. 하지만 자기중심에서 살면 어떤 삶의 질을 추구하는 사람이든 시들지 않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중심이 잡혀 있기 때문이에요.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존재 전체를 기울여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이 다음 순간 더 많은 이웃들을 사랑할 수 있어요. 다음 순간은 지금 이 순간에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따뜻한 마음을 나누면 서로의 마음이 맑아져, 맑고 향기로운 꽃을 피우게 됩니다.
 

법정스님.
[부처님오신날] 법정스님의 깨달음에 이르는 길.

맑고 향기롭게 살려면 될 수 있는 한 작은 것, 적은 것으로써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큰 것과 많은 것에는 살뜰한 정이 가질 않아요. 늘 겪는 일이죠. 선물의 경우 너무 크고 많으면 받는 사람은 부담스럽습니다. 작은 것, 적은 것이 귀하고, 소중하고, 아름답고, 고마운 것을 알게 되면 맑은 기쁨이 샘솟습니다. 그것이 바로 행복입니다. 행복은, 맑은 기쁨은 외부에서 오는 게 아닙니다. 저절로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것입니다.

자랑할 것은 못 되지만 제가 있는 곳은 궁핍하고, 거의 모든 것이 원시상태예요. 하지만 그게 편해서, 그곳에서는 순수한 내가 존재할 수 있어서 지금 나그네처럼 머물고 있는 겁니다. 지난 겨울에 밖에는 눈이 내리고, 뒷골에서는 노루 우는 소리가 들리고 하니까 내 마음도 소년처럼 좀 부풀어 오르려고 해요. 그래서 묵은 편지들을 뒤적이다가 몇 군데 답장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한참 먹을 갈다가 편지 쓸 종이를 찾으니까 도배하고 남은 종이 사이에서 쪼가리 화선지가 두어 장 나와요. 다행이다 싶어 그걸 잘 다듬어서 편지지를 만들었죠. 그런데 종이가 한정되어 있다 싶으니까 아주 조심해서, 잔글씨로 편지를 쓰면서 아주 고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며칠 후에는 서울에 나왔다가 지업사에서 한 20장의 화선지를 사갖고 갔습니다. 그랬더니 쪼가리 종이에 편지를 쓸 때의 그 오붓함, 살뜰함이 어디로 가고 없어요.

많다는 건 그런 겁니다. 하나가 필요할 때 둘을 가지려고 하지 마세요. 둘을 갖게 되면 그 하나마저 잃어버립니다.

"무소유란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

무소유란 아무 것도 갖지 않는 게 아닙니다.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꼭 필요불가결한 것만 가지려는 사람이 바로 무소유자입니다. 소유물은 우리가 그것을 소유하는 이상으로 우리 자신을 소유해 버립니다.

친구 한 사람이 인도 여행을 갔습니다. 거기서 친구는 옛 금속공예품 하나를 사게 됐어요. 상점 주인과 값을 흥정하는데 처음엔 1,000루피를 부르더래요. 그래서 친구는 시치미 뚝 떼고 100루피를 불렀다네요. 그러니까 주인이 150루피 내라고 하더래요. 이 소리를 듣고는 친구가 ‘에라’ 하면서 70루피라야 사겠다고 우겼답니다. 결국 이 친구는 주인과 옥신각신 끝에 70루피에 물건을 샀대요. 그래서 좋아라 하니까 주인이 “Are you happy?”하고 묻더래요. 그 말에 그만 친구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고 합니다.

행복은 결코 이런 것이 아닙니다. 집이나, 자동차, 가전제품, 심지어는 지식까지도 거기에 집착해서 행복을 얻으려 해선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자칫 인간 존재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필요'에 따라 살아야지 '욕망'에 따라 살아선 안 됩니다. '필요'란 생활에 아주 기본적인 욕구예요. 하지만 '욕망'은 없어도 좋을, 분수 바깥의 욕구예요. 부처님께서 마지막으로 설하신 『유교경』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모든 고뇌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만족할 줄 알아라.
만족할 줄 안다면 항상 넉넉하고 즐거우며 평온하다.
그런 사람은 비록 맨땅 위에 누워 있을지라도 편안하고 즐겁다.
그 뜻에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은 설사 그가 천당에 있을지라도 그 뜻에 흡족하지 않을 것이다.”

