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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작가 “좋은 글이란 무엇인가”
김훈 작가 “좋은 글이란 무엇인가”
  • 송혜란 기자
  • 승인 2019.12.30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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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작가 "좋은 글이란 무엇인가"

 

대표작 <칼의 노래>와 <남한산성>을 집필한 소설가 김훈. 그가 지난 9월 19일고려대학교에서 마련한 ‘작가를 만나다’ 행사에 초대되었다. 40년 만에 모교를 찾은 그는 감회가 꽤 새로운 듯했다. 주로 그의 글의 힘, 작품 철학, 주제의식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갔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열강하는 이 시대 미래인 후배들에게 그가 진실한 태도로 전한 조언들을 옮겨보았다.

앞서 쭉 보아온 김훈 작가는 항상 말을 글 쓰듯 한다. 구어체임에도 한마디 한마디에 모호한 표현이 거의 없을 정도다. 이번 강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이 탓인지 예전과 달리 목소리 톤이 한층 낮아졌지만 의사 전달만큼은 명확했다.

사실 김훈 작가는 고려대 영문과에 입학했으나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졸업을 하진 못했다. 당시 그가 대학에 입학할 때는 국민소득 130만 달러 시대였다. 아버지의 가난과 정치적 억압 때문에 고통스러웠던 대학 시절. 모처럼 모교에 들러 청춘이 그리울 법도 한데 그는 다시 젊어지고 싶은 생각은 없다고 단언했다.

“무질서와 혼란을 또 어떻게 극복하겠어요? 이제 와 어느 정도 정치적인 억압은 사라졌지만 빈곤 문제는 여전해요. 과거엔 모두가 힘들어 가난이 보편적 문제였다면, 이제는 구조적인 문제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를 해결하는 게 현재 우리가 당면한 과제라고 그는 덧붙였다.

글의 힘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김훈 작가는 기자 출신이다. 1973년부터 1989년 말까지 한국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했다. <시사저널> 편집국장을 거쳐 국민일보 출판국장, 한겨레신문 사회부 부국장급을 지냈다. 2004년부터 전업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그의 대표작으로는 <칼의 노래>가 있다. 전략 전문가이자 순결한 영웅이었던 이순신 장군의 삶을 통해 이 시대 본받아야할 리더십을 제시한 이 작품은 2001년 동인 문학상을 수상했다.

어디 그뿐인가. 한국일보에 매주 연재했던 <문학기행>은 해박한 문학적 지식과 유려한 문체로 빼어난 여행 산문집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전국의 산천을 자전거로 여행하며 쓴 에세이 <자전거여행>은 생태와 지리, 역사를 횡과 종으로 연결한 수작으로 인정받았다. 병자호란 당시 치욕스러운 역사를 담은 소설 <남한산성>은 영화로도 제작되어 관객들의 큰 사랑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이런 그의 글의 힘은 어디서 비롯되는지 궁금해 하는 이들이 많았다. 이에 대해 그는 절대 글로 수다를 떠는 법이 없다고 이야기했다.
“제 생애 속에서 확인할 수 없는 단어도 사용하지 않습니다.”

20년이 넘는 문학생활 동안 여러 수작을 남긴 김훈 작가. 그러나 그의 작품 어디에서도 사랑, 희망, 꿈, 미래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자기가 검증할 수 없는 단어를 버리면서 얻는 것, 그것이 그의 글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대신 그는 문장 하나하나를 쓸 때 조사 사용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한정된 단어 속에서도 그의 문장이 빛나는 것은 그만큼 언어 구조를 잘 활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에서 ‘꽃이’를 ‘꽃은’, ‘꽃도’라고 바꾸면 그 의미는 하늘과 땅 차이예요. ‘꽃은’ 주관적 정서가 ‘은’에 들어간 것이고, ‘꽃이 피었다’는 것은 객관적 묘사이니까요.”

