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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와 처녀 뱃사공 숨은 사랑 이야기
김구와 처녀 뱃사공 숨은 사랑 이야기
  • 김문
  • 승인 2019.07.26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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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의 연인 ‘아이빠오’를 아십니까
김구
사망 70주기 김구.

귀에 익숙한 노래 하나 먼저 들어본다. ‘낙동강 강바람이 앙가슴을 헤치면 / 고요한 처녀가슴 물결이 이네 / 오라비 제대하면 시집 보내마 / 어머님 그 말씀에 수집어질 때 / 에헤야 데해야 노를 저어라 삿대를 저어라’ 1950년대 황정자가 불러 히트쳤고 노래비는 함안 악양루에 세워져 있다. 한국전쟁 당시 오빠를 기다리는 여동생의 마음을 전해들은 작사가가 노랫말을 지었다. 실화인 셈이다. 실화는 언제나 감동을 더해준다. 영화든 소설이든. 무대를 중국으로 옮겨본다. ‘선월’(船月)이라는 소설이 있다. ‘배와 달’이라는 뜻이다. 중국의 여류작가 샤넨성(하련생)이 썼다. 김구가 중국에서 만난 처녀 뱃사공과의 러브스토리를 다룬 내용이다. 소설 속의 내용을 통해 사랑의 정도를 들여다본다.

저녁 무렵이 되자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운하 위에는 풍랑이 일기 시작했다. 아이빠오(주애보)가 노를 잡은 그녀의 방수포를 친 작은 배는 풍랑 속에서 흔들거렸다.
“갈 수 있겠소?”
김구가 선실의 바람을 막는 천막 휘장을 들치고는 나와서 물었다.
“괜찮아요. 삼탑만(三塔灣) 강변이 넓어서 바람도 세지요. 좀 더 저어 들어가면 풍랑은 그리 없어요”

아이빠오는 노를 잡은 손에 힘을 주고는 김구에게 휘장을 내리고 선실로 들어가서 앉아 있으라고 재촉했다. 김구의 머뭇거리는 눈에는 어쩔 수 없다는 심정과 불안함이 가득 배어 있었다. 한가닥 뜨거운 감동이 아이빠오의 마음속 저 바닥에서 끓어올랐다.(중략) 단오절날 김구가 아이빠오의 배에 오른 이후부터 그녀는 점점 눈빛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뭐 도울 일이 없을까.”
김구가 물었다. 그는 아직도 뱃전에 있었다.

“정말 괜찮아요. 빨리 안으로 들어가세요. 그러는 것이 배가 움직이지 않도록 도와주는 거예요.”
아이빠오가 이렇게 말하자 김구는 얌전하게 선실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빠오는 속으로 웃었다.
 
이 소설은 실화를 바탕으로 쓰여진 것이다. 작가는 ‘인생은 배와 같아 인연에 따라 달을 얻고…’라고 서문에 언급하면서 혁명가와 처녀 뱃사공의 사랑과 회환을 담담하게 그렸다고 말한다. 달이 강물에 비치면, 처녀 뱃사공은 나룻배에 달을 싣고 강을 건넜다. 이때 배와 달의 거리는 가까운 듯 보이지만, 김구와 아이빠오는 이별한 뒤에 영원히 만나지 못했다. 배는 처녀 뱃사공인 아이빠오를, 달은 아이빠오와 운명적인 ‘인연’을 맺어졌지만,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는 남자 김구를 나타낸다. 또한 아이빠오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만들어주고, 또 김구를 기다리며 만들어놓은 신발,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가 아이빠오에게 준 것, 나중에 반으로 갈라진 팔찌는 배와 달의 모양이었다.

이 소재들은 모두 슬픈 사랑과 이별, 유랑의 운명을 상징하고 있다. 전체적인 흐름은 김구가 주인공이 아니라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전개되면서 뱃사공인 아이빠오에 초점을 맞췄다. 이 소설에는 이들 외에도 중국인들, 그러니까 최고의 지식인 추푸청부터 군인, 아낙네, 벙어리,  철부지 아이들까지도 등장한다. 그러면서 이들이 얼마나 정의를 위해 목숨처럼 아꼈는지를 다룬다. 항일의식이 얼마나 강했는지, 김구 같은 한국 애국지사들을 얼마나 존경하고, 또 한국의 독립에 이름 없는 외국인이 얼마나 많이 희생되었는지, 일본의 야만적인 식민 행위가 얼마나 많은 사람의 뜨거운 피를 흘리게 했는지를 작가는 상세하게 표현한다.

