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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준 전 美 하원의원이 한국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
김창준 전 美 하원의원이 한국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
  • 송혜란 기자
  • 승인 2020.02.17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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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만의 탑 피플 ②

 

한국인 사상 최초로 미국 국회에 진입하며 아메리칸 드림의 전설을 쓴 김창준 전 미연방하원의원. 한국전쟁, 4·19 혁명으로 불안한 청소년기를 보낸 그는 군 제대 후 바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영어도 서툴고 가난한 한국 유학생이 어떻게 미연방하원의원 3선으로 당당히 설 수 있었을까? 지금은 한국으로 돌아와 김창준정경아카데미를 설립, 원로로서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는 그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김창준 전 미 하원의원은 서던캘리포니아대학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했다. “제 적성에 딱 맞았지요.” 공학은 기준을 세우고 표준을 만드는 일이다. 좋은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한 그는 주경야독으로 석사학위까지 딴 뒤 미국 전역의 하수처리장을 설치하는 회사에 취직했다.

프로젝트 매니저로서 정부 관계자들을 자주 만났던 김 전 의원. 그는 도시개발 전문가로서 제이킴 엔지니어스라는 회사를 설립, 매출 1000만 달러 규모로 키워나가며 승승장구했다. 어느 정도 성공한 사업가의 대열에 들어서자 그의 가슴속에 오래된 욕망이 꿈틀거렸다. ‘언젠가는 도시 전체를 설계하는 일에 도전해보리라.’ 그렇게 다이아몬드바 시장을 시작으로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된 김 전 의원. 이후 그의 이름 앞에는 항상 ‘최초의’, ‘유일한’이란 수식어가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한미 양국 교류에 대한 그의 공도 상당하다. 공화당 하원의원으로 3선에 성공, 의정 생활에 집중하던 그는 현재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그간 쌓은 노하우를 김창준정경아카데미를 통해 전수하고 있다.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로서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국 사회, 미래를 살아갈 글로벌 세대에게 전한 그의 메시지를 일문일답으로 정리했다.
 

이재만_ 처음 미국 생활은 어땠나요? 공부도, 생활도 한국과는 완전히 달랐을 텐데요.
김창준_
당시 캘리포니아의 단칸방에 살면서 낮에는 채피대학(Chaffey College)에 다니고 밤에는 식당에서 밤늦도록 일하며 서툰 영어에, 모든 게 색다른 이역만리에서 고독과 향수병으로 견디기 어려웠어요. 한국에서 돈을 많이 가져갈 수도 없었기에 가난한 유학생활을 해야 했지요. 지금 기억으로는 거의 매일 저녁 조국에 두고 온 부모님과 친구들을 생각하며 미국행을 후회했습니다. 괜히 왔구나 하고요. 영어도 잘못 하는데 일자리 구하기가 어디 쉽나요. 나중에 서던캘리포니아대(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공과대학에 편입했는데, 다행히 온타리오 시에 더 데일리 리포트(The Daily Report)가 있었습니다. 로컬신문사인데요. 사장이 저를 불러 아침에는 학교에 갔다가 저녁에 일하라고 하더군요. 정말 행운이었지요. 그때 배달 책임자 일을 맡게 돼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고,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생겼습니다.

이재만_ 이미 한번 겪어본 사람으로서 현재 미국 유학을 계획하고 있는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을까요?
김창준_
글쎄요. 지금 세상은 그때와 많이 달라졌으니 제 경험이 적용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미국에 한인 타운이 잘 조성돼 있으니 컬처 쇼크부터 걱정할 필요가 없잖아요. 예전에는 인종차별도 심했는데, 요즘 백인사회에서는 한국인 사위를 아주 으뜸으로 쳐줍니다. 그래도 너무 이른 나이에 가는 것보다 최소한 대학 졸업 후 떠나는 게 좋지요. 어릴 때 가면 친구들이랑 어울리다가 자칫 잘못된 길로 빠질 수 있으니까요. 좀 더 성숙해서 온전히 한국 사람이 된 뒤에 가는 게 바람직합니다. 대학보다는 대학원에 들어가서 다시 공부하고 싶다면 미국을 강력히 추천합니다. 세계에서 제일 강한 나라다 보니 과학도 발전해 있어 살기 좋고, 배울 것이 참 많아요. 거기서 공부하고 돌아오면 한국 사회에도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예요. 미국 민주정치는 우리나라보다 더 빨리 시작됐는데요. 미국 역사에서 실패한 사례는 피하고, 잘한 것들은 가져와 접목할 필요가 있지요. 시간, 경제적으로 여유가 된다면 유학 가서 안목을 넓히고 오길 바랍니다. 한국을 벗어나 봐야 애국심도 생기더랍니다.

