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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스님과 결혼, 남편의 죽음 그리고 고찰 주지로… 이매방 선생의 제자, 무용가 김묘선의 굴곡진 삶
일본인 스님과 결혼, 남편의 죽음 그리고 고찰 주지로… 이매방 선생의 제자, 무용가 김묘선의 굴곡진 삶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1.02.14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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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무를 추지 않았더라면 승려가 되지 않았을 것… 모든 것은 인연으로 시작됐다”


“단지 무용만 할 때 저는 거울을 참 많이 보는 사람이었어요. 웃을 때 한쪽 입꼬리가 너무 올라가서도 안 되고, 항상 미소를 연습해야 했거든요. 거울에는 수은이 있잖아요. 투명하지 않기 때문에 거울은 자기 자신만 보이는 거예요. 이기적이고 욕심만 부리는, 그 당시에는 그걸 몰랐어요. 매일 분장하니까, 분장사가 와서 매일 화장을 하니 잘 보일 리 없죠. 승려가 되고 나서는 거울을 많이 안 봐요. 대신 창문을 자주 보죠. 창문에는 수은이 없어서 사람들의 모습이 잘 보여요. 나 자신만을 바라보는 거울이 아닌, 타인과 세상을 바라볼 줄 아는 창문을 봐야 하죠.”
무용가이면서도 승려인 묘선(김묘선 씨의 법명) 스님은 승무를 추지 않았더라면 스님이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한국 승무와 살풀이춤의 전수교육조교(준문화재)이자 2009년 4월 일본 천년 사찰의 주지 스님이 된 그이는 그것을 선택이 아닌 운명이라고 했다. 제자의 주지 취임식에 참석한 스승 이매방 선생은 “나는 스님이 안 돼봤고 너는 진짜 스님이 됐으니 승무를 춰도 이전과는 다를 것”이라며 눈물을 흘렸다. 실제로 묘선 스님은 “승무를 출 때면 공양을 하는 느낌”이라고 했다. 그이가 무용가이면서 승려의 삶을 살게 된 데는 불교의 가르침 중 하나인 인연(因緣)이 큰 영향을 미쳤다.