샤녠성은 독립운동가 ‘선월’외에도 김구의 일대기를 그린 ‘호랑이 걸음으로 떠난 망명, 중국에서의 김구’ 그리고 윤봉길 의사의 일대기 ‘천국으로 돌아가다’를 써서 중국 문단에서 ‘한류삼부곡’(韓流三部曲)의 작가로 불린다.샤녠성의 큰 형부는 임시정부 시절 백범 김구의 경호원으로 활동했다. 그래서 1987년 한국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받았다. 샤녠성은 이 큰 형부로부터 맺어진 김구와의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김구의 아들 김신이 가흥을 방문했을 때 여러 차례 동행하며 안내를 했다.

김구의 가흥 피난을 도와준 추푸청은 일찍이 일본 유학 당시에 광복회와 중국동맹회 진보적인 지식인이자 교육자이자 항일운동사를 빛낸 인물이다. 이래저래 김구와 인연이 되는 사람들이다.여기에서 잠시 생각해보면, 실존인물인 아이빠오는 한국독립운동사의 어느 책이나 공식문건에도 언급되지 않는다. 임시정부 주석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5년 동안 함께 지냈음에도 말이다. 다만 ‘백범일지’에 잠깐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5년이나 가깝게 나를 광동인으로만 알고 섬겨왔고 나와는 부부 비슷한 관계도 부지중에 생겨서 실로 내게 대한 공로가 적지 아니한데 다시 만날 기약이 있을 줄 알고 노자 이외에 돈이라도 넉넉하게 못 준 것이 참으로 유감천만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아이빠오의 배에 오르게 됐을까. 우선 김구가 기흥으로 피신을 오게 된 과정부터 보자. 그러니까 1931년에 이봉창이 김구를 찾아왔다. 김구가 임시정부 재무부장이자 민단장을 겸임할 때였다. 이봉창은 김구에게 “제 나이가 31세입니다. 앞으로 31년을 더 산다고 해도 과거 반생에서 맞본 방랑생활에 비한다면 늙은 생활에 무슨 취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영원한 쾌락이라면 31년 동안 인생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얻기 위해 우리 독립사업에 헌신하고자 상하이에 왔습니다.”고 말했다.

감동한 김구는 여비와 폭탄 두 개를 주고 일본 천왕을 폭살하는 임무를 주었다. 이듬해 1월 8일 신문에 ‘이봉창이 일본 천왕을 저격하였으나 명중하지 못하였다’라는 제하의 기사가 보도되었다. 결국 죽이지는 못하고 붙잡히고 말았다.

그로부터 몇 달 뒤 윤봉길 의사가 김구를 찾아왔는데 동경 사건과 같은 계획이 있거든 자기를 써달라고 했다. 때마침 1932년 4월 29일 홍구공원에서 천장절(天長節, 일왕의 생일)을 맞아 축하식을 성대하게 거행된다는 것을 알고 임무를 주었다. 도시락에 폭탄을 넣어 던졌고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앞서 그와 마지막 헤어지면서 ‘훗날 지하에서 만나자’고 했다. 결국 이봉창은 교수형으로, 윤봉길은 총살형으로 각각 순국했다. 이 사건 이후 김구는 현상금 20만원에서 60만원으로 불어났다. 이 금액은 일반 노동자 월급이 30원 안팎이던 시기였으니 누구나 잡기만 하면 일확천금을 거머쥐는 것이었다. 현상금이 어마어마하게 붙었으니 정탐꾼이 늘 따라다녔다.
 

중국 장사 마원령 거리. 김구 선생이 거주했던 곳으로 임시정부 사적지로 지정된 곳이다.
중국 장사 마원령 거리. 김구 선생이 거주했던 곳으로 임시정부 사적지로 지정된 곳이다.