이재만_ ‘청년 김창준’은 어떻게 미국에서 기업인, 정치인으로까지 승승장구해갔을까요?
김창준_
저는 미국에서 고학부터 하며 무지 고생했어요. 청년기에는 에너지가 흘러넘쳐 금방 미국에 융합될 수 있었어요. 적응이 매우 빨랐지요. 대학 졸업 후 토목기사로 경험을 쌓은 뒤 서른아홉 살에 제이킴엔지니어링(Jay Kim Engineering)이란 설계회사를 세웠습니다. 조금씩 회사 규모가 커지자 저만의 경영전략을 짰어요. 첫째 미국에서 사업을 하는 동안 한국적인 사고방식을 버린다, 둘째 미국 사회의 관습과 불문율을 기억해야 한다, 셋째 어떤 경우라도 경영자와 사원의 한계를 지킨다, 넷째 사원 모두가 내 회사라는 자긍심을 갖도록 애를 쓴다. 그뒤 제 삶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회사가 눈부시게 성장하면서 사회활동도 많아졌는데, 아시아 기업인협회(Asian Business Association)의 첫 한국계 회장이 됐어요. 중소기업청(Small Business Administration)으로부터 자랑스러운 기업인 상 등을 수상하며 차츰 김창준이란 이름을 지역사회에 알렸습니다. 이를 발판 삼아 다이아몬드바 시의회의원과 시장을 거쳐 1992년에 미 역사상 최초의 한국계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됐어요. 연달아 3선에도 성공했습니다. 뭐든 시작이 중요한 법입니다. 처음 다이아몬드바 시장 선거에 나갈 때 과연 내가 백인들 사이에서 우승할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지만, 스스로 유불리를 따져 객관화시켜본 게 큰 도움이 됐습니다.

이재만_ 하원의원에 당선됐을 때 감회도 남다르셨을 것 같은데요.
김창준_
미 연방하원의원 선서식이 있던 날, 32년 전 미국 땅에 도착했을 때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습니다. ‘귀하는 미 합중국 헌법을 지지하고 국내외의 모든 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킬 것이며, 이를 위해 충성과 신념을 다할 것이며, 어떠한 정신적인 유보나 회피할 생각 없이 자유스럽게 이 의무를 맡으며, 지금부터 귀하가 시작하는 직무를 충실하게 집행할 것을 엄숙하게 맹세합니까?’라는 토마스 폴리 하원의장이 낭독하는 의회법상의 선서문에 따라 ‘네’ 하고 대답하는 것으로 미 연방의회하원의원으로서의 제 공식 일정이 첫발을 뗐습니다. 참으로 감명 깊은 순간이었지요. 눈물이 앞을 가리며 어릴 적 고생했던 일들이 마치 주마등처럼 흘러가더군요. 제103차 미 연방 의회가 개회된 1993년 1월 4일의 일이었습니다. 취임 선서가 끝난 후 공화당 원내대표의 권고로 103차 회기 개원 첫 발언도 하게 됐는데요. 취임 선서를 한 지 40분 만에 발언권을 얻어 단상 앞으로 나갔습니다. 개회식 첫날 초선의원이 제일 먼저 발언을 한다는 것은 유례없는 일이었어요. 결국 제가 새로운 기록을 세운 겁니다. 그 뒤 개회식에서 초선의원에게 발언권을 주는 것이하나의 관례가 됐습니다.

