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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정 앵커가 세상과 소통하는 법...라디오 PD에서 스타 MC로
김현정 앵커가 세상과 소통하는 법...라디오 PD에서 스타 MC로
  • 송혜란 기자
  • 승인 2020.01.22 1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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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만의 탑피플 ①]

 

10년 넘게 자신의 이름을 건 시사 뉴스쇼를 진행해온 김현정 CBS 앵커. PD 출신임에도 신뢰감을 주는 보이스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은 그녀는 음악 프로그램 PD에서 언론인으로 성장했다. ‘여자 손석희’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확고한 방송 철학을 지닌 그녀의 인터뷰는 우후죽순 늘어나는 유튜버들에게도 귀감이 될 이야기로 가득했다. PD이자 시사뉴스 앵커, 일하는 여성, 두 아이 엄마인 그녀가 세상과 소통하는 법.

김현정 앵커는 방송의 힘, 마이크의 위력을 잘 알고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 노력하는 언론인이다. 어느 진영논리에도 갇히지 않으려는 방송 철칙 때문에 공격도 많이 받지만 한 번도 자신의 신념을 어긴 적이 없다. 이로써 조금씩 나아지는 사회를 보는 게 방송인인 그녀가 느끼는 가장 큰 보람이다.

15년 전, PD 출신, 게다가 어린 여성 앵커임에도 굴하지 않고 당차게 시사 뉴스쇼를 진행했던 김 앵커. 그녀는 긍정적이고 진취적이며 대범한 부모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잘나가는 라디오 시사 뉴스 앵커로 만족할 법도 한데 최근 tvN 인터뷰 프로그램 MC까지 맡아 화제를 모은 그녀다.

방송하랴, 아이 보랴 하루가 쉴새없이 흘러감에도 마이크의 온에어 불빛이 켜지는 마력에서 도통 헤어 나오지 못한다는데…. 어느덧 그녀는 미국의 바바라 워터스 할머니처럼 나이 80이 넘어도 방송을 하는 여자 앵커를 꿈꾸고 있다.

 

이재만_ 김현정 앵커님은 2008년 PD 출신으로 처음 자신의 이름을 건 시사뉴스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를 진행하며 이목을 끌었습니다. 언제부터 PD를 꿈꿨나요?

김현정_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였어요. 어릴 적 라디오를 워낙 좋아해서 일찍이 라디오 피디가 되는 것을 목표로 잡았지요. 부모님이 작은 라디오를 하나 선물해줬는데요. 김희애, 채시라 등 저랑은 거리가 먼 당대 최고 톱스타가 DJ로 나오면 마치 친한 친구처럼 느껴지는 게 아주 매력적이었어요. 라디오 PD 중에서도 음악 프로그램 PD를 꿈꿨습니다.

이재만_ 처음부터 라디오 PD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건 아니지요?

김현정_
제가 대학 다닐 때 IMF가 터졌어요. 방송국에서 채용을 거의 안 했지요. 특히 라디오는 더 심했어요. 대학에서 불어불문학을 전공한 후 닥치는 대로 시험을 보다가 한국일보에 들어갔어요. 거기서 1년 있었는데, 라디오 PD를 포기 못 하겠더라고요. 이듬해 CBS 시험에 다시 응시해 합격했습니다. 곧 음악 프로그램을 맡을 기회도 왔고요. 음악 프로그램은 저녁 타임이었는데, 마침 낮 시사 프로그램 MC가 휴가를 가는 바람에 제게 임시 PD 제안이 들어왔어요.

‘네가 낮에 시간도 되고, 목소리도 시사 프로그램이랑 잘 어울리니 잠깐 해볼래?’ 그렇게 재미로 시작한 게 지금까지 왔지요. 2005년 제가 처음 맡았던 프로그램은 <이슈와 사람>으로, <김현정의 뉴스쇼>와 컨셉이 똑같았어요. 2008년 <김현정의 뉴스쇼>가 론칭하면서 아침 시간대로 옮기게 됐습
니다.