이때부터 김구는 피신생활을 시작했다. 이름을 장진구 또는 장진이라고 했으며 고향을 광동인으로 바꾸고 가흥으로 갔다. 하지만 김구가 가흥에 있을 때 신분 위장이 탄로나 중국 보안대 본부로 붙들려 갔었다. 그를 꺼내준 사람은 손문의 친구 저보성(상하이 법과대학 총장)의 아들 저봉장이었다. 저봉장은 김구를 안전하게 피신시키고 싶었다.
“당분간 철저히 중국인으로 위장하셔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제가 중국 여인을 소개할까 합니다. 마침 그녀는 한국 독립운동의 영도자를 흠모하고 있습니다.”

저봉장은 중학교 교사인 과부를 하나 소개하겠다고 제안했다. 교양과 외모가 함께 준수하니 김구와 잘 어울릴 여자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김구는 고생만 하다 죽은 부인 최준례를 떠올렸다. 김구는 청혼을 거절했다.
“그런 유식한 여자와 살게 되면 오히려 제 정체가 탄로 나기 싶습니다. 게다가 그녀는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잖습니까? 차라리 저를 중국인으로 아는 무식한 여자가 더 나을 것입니다.”
저봉장은 여인 뱃사공을 수소문했고 그 결과 아이빠오를 선택하여 김구와 부부처럼 지내도록 조치한 것이었다. 이때 김구는 57살이었고 아이빠오는 갓 20살을 넘긴 나이였다.

장년의 쫓기는 혁명가와 이방의 여자 뱃사공의 유사 부부 생활은 예상보다 길게 지속되었다. 그들은 사통팔달의 호수와 운하를 5년 동안이나 쏘다녀야 했다. 아오빠이는 5년 동안 임시정부를 움직였던 여성인 셈이었다. 다른 이가 보기에는 젊은 아내는 노를 젓고 능력 있어 보이는 장년의 남편은 수려한 산하의 풍경에 무심히 취해 있는 장면이랄 수도 있었다.

이따금씩 임정의 요인들이 김구를 찾아와 밀담을 나눴으나, 그들은 하나같이 중국옷을 입었고 중국말에 유창해서 아이빠오는 김구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끝내 알지 못했다. 그녀는 자기 배의 작은 선실에서 한 나라의 정부가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 리 없었다. 그녀는 현상금이 붙어 있는 아주 위험한 사나이에게 다정한 아내처럼 굴며 끝없이 넓은 남호와 끝 모르게 이어져 있는 운하들을 오르내리고 또 오르내렸다.
 

사진 Queen DB
1 김구 선생이 은거한 마곡사 백범당에는 김구 선생의 사진 등의 기록들이 백범당 앞에 펼쳐져 있다. 2 마곡사 뒤편에 김구 선생의 삭발터가 있는데, 이 주변을 백범명상길로 이름지어 고요한 명상길로 조성해 놓았다. 3 충남 공주 마곡사는 김구 선생이 명성왕후 시해에 분노하여 일본장교를 살해한 후 사형수로 복역 중 탈옥하여 마곡사에 은거하던 중 원종스님이란 법명으로 출가 수행한 곳으로 알려졌다. 김구 선생이 은거한 마곡사 백범당 전경. 사진 Queen DB

중일전쟁이 발발해 공습이 심해지자 김구는 임시정부를 살리기 위해 대륙으로 나서야 했다. 그렇게 사내와 여인은 영영 이별하고 말았다. 김구는 해방이 되면서 한국으로 왔고 1949년 6월26일 경교장에서 안두희 총탄에 맞아 사망했다. 올해 6월이 사망 70년이다.

‘선월’이 마지막 부분이다. 아이빠오는 김구와 헤어진 후 재회를 간절히 기다렸다. 그러던 중 김구가 피살됐다는 소식을 듣고 “아니야 믿을 수 없어”라고 외치고는 김구와 선상생활을 했던 바로 그 강물에 배를 띄웠다. 

헝가리 시인 페테피 산도르의 시가 생각난다. 
사랑이여 / 그대를 위해서라면 / 내 목숨 바치리 / 그러나 사랑이여 / 조국의 자유를 위해서라면 / 내 그대마저 바치리

글 김문 논설위원 l 사진 서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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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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