이재만_ 의정 생활 중에 있었던 한국과 관계된 일화라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김창준_
1997년 1월, 대만 에너지 회사인 타이파워가 방사성폐기물 20만 배럴을 북한에 보낸다고 발표해 세계를 경악시킨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 외교부, 국제원자력기구(IAEA)까지 나설 만큼 심각한 문제였고, 김영삼 전 대통령이 미국 의회 사무실로 직접 전화해 ‘도와 달라’고 요청했었지요. 이에 뉴트 깅리치 하원의장과 제가 대만을 직접 찾아가 설득하고 미국 의회에서 결의안을 통과시켜 그 계획이 무마됐어요. 김 전 대통령은 ‘연방의원 신분에 해가 되지 않겠느냐’며 걱정을 하기도 했는데요. 제가 모국을 도우려다 미국 국익을 해치는 것으로 충분히 오해를 살 법도 했지요. 그러나 저는 그 피해를 결국 한국에 주둔한 미국 군인들이 볼 것이라며 한국 입장이 아닌 미국 입장에서 설파하는 전략으로 미국 국회를 움직였습니다. 이를 ‘비밀로 해 달라’고 당부했고, 김 전 대통령은 그 약속을 서거할 때까지 지켰습니다.

 

 

이재만_ 오래 전 떠났던 한국은 현재 많이 변해 있는데요, 의원님께 한국은 어떤 의미인가요?
김창준_
제가 한국을 떠나기 전과 현재 한국은 거의 천지개벽 수준으로 달라졌지요. 화장실도 없고, 벌레가 득실거리는 야채를 먹어가며 회충으로 고생했던 지난날이 떠올라요. 총소리가 주는 공포에 떨며 도보로 서울에서 대전까지 피난을 다니고, 군대에서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혹독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싫다. 떠나야지. 지긋지긋한 가난과 부패의 땅을 떠나버릴 것이다.’ 다신 돌아오고 싶지 않다고 뒤도 보지 않고 떠났던 한국인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막상 등져보니 조국이 그렇게 그립더군요. 피는 정말 못 속이나 봐요. 외국 생활을 오래 하며 도리어 애국자가 되어 돌아왔어요. 아직 저는 미국 시민권자이지만 한국은 제게 뼛속 깊이 조국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이재만_ 한국 사회에 여전히 문제가 많지요. 의원님이 보시기에 현재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요?
김창준_
제가 보기엔 경제가 너무 어려운 것 같아요. 정치랑 연결된 문제지요. 정치가 경제를 살리는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데, 지나치게 간섭하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법인세도 미국은 혹여나 반 기업 인상을 줄까 봐 내리는 추세인데, 한국은 정반대잖아요. 민주정치가 뭔가요? 경제는 알아서 돌아가도록 내버려 둬야 해요. 좋은 자동차 몰고 다니고 싶은 사람들은 열심히 돈을 벌도록 독려해야 하는데, 오히려 자꾸 더 뺏어서 여기저기 나눠주면 안 되지요. 부자는 죄인이 아닙니다. 대기업 잘되라고 도와줘야 채용도 많이 해서 실업률을 낮추지요. 매일 서로 싸우기만 하는 양극단의 정치도 걱정입니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제도가 잘못된 것 같아요. 법무부 장관 한 명을 뽑는데 왜 국민 30만 명이 나와서 반대를 합니까? 장관을 대통령이 임명해서 그래요. 미국에서 장관을 뽑을 땐 대통령이 추천만 하고 임명은 국회에서 인사청문회를 걸친 뒤 투표로 결정합니다. 한국은 임명부터 하고 청문회를 하는 식이니 순서가 잘못됐어요. 장관을 국회에서 임명하면 국민은 시위할 필요 없이 투표만 잘하면 됩니다.

이재만_ 이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의 정치 시스템 중 우리 것으로 받아들여 발전시키면 좋은 제도가 있을까요?
김창준_
저는 부통령제라고 꼭 이야기하고 싶어요. 대통령 혼자서는 한 나라를 잘 이끌어가기 힘듭니다. 임기 내내 같이할 파트너가 필요한데, 국무총리로는 부족해요. 선거 때부터 세트로 출마해서 당선돼야 합니다. 그래야 부통령이 대통령에 대해 쓴소리도 할 수 있지요. 대통령에게 부통령은 동반자이기 때문에 아무리 자신을 비판해도 잘 되라고 도와줄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미국에 없는 비례대표제의 경우 폐지하는 게 좋지 않나 싶습니다. 국회에는 국민들이 뽑은 성스러운 의원들만 들어가야 합니다. 또한 낡은 정치를 혁신했으면 좋겠어요. 국회의원을 오래 한 사람은 이제 그만 자리를 내려오고, 젊은이들에게 기회를 줘야 합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그렇고, 핀란드에서는 30대 최연소 여성 총리가 탄생할 정도로 정계의 세대교체는 세계적인 트렌드입니다.