'칼의 노래' '남한산성' 김훈 작가의 연필로 글쓰기
'칼의 노래' '남한산성' 김훈 작가의 연필로 글쓰기

 

끝까지 연필로 쓴다

자신만의 확고한 글의 철학을 지닌 김훈 작가. 특히 그는 디지털 시대에 여태껏 연필로 글을 쓰는 몇 안 되는 글쟁이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에세이 <연필로 쓰기>에서 그는 “연필은 나의 삽이다”라고 적은 바 있다. 지우개는 그의 망설임일 터.
“제 스타일을 고칠 생각이 없어요.”

이제는 말만 하면 화면에 텍스트가 쳐질 정도로 과학이 발전했는데도 그가 굳이 연필로 쓰기를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연필로 글을 쓰다 보면 ‘내 살아있는 육체가 글을 밀고 나가고 있구나’라는 확실한 삶의 근거를 느낄 수 있거든요. 글과 삶과 몸이 연필 안에 모여 하나의 실체를 이루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펜이 칼보다 강하다?

그렇다고 글이 그에게 아주 거창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 모 일간지에서 그는 “나는 문학이란 걸 하찮은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해 적지 않은 충격을 준 적이 있다. 더 나아가 그는 펜의 힘을 맹신하는 이들에게 거친 불만을 쏟아냈다. 흔히 펜을 쥔 사람들은 펜이 칼보다 강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펜 든 사람이 현실의 꼭대기에서 야단치고 호령하는 것도 모두가 묵인하는 세상이다.

그러나 이는 매우 큰 착각이라고 그는 일갈했다.
“글은 세상을 구성하는 범주 중 하나일 뿐이에요.”

이어 ‘책 속에 길이 있다’라는 말에 그는 “그저 글이 있다”라고 고쳐 답했다. 그가 글을 쓰는 이유도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좋은 글이란 무엇인가”라는 한 학생의 질문에 그는 주제의식과 문제의식을 언어로 표현하는 장인정신이 깃든 글이라는 진부한 말이 아닌, 당대의 사회 현상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회답했다. 이쯤 되니 그가 한국사의 대극변기를 다룬 역사 소설에 역사나 위인의 충성심, 애국심이 다 빠지고 오롯이 인간의 고독, 허망함, 야만성만 짙게 드러낸 까닭도 이해가 될 법도 했다.
 

인간을 단절시켜버린 언어

언어는 사람이 서로 소통하도록 만들어졌다. 그런데 어쩐지 요즘은 이 언어가 인간을 단절시켜버리는 것 같다며 그는 안타까워했다. 
“우리 시대에 가장 썩어빠진 것이 언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자기 의견을 사실처럼 말하고, 사실을 의견처럼 말해 말을 할수록 관계가 단절되고 있다는 뜻이다. 시국에 묘한 울림을 주는 통찰이다. 말을 할 때 그것이 사실인지, 근거가 있는지 아니면 개인의 욕망인지 구별하지 않고 마구 쏟아내는 터라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됐다는 게 그의 일침이다. 또한 그는 우리 시대 최고 권력은 여론조사 결과라고 꼬집기도 했다.

“의견을 사실처럼 말하는 이유는 그 인간의 생각이 당파성에 매몰돼 있기 때문이에요. 당파성에 매몰된 인간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당파성을 정의, 진리라고 말합니다.”
사실과 의견을 구별하지 못해 말하기가 어려운 시대가 돼 버렸다는 김훈 작가. 마지막으로 그는 후배들에게 한 가지 당부를 전했다.

“명문대 젊은이들은 이 사회 먹이 피라미드의 상층부로 진입한 것이고, 그것이 정당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공동체를 함께 고민해야 합니다. 사회문제를 들여다보는 안목, 즉 인문적 소양이 있어야 하지요. 뻔한 것에 의문을 품는 인문적 소양이 쌓이면 세상을 조금씩 변화시킬 수 있을 겁니다.”

한편 그는 현재 노동자의 안전문제를 걱정하는 시민단체의 공동대표로 활동 중이다. 그가 직접 앞장서서 단체를 이끌어 나가는 것은 아니고, 젊은 활동가들이 부탁하는 대로 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 젊은이들이 떠미는 대로 제가 밀릴 수 있게 기꺼이 몸을 내어주려고 합니다.”

[Queen 송혜란 기자] 사진 양우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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