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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 불임의 긴 고통 이혼으로 정리한 ‘현빈 엄마’ 박준금 “극중 엄마 역할로 대리만족… 이제는 여자로서 완벽한 사랑 꿈꾼다”
5년 전 불임의 긴 고통 이혼으로 정리한 ‘현빈 엄마’ 박준금 “극중 엄마 역할로 대리만족… 이제는 여자로서 완벽한 사랑 꿈꾼다”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1.02.14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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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나이 쉰, 누군가의 엄마로 살기보다는 온전히 내 이름으로 살아가는 것에 행복해지려고요”

드라마 종영 후에도 ‘시크릿 가든’이 받고 있는 사랑만큼이나 박준금 역시 인기몰이 중이다. 극중 김주원(현빈 분)의 재벌 엄마로 화려하고 도도하며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는 여인 문분홍 역을 맡아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게 캐릭터를 소화해낸 것. 자신의 아들이 가난한 스턴트우먼 길라임(하지원 분)과 사랑에 빠지자 둘을 떼어놓기 위해 온갖 독한 행동을 서슴지 않은 인물이다. 과장된 헤어스타일과 범상치 않은 말투, 고급스러운 패션으로 어딘가 모르게 코믹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표독스러운 표정과 독설은 상대를 단번에 얼어붙게 만든다. 강한 카리스마를 지녔지만 박준금이 연기한 문분홍은 미워할 수 없는, 심지어 사랑스러운 악역이다.
박준금은 처음 대본을 받는 순간부터 어느 정도 인기를 끌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 반응일 줄은 몰랐다고 했다. 문분홍이라는 캐릭터가 그이의 인생 2막을 열어줄 거라는 생각은 본인도 못했던 부분.
“핑크색을 가장 좋아하는데 배역 이름이 분홍이라기에 반가운 마음이었어요. 아무래도 분홍색이 제게 행운을 가져다준 것 같아요. 문분홍은 박준금이라는 배우를 다시 살게 해준 고마운 캐릭터예요. 이참에 이름을 ‘분홍’으로 개명할까 고민도 하고 있답니다(웃음).”
열두 번의 시험관 시술 후 끝내 불임, 그 굴레를 벗어던지다
젊은 시청자들에게는 ‘시크릿 가든’의 박준금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배우일 수도 있지만, 30대 이상의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얼굴일 듯싶다. 경희대 무용과 재학 중이던 그이는 1980년 ‘국풍 80’이라는 대학생 축제에 참가했다. 그곳에서 KBS의 한 PD에 눈에 띈 그이는 그로부터 2년 뒤 드라마 ‘순애’ 여주인공으로 발탁되며, 연기자의 길을 걷게 됐다. 당시 ‘순애’의 여주인공이었던 원미경이 개인적인 사정으로 16회 만에 하차하면서 대타를 찾았는데 그이가 주인공으로 낙점된 것이다.
“제가 연기를 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어요. 그때 PD님이 저를 수소문해서 집으로 전화해서는 무조건 방송국에 와달라고 하시더군요. 시험기간이라 못 간다고 이야기했는데도 계속 부탁하셔서 결국 방송국에 갔어요. 영문도 모르는 상태에서 카메라 테스트를 받았는데 바로 주인공을 맡으라고 하더라고요. 연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신출내기였지만 주인공이라는 말에 도전해보고 싶었어요.”
얼떨결에 시작한 드라마 촬영이었지만 ‘순애’는 높은 인기 속에 방송이 연장되는 성과까지 얻었다. “자고 일어나니 스타가 되어 있다”는 말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10여 년 동안 무명생활 한번 겪지 않고 승승장구를 이어갔다. 이후 ‘보통사람들’, ‘사모곡’, ‘즐거운 우리 집’, ‘토지’ 등 하는 작품마다 인기를 모으며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하지만 그이는 결혼과 동시에 돌연 활동을 중단했다.
“당시에는 10년 넘게 연기자 생활을 했으니 이제 좀 쉬어보자는 생각이었어요. 저의 또 다른 에너지를 결혼생활에 집중하고 싶었죠.”
연기할 때 가졌던 열정을 결혼생활에 온전히 쏟아부으며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중 그이에게 ‘불임’이라는 예상치 못한 시련이 찾아왔다. 온갖 검사 속에 자신과 남편에게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는데도 아기는 쉽게 생기지 않았다. 그러면서 평안했던 결혼생활도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이는 한 인터뷰에서 힘들었던 지난 시간에 대해 솔직한 심경을 털어놓았다.