이재만_ 이후 15년 동안 한 번도 쉬지 않고 일한 건가요?
김현정_
제가 그 기간에 애를 두 명이나 낳았어요. 둘째를 낳고 1년 동안 육아휴직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2014년에는 완전히 번아웃이 됐었는데요. 잠시 시사뉴스 앵커 자리를 내려놓고 원래 제가 꿈꾸던 음악 프로그램으로 갔습니다. 너무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그런데 스튜디오로 날아온 애청자들의 편지 꾸러미가 제 마음을 움직였어요. 어느 여고의 반 학생들이 일일이 쓴 손편지였는데요. 알고 보니 그 반 담임 선생님이 <김현정의 뉴스쇼> 애청자인데, 선생님 추천으로 반 아이들이 모두 제 프로그램을 듣고 있었대요. 김현정 앵커가 그만둬서 너무 아쉽다고 쓴 편지였습니다. 또 어느 날은 콩나물이 한 박스 배달돼 왔어요. 한 애청자가 옆에 콩나물 공장에서 산 콩나물을 먹고 힘내라고 보냈답니다. 어떤 남성분은 아침 출근 때마다 <김현정의 뉴스쇼>를 들었는데 따지고 보니 와이프 목소리보다 더 많이 들은 게 제 목소리래요. 제가 방송을 그만둔 뒤 이불 쓰고 엉엉 울었다는데, 이게 뭐지 싶더군요. 마침 새로운 시사프로들이 만들어지고 회사에서 전략적으로 앵커들을 배치해야하는 개편의 시기가 오면서 저는 10개월 만에 다시 <김현정의 뉴스쇼>로 소환됐습니다.

이재만_ 라디오 앵커의 일과는 어떻게 돌아가나요?

김현정_
저는 매일 새벽 세시 반에 일어나요. 일단 일어나면 핸드폰부터 쭉 봐요. 밤사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살피는 거지요. 김현정이 잔다고 뉴스가 멈추지 않으니까요. 출근 준비하고, 회사에 도착하면 네시 반에서 다섯 시. 그때부터 밤사이 뉴스에 따라 아이템을 수정합니다. 오프닝 준비하고, 일곱 시 반부터 방송을 시작하고요. 아홉 시에 끝나면 유튜브로 <김현정의 뉴스쇼 별책부록- 댓꿀쇼>가 또 라이브로 나갑니다.

본방에서 소개할 시간이 없었던 댓글들을 유튜브에서 풀어보고 있어요. 이후 포털 사이트에 기사 송출한 뒤 다음 날 아이템 회의하고, 섭외, 원고 준비하고 나면 여섯 시 일곱 시에 퇴근해요. 집에 가서 아이들 숙제 봐 주고, TV 메인 뉴스를 다 모니터링 합니다. 다음날 원고 준비하고 자면 10시에서 11시 사이쯤 돼요.
 

 


이재만_ 하루가 쉴 새 없이 돌아가는군요. 지난 10년을 돌이켜 봤을 때 가장 기억에 남는 방송 에피소드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김현정_
정말 많아요. 이유는 다양하지요. 재밌어서, 감동적이어서, 충격적이어서요. 제가 가장 놀랐던 일은 용산참사사건이에요. 저희가 아침 생방송으로 최초 보도했는데요. 다들 아시다시피 대치가 한창일 때 건물에 불이 났어요. 근데 옥상에 철거민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이거 뭔가 느낌이 이상하다. 저기 불이 나는데, 안에 사람이 있어요’라고요. 상당히 다급한 목소리였는데요. 그 제보를 받고 현장에 있을 법한 다른 사람과 인터뷰를 했더니 벌써 세 명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생방송 중 속보로 방송 내용이 완전히 바뀔 때가 많아요.

이재만_ 제일 기억에 남는 인터뷰이는요?