만족할 줄 모른다는 건 늘 갈증상태란 말이에요. 하지만 만족할 줄 알면 비록 가진 것은 없더라도 부자나 다름없습니다. 행복의 척도는 필요한 것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가 아닙니다.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워져 있느냐에 달렸습니다. 제 자신이 몹시 부끄럽고 가난하게 느끼는 건 나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 앞에 섰을 때가 아닙니다. 나보다 훨씬 적게 가졌지만 그 단순함과 간소함 속에서 삶의 기쁨과 순수성을 잃지 않는 사람 앞에 섰을 때입니다.

과잉 소비와 포식 사회가 인간을 병들게 합니다. 필요하지도 않은 것을 마구 사들이고, 쉬이 버리면서 귀한 줄을 모릅니다. 몸에 좋다면 무소뿔, 호랑이 뼈까지, 그것도 외국에서 수입해서까지 마구 먹어대는 포식 사회 풍조는 우리를 병들게 합니다. 소비자란 말을 생각해 봅시다. 소비자, 쓰레기를 만들어내는 존재란 겁니다. 영혼을 가진 인간이, 무한한 창조를 이루며 살아가야 할 인간이 어떻게 쓰레기나 만들어내는 존재, 소비자가 될 수 있습니까. 불필요한 소비, 과다한 소비를 하기에 그런 소리를 듣는 겁니다.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려면 자연의 질서를 삶의 원리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자연의 일부입니다. 날씨가 궂으면 몸이 쑤시고 아프다고들 하시죠. 하지만 화창한 날이면 괜스레 우리 마음도 밝아집니다. 이게 다 우리가 자연의 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자연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아낌없이 무상으로 베풀어 왔습니다. 맑은 공기, 시원한 바람, 논밭의 기름진 흙, 천연의 생수와 강물. 오늘 종일 말해도 다 못할 정도로 많은 것을 자연은 우리에게 주고 있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전혀 고마운 줄을 몰라요. 감사는 고사하고 함부로 더럽히고, 허물고, 끝없이 학대하고 있습니다. 들짐승조차도 자기 둥지는 더럽히지 않는데 인간이, 소위 문명했다는 인간만이 자기의 생활환경인 자연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만신창이가 되어 앓고 있는 자연은 곧 우리가 병을 앓는 것이요, 자연의 신음 소리는 우리의 신음 소리임을 알아야겠습니다. 왜냐하면 나 자신이, 우리 자신이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소우주이기 때문입니다.

병이 든 자연, 허물어져 버린 자연에는 우리 인간들이 의지할 수 없습니다. 자연이 죽어가듯 인간의 생명도 위협받기 때문이에요. 과잉 소비로 자연환경의 파괴를 부추길 게 아니라 이제는 적은 것, 작은 것의 귀함, 소중함을 알아서 더 이상 자연이 병들지 않게 해야 합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자기 나름의 질서가 필요합니다. 나눔으로써 맑은 기쁨을 얻으려 하고, 만족할 줄 알며, 소유는 꼭 필요한 것으로 스스로 제한하려는 그 마음들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지름길입니다. 이런 태도는 결코 소극적인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지혜의 선택입니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 자신을 속속들이 지켜보면서 삶을 거듭거듭 개선하고 심화시켜 가는 명상이고, 또 하나는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입니다. 전자는 지혜의 길이요, 후자는 자비의 길입니다. 이 두 길을 통해 우리는 본래부터 지녔던 불성과 영성의 씨앗을 틔워낼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인연으로 저마다 자신이 지닌 그 귀한 불성의 씨앗으로 맑고 향기로운 꽃을 피우길 거듭 다짐합시다. 본래 청정한 우리 마음을 선행과 나눔으로 맑혀서 우리가 몸담아 사는 이 세상을 그리고 맑은 은혜 속에서 의지해 살다가 언젠가는 그 품으로 돌아가 영원히 안길 자연을 맑고 향기롭게 가꿉시다.

*여기에 옮긴 글은 1994년 3월 26일, 법정 스님이 서울 양재동 구룡사에서 말씀하신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모임 발족’ 강론을 녹취하여 수록하였습니다.

글 법 정(法 頂) | 사진 서울신문 | 자료 제공 [맑고향기롭게, 길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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