“저는 정말로 평범한 결혼생활을 꿈꿨어요. 그런데 불임이라니,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죠. 당시에는 시험관 시술을 하면 무조건 아기가 생기는 줄 알았어요. 난자 채취를 하고 호르몬 주사를 맞으면서… 보통 일이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첫 시술에 실패하자 여러 가지 생각이 들더군요. 저 자신이 너무 미워 견딜 수가 없었어요. 다른 여자들은 다 하는 임신을 왜 나만 못하는지, 몸이라도 아프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나와 남편 모두 이렇게 멀쩡한데 왜 아이가 안 들어서는지 답답해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죠.”
첫 시험관 시술에 실패한 뒤 다시 병원에 누워 호르몬 주사를 맞으면서 그이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인생 전체가 실패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몸이 망가지는 줄 알면서도 시험관 시술을 시도한 후 기도하고 또 기도했지만 수정란이 자궁에 착상되지 않아 매번 유산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 열두 번의 시험관 시술을 거쳤지만 번번이 실패했고 그 과정에서 부부관계는 점점 힘에 부치기만 했다. 그리고 결국 남편과 헤어지게 되었다.
그로부터 5년여의 시간이 흐른 지금, 그이는 초연해진 모습이다. 이제야 온전히 자신의 삶을 살게 되었다고 말하며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머금었다.
“올해 쉰 살이 되었어요. 사실 저 정도의 나이가 되면 누군가의 엄마로 살잖아요. 그런데 저는 온전히 제 이름으로 살고 있죠. 한편으로는 행복한 마음이에요.”
브라운관으로 돌아와 누군가의 엄마로 열연한 그이는 모정 연기를 위해 여동생의 아이들을 자주 떠올리곤 했다. 그이는 한 인터뷰에서 “여동생 가족은 힘든 시간을 견딜 수 있게 해준 든든한 버팀목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여동생 가족이 없었으면 아마 그 힘든 시간을 이겨내지 못했을 거예요. 제가 시험관 시술을 받으러 산부인과를 가는 날이면 동생은 부탁하지 않아도 늘 병실 앞 의자에 앉아서 절 기다려줬죠. 이혼이라는 힘든 일을 겪는 동안에도 동생은 저에게 가장 큰 힘이 돼줬어요. 동생 가족을 위해서라도 앞으로 더 잘살아야겠다는 생각이에요.”
혼란, 고통, 서러움 지나고 보니 행복한 시간 누리게 되다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는 말이 있듯이 지난 시간은 그이에게 연단의 시간이었다. 상처투성이였지만 배우로 돌아왔을 때는 그런 상처의 경험 위에서 더욱 풍부한 감정으로 연기할 수 있었다.
“고통의 깊이도 알았고 인생의 허무함이라는 것도 알았어요. 제가 아기를 가지지 못함으로 인해서 처음으로 인생의 벽과도 마주쳐봤고요. 그렇다 보니 인생을 좀 더 진지한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어요. 보다 깊은 내면 연기를 할 수 있을 것도 같고요.”
그이의 표현을 빌리자면 데뷔 당시에는 남의 옷을 얻어 입고 시작한 대타였다. 그때만 해도 배우로서 사명감 같은 건 없었다. 그저 배우가 되어 화려한 삶을 누리기를 즐겨했을 뿐이다. 한참 인생의 굽이를 돌아 다시 연기활동을 시작한 지금, 그이는 이제야 자신의 옷을 입은 듯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지금의 이 관심이 너무나 행복하다며 “배우로서 인생 2막을 연 것 같다”고 고백했다.
“제 인생은 네 파트로 나눌 수 있어요. 파트 1은 얼떨떨하고 혼란스러움. 데뷔할 때는 행복했다기보다 인생이 바뀐다는 생각에 어색했거든요. 파트 2는 고통. 결혼과 불임 그리고 이혼할 때인데 인생에서 첫 좌절을 겪었던 시간이니만큼 고통스럽고 힘들었어요. 파트 3은 고통과 서러움. 오랜만에 연기자로 복귀했지만 주목받지 못해 자존심이 무척 상했거든요. 파트 4는 행복. 지금이 진정으로 행복한 때라고 생각해요. 남의 옷이 아닌 내 옷으로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인 것 같아요.”
그이는 드라마에서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화려한 패션감각을 선보이며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수억원에 달하는 옷과 보석을 두르고 촬영해 지금은 웬만한 금액대의 옷은 입어도 놀라지 않는다고. 본지 촬영에서도 “오늘 인터뷰를 위해 착용한 옷과 보석을 합치면 1천∼2천만원은 될 것”이라며 극중 미워할 수 없던 그 교만의 자태를 짓는다.
“제 롤 모델은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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