김현정_
군에서 숨진 훈련병 아버지가 아직도 기억에 남네요. 당시 훈련병이 두통이 너무 심했는데 방치하다가 뇌수막염으로 숨졌어요. 훈련 다 끝나고 의무실에 가면 의사는 퇴근하고 의무병만 있는데, 약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부모님 얼굴도 못 본 채 사망한 겁니다. 항상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쉽게 연결할 수 있는 데가 시민단체나 교수들이에요. 그런데 그동안 왜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을까?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말할수 있는 사람, 가장 절절한 사람, 제일 가슴 깊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굴까? 고민 했습니다.

그리고 숨진 훈련병의 부모님을 섭외하기로 결정했어요. 처음 섭외 전화 걸었을 땐 쌍욕부터 날아왔지요. 그래도 언젠가 마음이 진정되면 세상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길거라며 기다렸습니다. 보름이 지나 드디어 마음을 여신 아버님이 방송에서 담담하게 그날 일들 이야기를 풀어갔어요. 저도 울고, 청취자들도 울고, 엔지니어, PD들 다 눈물바다였어요. 훈련병이 산소 호흡기를 끼고 있을 때 아버지가 도착해서 ‘00야’라고 부르니까 분명 의식이 없던 아들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는 겁니다. 그게 포털 사이트에 실리면서 꽤 반응이 컸어요. 바로 군 의료체계 전면 재검토 발표가 났습니다.

제가 시사 뉴스쇼를 하는 이유가 이거예요. 대단한 영예,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아니고, 너무 고된 일인데요. 마이크가 필요한 사람에게 마이크를 주고, 세상이 조금씩 변해가는 모습을 보는 것, 그게 제 보람이지요. 그 힘으로 오늘도 세 시 반에 또 일어납니다.

이재만_ 방송인으로서 위기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극복하셨는지요?

김현정_
<김현정의 뉴스쇼>의 최대 장점이 진영논리에 갇히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양쪽에서 다 욕을 먹어요. 이쪽 사람이 나오면 저쪽 편 논리로 질문을 하고, 저쪽 사람이 나오면 이쪽 논리로 질문을 하는 식인데 그렇게 해야만 더 진실한 답변을 얻어낼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러다보면 어쩔 수 없이 양쪽에서 모두 불편해하곤 하지요.

제가 제 인기만 생각하고 청취율을 높이려면 얼마든지 쉽게 방송할 수 있어요. 그러나 저희는 언론인으로서 감시 역할을 하며 어느 편에 서서도 안 되고 공정해야 합니다. 그 원칙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이재만_ 올해 교수들이 뽑은 사자성어가 공명지조(共命之鳥)입니다. ‘어느 한쪽이 없어지면 자기만 살 것 같이 생각하지만 그러다간 모두 죽고 만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요. 언론인으로서 크게 공감할 것 같은데, 어떤가요?

김현정_
예전에는 지독한 지역주의가 타파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지역뿐 아니라 남녀가 갈라지고, 노소가 갈라졌으며, 진보 보수로 또 갈라졌지요. 그럼에도 우리는 다 함께 살아야 합니다. 자기 귀를 막고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듣겠다는 태도로는 공생할 수 없어요.

언론의 역할은 이쪽 이야기, 저쪽 이야기 다 들려주고 어디서 합의점을 찾아야 할지 소통시켜주는 역할을 해야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지금의 방송은 심지어 유튜브까지 더해지면서 자기 진영을 향해서만 목소리를 내는 곳이 많습니다. 방송은 공공재입니다. 분열의 시대에 소통의 장을 만들어주는 역할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재만_ 라디오 앵커가 꼭 갖춰야 할 자질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혹 라디오 방송을 진행할 때 김현정 앵커만의 철칙이 있다면요?
김현정_
‘선입견에서 벗어나기’라고 말하고 싶어요. 저는 인터뷰어가 판소리의 고수라고 생각해요. 인터뷰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할 수 있도록 판을 벌여 주는 거예요. 그게 ‘얼쑤’만 하는 게 아니라, 기쁜 이야기에는 웃어주고, 슬픈 이야기에는 울어주며 흥을 돋우어야 합니다. 제 인터뷰이들이 자주 하는 말이 ‘김현정 씨한테만 왔다 가면 다 털린다’예요. 그러면서도 싫어하지 않는 이유가 자연스럽게 진심을 이끌어 주기 때문일 겁니다. 또 하나, 인터뷰어는 코가 가려운데 볼을 긁지 않아야 합니다.