이재만_ 최근에는 한국으로 돌아와 후학 양성에 힘쓰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흔들어라, 나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트럼프 대통령에 대비하라> 등 책도 쓰셨는데요. 제자, 후배들에게 주로 어떤 점을 강조하고 계시는지요?
김창준_
앞서 한 이야기와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미국 제도는 한국과 어떻게 다르고, 세계정세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요즘 미국이 왜 이런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 세계 제1위 강대국인 미국과 잘 지내려면 어떻게 외교 정치를 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서요. 한국에는 반미 정서가 강하기 때문에 겉으로나마 미국에게 조금만 잘해줘도 곧잘 감격할 겁니다. 일본이 이런 외교정치를 참 잘해요. 앞으로 우리에게 어려움이 있을 때 누가 손을 잡아 줄까요? 미국밖에 없습니다. 미국과의 외교 정치를 잘해야 한다고 늘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재만_ 결코 혼자서는 이룩하기 힘든 일들을 여럿 해내셨어요. 큰일을 하려면 네트워크가 상당히 중요한데요. 제일 큰 도움을 줬던 사람은 누군가요?
김창준_
제가 늘 제일로 꼽는 이는 단연 제니퍼 안, 바로 아내입니다. 굉장히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성격의 아내는 제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마다 용기를 북돋아 주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예요. 항상 명랑하게 웃으면서 ‘뭘 그런 것 가지고 걱정하세요’라며 토닥이는 그녀 앞에 있다 보니 어려움 속에서 있을 때도 항상 긍정적으로 웃게 됩니다. 정치적으로 보면 뉴트 깅그리치 전 미연방하원의장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제가 공격을 받고 힘들 때 항상 곁에서 지켜준 분입니다. 그가 한 유명한 말이 있어요. ‘정치는 나를 반대하는 사람들로부터 마음을 얻으려 하기보다는 나를 따르는 지지자들을 더욱 견고히 단결시키고 한 명도 잃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는 대만이 핵폐기물을 북한에 팔아넘기려고 했을 때 이를 막느라 동분서주하던 저를 도와준 동지이기도 합니다. 또한 한국에서 김창준 아카데미를 처음 시작할 때 여러모로 도움을 준 지인인 지창배 청호컴넷 회장과 정몽진 KCC회장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 아카데미를 굳건하게 지켜주고 후원해주는 아카데미의 원우들에게 늘 감사드리는 마음입니다. 근래 저에게 항상 큰 힘과 용기를 주시는 새에덴교회 소강석 목사님을 만나게끔 도와주신 하나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이재만_ 마지막으로 향후 계획이 어떻게 되는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김창준_
김창준아카데미는 비영리 단체예요. 한국 정부에서 예산 지원 없이 오로지 제 돈으로 시작했다는 것에 자랑스러움이 큽니다. 반세기 가까이 미국에 살면서 사업을 일구고 미국의 중앙정치 무대를 경험한 제가 후배들에게 노하우를 전수하고자 만든 기구입니다. 사명감을 가지고 하고 있습니다. 올해로 벌써 6년째 됐는데요. 그동안 700명의 졸업생을 배출했습니다. 현재로선 지금처럼 김창준아카데미가 오랫동안 지속됐으면 하는 게 제 유일한 꿈입니다.
 


이재만 변호사는…
‘무죄 제조기’, ‘법정의 승부사’, ‘연예인의 수호천사’라는 별칭을 지닌 이재만 법무법인 청파 대표변호사. ‘진심은 길을 잃지 않는다’는 좌우명을 가진 그는 폭우 속에서 비에 젖지 않도록 돕는 우산 같은 사람이 되고자 법조인의 길을 선택했다. 그동안 삼성·동아·쌍용 등 대기업과 각종 연예인 민형사 사건 약2000건을 승소로 이끌었다. 특히 주병진, 송일국, 주지훈, 김현중 등 스타 사건 변호사로 유명하다.



[Queen 송혜란 기자] [사진 양우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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