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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스승들이 전하는 행복한 삶을 위한 메시지
영혼의 스승들이 전하는 행복한 삶을 위한 메시지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1.01.11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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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를 넘어 공생과 화합 강조해온 시간, 많은 이들이 배려하고 낮은 곳을 굽어보길 바란다”


불교계 원로인 송월주 큰스님은 평생 헌신적으로 사회통합에 앞장선 인물로 손꼽힌다. 과거 힘겨웠던 IMF 사태를 맞아 스님은 고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 실업극복국민운동본부를 조직, 실업자에 대한 자활방안을 찾으며 사회를 위한 공통 관심사에 종교의 차이는 무의미함을 몸소 증명했다. 세월이 흘러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라도 원리를 벗어나지 않는 종심(從心)을 훌쩍 넘어선 76세의 고령에도 스님의 행보는 그칠 줄 모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던 일도 정리하고 휴식을 택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스님은 실업극복국민운동본부에서 이름을 바꾼 함께하는재단 이사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국내를 넘어 가난과 기아에 허덕이는 빈곤국가의 사람들을 위해 지구촌공생회를 설립해 끊임없이 부처의 자비를 실천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스님의 심중은 희망과 안타까움이 혼재하는 듯했다. 나라가 경제위기라는 국난을 극복하고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것은 기쁜 일이지만, 한편으로 빈부 격차는 커지고 높아만 가는 자살률 등 사회 이면에서 일어나는 여러 문제들로 인해 민초들의 삶은 더욱 각박해져만 가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안타까운 사실은 역시 북한의 연평도 도발이다.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 한때 북한 동포들을 위해 인도적 차원의 지원에 나서기도 했던 스님이기에 일말의 배신감까지 느끼는 것이 솔직한 심정. 그럼에도 스님은 다시금 화합을 이야기하고 있다. 혼란스러운 세속의 중심에서 자리이타(自利利他ㆍ자신의 깨달음만이 아닌 타인의 구원과 깨달음을 위해 함께해야 한다는 대승불교의 교리)를 행하는 노스님의 표정에서 굳건한 결연함이 느껴졌다.

대승보살도의 실현, 새로운 길 제시하다
스님은 오래전 한국전쟁의 시련이 국토를 휩쓸고 지나간 1954년 지리산 화엄사에서 출가했다. 당시 우리나라 불교계는 그때까지 잔존해 있던 왜색 불교 청산과 수행 승단 복원이라는 명분하에 정화운동이 한창이었다. 전후 시절이라 불교계 또한 경제적인 어려움은 민초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내부적인 정화운동과 더불어 당시 승려에게 속세에 관여하지 않고 수행에 힘쓰는 일 외에 다른 역할은 기대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었다.
1956년 스님은 금오대선사를 계사로 해 정식 비구계를 받은 이후, 부처의 가르침을 깊이 공부하면서 점차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불제자로서 본분이 단지 자신의 수행만이 아닌 자미도 선도타(自未度 先度他ㆍ자신을 건지지 못하더라도 남을 먼저 건져야 한다는 대승불교의 교리)가 바탕이 된 대승보살도와 보현사상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후 스님은 나름의 대승보살도 사상을 정립하고 불교 개혁과 종단 질서 확립의 목표를 세웠다.
“당시 불교는 기존 대처승들이 주도했는데 이를 다시 본래의 독신 청정 비구승 중심으로 바로잡으면서 수행과 중생 구제를 병행해야 한다고 생각했지. 그 시절에는 승려가 자기 수행에만 치우쳐 있고 밖으로 나와 민초들의 삶의 질을 높여주는 역할을 못하고 있었거든.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경전의 본령인데 간과하고 살았던 거지. 그래서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선배 스님들을 도우며 대승불교 운동을 펼쳐나갔어.”
종단을 개혁하고 법도를 세우면서 스님은 조계종 총무원장에까지 추대됐다. 그러나 시련이 닥쳐왔다. 당시 신군부가 정권을 잡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광주시민들을 무참히 짓밟는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던 것. 당시 스님은 정권의 눈치를 보지 않고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큰 슬픔에 빠진 시민들을 위해 ‘광주시민돕기 대책본부’를 구성, 종교인의 사회 참여 방식의 새로운 길을 제시하며 자신의 신념을 실천했다. 이미 그 이전부터 정교분리 원칙을 천명하던 스님이었기에 탄압이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그 일을 계기로 스님은 사회 참여에 대해 더욱 확신을 가지는 전화위복의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신군부에 의해 총무원장 자리를 탈권당하고 미국으로 떠났다가 인도와 일본, 타이완을 비롯해 동남아 국가 등 8개국을 방문하게 됐어. 그런데 우리가 볼 때는 소승불교라고 생각했던 나라들도 복지사업을 비롯해 교육과 의료 탁아사업을 하고 있더라고. 우리 한국 불교가 안에만 치우쳐 있고 밖은 신경 안 썼다는 사실을 더욱 확신하게 됐지.”