자신과의 개인적인 인연, 앞으로 커리어 등을 다 생각하면 상대방이 난처할까 봐 코를 긁는 질문을 못 던져요. 많은 유명 질문자들이 범하는 실수이지요. 저는 그것으로부터도 자유롭습니다. 코가 간지러우면 코를 긁고, 볼이 간지러우면 볼을 긁고 있어요.
 

 


이재만_ 시사뉴스를 진행하며 두 아이의 엄마가 됐어요. 워킹맘으로서 힘든 점은 없나요?

김현정_
제 아이들이 지금 10살, 14살로, 한창 엄마의 손길이 필요할 나이예요. 우리 사회는 한 여성이 온전히 자기 일을 다 하기 위해서는 다른 한 여성이 온전히 희생해 줘야 하는 구조입니다. 저 역시 친정어머니가 많이 도와주고 계세요. 여전히 저도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데 지금 하는 방송, 아이 육아 두 가지만 취하고 있어요. 이도 저도 안 되느니 과감하게 버릴 건 버리고 취할 것만 취했습니다. 2006년에 첫째를 낳고 13년을 이렇게 버티고 있어요.

사실 앞으로는 이러한 구조를 바꾸고 싶어요. 10년 전에도 비슷한 뉴스를 다뤘는데, 지금도 그 이야기가 유효하다는 게 너무 답답해요. 그래도 제가 아이 학원 한 번 더 따라가는 것보다 제 일을 열심히 하며 자랑스러운 엄마가 되는 게 아이 교육에 더 좋지 않을까 위로하고 있습니다.

이재만_ 이 일을 10년 넘게 지속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라디오 앵커라는 직업에 어떠한 매력이 있나요?

김현정_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세상이 조금씩 변하는 것을 보는 보람이 있어요. 뉴스는 반응이 즉각적이지요. 또 마이크의 온에어 불빛이 주는 마력 같은 게 있습니다. 이런 비유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김연아 주변에는 코치도 있고 안무가도 있고 여러 조력자가 있지요. 그러나 경기장에 불이 들어오면 그때부터는 온전히 김연아의 무대가 됩니다. 그런 것처럼 라디오에도 밖에 PD, 엔지니어, 작가, 스텝이 있지만 마이크의 온에어 불이 들어오는 순간부터는 온전히 제 무대가 돼요. 거기서 마음껏 청취자들과 호흡하는 게 큰 매력입니다.

이재만_ 음악 PD에 대한 아쉬움은 없나요?

김현정_
음악 PD에 대한 미련이야 왜 없겠습니까. 음악은 제게 ‘행복’이니까요. 하지만 시사프로 진행 10년을 넘어서면서 이제 저에게는 제 개인적 ‘행복’을 넘어선 ‘소명감’이 생겼습니다. 제 목소리로 인해 세상이 바뀌는 걸 보는 보람도 크고요, 그래도 뉴스쇼 20년 주년 즈음엔 스페셜 음악디제이 한번 해봐도 되겠죠?(웃음)

이재만_ tvN에서 인터뷰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계세요. 김현정 앵커에게 이 방송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김현정_
데일리 시사 인터뷰를 10년 넘게 하다 보니 타이밍에 쫓겨서 가는 인터뷰가 아닌 좀 더 진득하고 깊이있게 인간을 들여다 볼수 있는 인터뷰에 욕심이 생기더군요. 마침 그때 tvN에서 연락이 왔어요. CBS 소속 직원이 tvN 방송 프로그램 진행을 맡는 것은 정말 이례적인 케이스입니다. 두 회사 모두 흔쾌히 동의하에 진행하게 됐어요.

