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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Queen 다시보기] 1990년 12월호 -감동스토리/앞 못 보는 아들을 대학원까지 보낸 장한 어머니 김이지씨의 수기
[옛날 Queen 다시보기] 1990년 12월호 -감동스토리/앞 못 보는 아들을 대학원까지 보낸 장한 어머니 김이지씨의 수기
  • 양우영 기자
  • 승인 2019.09.08 15: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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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2월호

"아들아, '여섯'손가락 깨물어 가장 아픈 손가락이었던 내 아들아!"

지난 10월29일, 서울 63빌딩에서 열린 제6회 전국장애자부모대회에서 시각 장애자 부분 장한 어머니상을 받은 김이지씨(50세). 8년 전 직업 군인이던 남편과 사별한 뒤 음식점 종업원으로 일하며 앞 못 보는 다섯째 아들 김영일씨를 대학원까지 보내는 등, 혼자서 여섯 남매를 모두 훌륭히 키워낸 어머니의 사랑, 눈물 그리고 행복.

1990년 12월호 -감동스토리/앞 못 보는 아들을 대학원까지 보낸 장한 어머니 김이지씨의 수기1
1990년 12월호 -감동스토리/앞 못 보는 아들을 대학원까지 보낸 장한 어머니 김이지씨의 수기1
1990년 12월호 -감동스토리/앞 못 보는 아들을 대학원까지 보낸 장한 어머니 김이지씨의 수기2
1990년 12월호 -감동스토리/앞 못 보는 아들을 대학원까지 보낸 장한 어머니 김이지씨의 수기2

 

지주의 딸로 태어나 고아가 되다

김이지···사람들은 내 이름이 참 예쁘고 세련됐다고 말합니다. 이름만 들으면 유치원에 다니는 아주 귀엽고 앙증맞은 여자애가 연상된다는 이도 있습니다. 또 어떤 이는 가수나 탤런트 혹은 영화 배우의 예명 같다고도 말합니다. 적어도 김이지란 여자가 식당 주방에서 민물 장어의 배를 가르고 있는 50때 초반의 허리 굵은 아줌마일 거라고 상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겁니다.

이름에서도 얼핏 느껴지듯이, 나는 상당히 유복한 집안의 외동딸로 태어났습니다. 고향은 전남 신안군 임자면 대기리. 그 지방에선 유지로 통하는 지주 집안이었지요. 열 살 나던 해까지는 정말 금이야 옥이야, 공주님처럼 자랐습니다.

그러나 1950년 6.25가 터지자, 그 두 달 뒤 우리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습니다. 부모님과 남자 형제들, 심지어는 가까운 친척들까지 우리가 부리던 소작인 · 모슴 · 하인들 손에 모조리 죽임을 당한 거지요. 아마 부모님이 그리 인덕인 있는 분들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그때 내 나이 열 살, 이제 겨우 국민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졸지에 천애 고아가 된 나는 먼 친척 집에서 국민학교만 간신히 마쳤습니다. 그나마 한 달에 스무 날 가량은 학교를 빼먹은 채로 말입니다.

애들 아빠(김기섭 · 8년 전 작고 · 당시 53세)를 만난 건 60년대 초반, 고향이 함북 성진인 그는 1.4후퇴 때 피난 내려온 실향민이었지요. 둘 다 외로운 처지였던 우리는 금방 맺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는 나보다 나이가 11살이 많았고, 직업 군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상처를 한, 이미 아이가 셋이나 딸린 가장이었습니다. 이런 애긴 사실 꺼내고 싶지 않지만, 맏딸이 37세인데 엄마 나이가 왜 50일까 의아해 하는 분들이 있을까 봐 밝히는 겁니다. 큰애들 셋도 이젠 다 자랐으니 그 애들도 엄마 마음을 이해하겠지요.

그러고 보면 그 모든게 내 타고난 운명인지도 모릅니다. 내 이름 '이지'를 한자로 쓰면 '二枝' 거든요. '두 나뭇가지'란 뜻이지요. 한 나무에 두 가지(枝)···. 그러나 거기에 어떤 의미를 두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어차피 뿌리는 같은 아이들이니까요. 바람 불면 똑같이 흔들릴 수밖에 없는, 그래요, 우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공동 운명체였습니다. 

얼마후 군복을 벗은 애들 아빠는 전남 무안에 내려와 농사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가난했지만 행복한 날들이었지요.(중략)

 

Queen DB

[Queen 사진_양우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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