범세계적인 자비의 실현
2010년 스님의 기억 속에 가장 의미 있었던 일은 지구촌공생회가 국제구호단체로서 캄보디아에 1천 개의 우물을 만들어 준공식을 가진 것이다. 지구촌공생회를 설립하고 활동에 나선 지 이제 7년째, 스님은 그간의 노력 끝에 맺은 결심이 내심 자랑스러운 듯 감격의 빛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나라가 과거 한국전쟁 당시 초토화된 상황에서 원조를 받던 나라였는데, 어렵사리 회생해서 다른 나라를 도울 수 있게 됐다는 것이 여간 감격스럽지 않았어. 도와주는 기쁨과 받아들이는 기쁨이 한데 얽혀 다 같이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거든. 그간 캄보디아를 비롯해 라오스, 몽골, 케냐 같은 나라 7곳에 지부를 개설하고 노력해 왔는데 제일 잘된 나라가 캄보디아였어.”
그러나 스님은 이내 “좌절감도 맛본 2010년이었다”며 북한의 연평도 도발을 언급했다. 북한의 기습 도발에 대처하지 못해 민간인들이 피해를 보게 된 것도 잘못이지만 더 큰 잘못은 국론 분열에 있다는 것. 스님은 안타까운 어조로 착잡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대응)공격만이 능사가 아니라 도발 자체가 일어나지 않도록 충분한 억지력을 갖춰야 하지 않나 생각해. (북한이) 공격해온 것도 문제지만 국론이 분열된 것이 더 문제야. 국민 화합이 중요해. 남북문제에 대한 해법이 다 다르니까 그것도 통합돼야 하고….”
2011년을 맞이하며 스님은 “그 무엇보다 자비와 사랑이 최고의 가치”라고 강조했다. 국가적인 어려움이 있고 개개인의 삶 역시 때때로 시련에 봉착하지만 자족과 나눔의 지혜를 발휘한다면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새해에는 기업인들도 투명한 절차를 밟아 경영하고, 국가적으로는 가난이 세습되지 않도록 일하고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평등하게 보장되는 사회가 되도록 노력해야지. 정치권과 시민운동가들이 앞장서야 해. 낙오된 사람들에 대한 배려도 필요하고. 사회 모두가 함께 책임지는 의식을 가졌으면 좋겠어.” 

 

“저는 낙관주의자예요. 모든 과정이 꼬이면 그것을 결론이 아닌 과정으로 보죠. 단 틀림없이 좋은 날이 올 것이라는 확신을 가집니다”


“누구나 그렇지만 연말연시가 되니까 그동안 하던 일들이 더욱 몰리는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에너지를 받아요. 어찌 보면 에너지는 생각에서도 오고 동기에서도 오거든요. ‘내 양식은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것이다’라는 예수님 말씀이 과연 그럴까 했는데 요즘 절실히 이해가 가요(웃음). 스스로 신나는 일을 하면 기운이 난다는 의미더군요. 사실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지치기보다는 오고 가는 길이 힘든 것이죠.”
각계에서 이어지는 강의 요청에 건강까지 지장을 줄 정도의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는 차동엽 신부지만 목소리는 보통 사람보다 한 톤이 더 높다. 그런 바쁜 와중에 집필 작업까지 부지런히 해 ‘무지개 원리’에 이어 새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는 것은 놀라울 따름이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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