지금껏 라디오만 진행해왔는데, 제가 TV로 진출한다고 하니 주변에서 말리는 사람도 있었어요. 지금도 라디오 앵커로 잘 나가는데 굳이 왜 TV에 도전하느냐고요. 오히려 제 커리어에 누가 될까 염려했지요. 그런데 안해보고 후회하나 해보고 후회하나 똑같잖아요. 바바라 워터스라고 미국의 유명 인터뷰어가 있어요. 그분이 지금 90살인데, 85살까지 방송을 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저는 이제 갓 마흔 두 살인걸요. 실패가 두려워서 안 하면 제가 아니지요. 그래서 이번 프로그램에 도전하게 됐고, 기회가 온다면 저는 또 도전할 겁니다. 방송하는 동안 정말 행복했거든요. 우리나라에는 바바라 워터스 할머니처럼 여성 진행자가 노인이 돼서까지 활동한 전례가 없어요. 이제는 제가 감히 그런 꿈을 꿔봅니다.

이재만_ 이런 가치관을 가지기까지 영향을 준 사람들이 있을까요?

김현정_
네, 부모님인데요. 저희 어머니, 아버지가 굉장히 긍정적이고 진취적이며 대범하세요. 이분들은 제가 ‘나 뭐하지?’라고 물으면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고 하세요. 네가 원하는 길을 두려워하지 말고 가라면서요. 제가 스물아홉에 <이슈와 사람>을 시작하면서 만난 사람은 대부분 중년 남성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남성도 아닌 여성, 나이가 많지도 않은 어린, 기자도 아닌 PD 였어요. 모든 것이 마이너인 제가 주눅 들지 않고 국회의원, 대통령 후보랑 이야기할 수 있었던 데는 자존감이 컸어요.

그래서 퀸 독자들에게도 이야기하고 싶어요. 어머니, 아버지가 계시다면 다른 것보다 자녀들에게 ‘넌 잘할 수 있어’, ‘실패를 두
려워하지 마’,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해’라는 용기를 불어 넣어달라고요.

이재만_ 요즘은 1인 유튜버들이 방송 기획부터 진행, 편집까지 PD 역할뿐 아니라 진행자 임무도 다 수행하고 있는데요. 이들이 훌륭한 방송인으로 성장하길 바라며 해주실 조언이 좀 있을까요?

김현정_
유튜브 방송이든 메이저 방송이든, 마이크가 작든 크든, 시청자가 한 명이든 수 백만명이든 누군가에게는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과연 내가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나?’, ‘내가 하는 말로 인해 누군가는 상처받지 않을까?’, ‘혹시 내가 거짓을 말하고 있지는 않나?’ 한 번이고 두 번이고 곱씹으며 신중하게 접근했으면 합니다. 쉬운 이야기 같지만 지키기가 만만치 않지요. 하지만 이것만 잘 지키며 방송을 한다면 여러분은 이미 좋은 방송인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잊지 마세요. 방송은 공공재란 사실을!

 


이재만 변호사는…
‘무죄 제조기’, ‘법정의 승부사’, ‘연예인의 수호천사’라는 별칭을 지닌 이재만 법무법인 청파 대표변호사. ‘진심은 길을 잃지 않는다’는 좌우명을 가진 그는 폭우 속에서 비에 젖지 않도록 돕는 우산 같은 사람이 되고자 법조인의 길을 선택했다. 그동안 삼성·동아·쌍용 등 대기업과 각종 연예인 민형사 사건 약 2000건을 승소로 이끌었다. 특히 주병진, 송일국, 주지훈, 김현중 등 스타 사건 변호사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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