이매방 선생에게 배운 그대로 춤추고 싶다
대구에서 2남 4녀의 맏이로 태어난 그이는 열 살이 되던 해 우연히 길거리에 붙은 한국고전무용발표회 포스터를 보고 공연장을 찾았다. 자신 또래의 아이들이 공연하는 모습을 보는데 심장이 두근거리면서 ‘나도 춤추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한국 고전무용에 매료되는 순간이었다.
춤을 배우고 싶어 수소문을 했지만 행정공무원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이사를 다니면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체계적으로 춤을 배우지 못했다. 그러던 중 우연한 계기로 종묘제례악 기능으로 제1호 중요무형문화재(인간문화재)가 된 김천흥 선생에게 한국 춤을 배우게 됐고, 김 선생의 소개로 1982년 이매방 선생의 제자가 됐다. 이 선생은 ‘한국 고전무용계의 살아 있는 전설’이자 ‘하늘이 내려준 춤꾼’으로 불린다. 그이는 이 선생의 집에 거의 살다시피 하며 춤을 배웠다. 
“선생님께 만나서 영광이라며 인사를 드렸더니 특유의 말투로 ‘얼어죽을 무슨 영광’이라며 걸쭉한 입담을 보여주셨죠. 선생님은 한이 많은 사람이었어요. 최고의 예술적 자질을 가졌음에도 오랜 기간 인정받지 못하셨거든요. 당시에는 ‘신무용’이 유행할 때였어요. 신무용은 한국 전통무용도 아니고 서양 무용도 아닌 정체성이 모호한 것이었죠. 외국에서 발레를 배운 사람들이 한국 무용을 가르치던 시대였으니까요.”
그이는 이 선생을 만나고 난 후부터 춤에 인생을 걸기로 마음먹었다. 이후 이 선생이 승무로 198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되자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했다. 이 선생은 가난하고 공부를 많이 하지 않은 제자들을 보며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보는 듯해 마음 아파했다. 그이는 존경하는 스승에게 조금이라도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한국 전통무용의 이론을 익히려 추계예대 국악과에 입학했어요. 졸업한 후에는 연세대 교육대학원에 진학했죠. 선생님은 제가 대학에 진학한 것을 무척 흡족해하셨어요. 제자들이 자신의 전철을 밟지 않고 높은 곳으로 오를 수 있도록 해주고 싶은 마음이셨죠.”
그이의 춤을 보자면 특유의 개성과 아름다움이 엿보인다. 강약을 절묘하게 주며 춤을 추는 모습은 한국 전통무용의 멋을 고스란히 느끼게 한다. 대개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어떤 이론이나 기술을 익힌 뒤 색을 덧입혀 자기화를 한다. 그러나 그이는 “이 선생이 아직 생존해 계신데 그럴 수 없다”며 이매방류에 변질되지 않는 춤을 춰야 한다는 다짐을 매일 한다.
“선생님 문하에 들어가서 5년 동안 정말 열심히 배워 한국전통무용 콩쿠르에서 금상을 탔어요. 그때서야 제게 발표회를 해도 된다고 허락하시더군요. 발표회를 몇 번 하고 난 뒤 제 이름을 건 무용단을 인천에 열었어요. 그런데 선생님께 더 배우다 보니 여전히 부족한 저 자신을 발견하게 됐고 학원 간판에서 제 이름을 내리고 싶더군요. 다행히 건물을 옮겨야 하는 상황이 생겨서 간판을 내렸어요.”
대학원을 마칠 무렵까지 그이의 이름은 ‘진선’이었다. 착하고 특색 없는 이름이라 성공하기 힘들다고 생각해 작명가를 찾아가 ‘새벽별’이란 뜻을 가진 묘선(昴先)이란 이름으로 바꿨다. 그리고 대학원을 마치자마자 미국으로 건너가 우봉 이매방 전통무용보급회 남가주지부를 차렸다. 세계에 한국 전통무용을 알리기를 원했던 그이의 첫걸음이었으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고 결국 실패했다. 그리고 후배들에게 맡겨놓았던 인천 무용단 활동에 전력하며 이매방 선생의 뒤를 이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열정이 너무 과했던 탓인지 생각만큼 운영은 쉽게 따라주지 않았다.

아들과 남편의 권유로 주지 스님에 도전하다
연거푸 시련을 겪으며 의기소침해 있던 그이에게 반가운 소식이 찾아들었다. 1995년 일본 시코쿠에 있는 코리아문화연구회에서 그이의 무용단을 초청한다는 것이었다. 시코쿠 도쿠시마에서 열린 환영식에서 그이는 이 모임의 스폰서라고 밝힌 강한 인상의 남자를 만났다. 빡빡 깎은 머리에 평상복을 입은 남자의 모습을 보고 언뜻 야쿠자 같다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행사가 끝난 뒤 무용단은 숙소인 대일사로 향했다. 대일사는 연간 찾아오는 순례객이 30∼50만 명에 이르는 큰 사찰로 그이가 행사장에서 만났던 강한 인상의 남자는 대일사의 주지, 바로 오구리 고에이 스님이었다. 평소 지역 문화활동에 많은 관심을 보여온 오구리 고에이 스님이 우연히 그이가 참여한 행사를 후원하게 된 것이다. 그이의 춤추는 모습을 본 후 연분을 느꼈던 스님은 그이를 1년 동안 매달 초대해 지역 일본인들에게 한국 전통무용을 가르치게 했다.
사실 그이는 일본의 스님은 결혼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에 스님이 자신에게 마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렇게 1년이란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서로에 대해 알아가던 중 스님은 그이에게 프러포즈를 했다. 당시 그이는 서른아홉, 스님의 나이는 쉰일곱이었다.
“‘당신의 춤을 나에게 맡겨라. 그대의 꿈처럼 한국 춤을 세계화하는 데는 오히려 일본이 나을 수도 있다. 장차 한국 정부가 당신을 모셔가게 할 정도로 당신의 춤을 지원하겠다’라며 프러포즈를 하더군요. 즉석에서 그렇게 하겠다고 했죠. 그런데 귀국한 다음날 갑자기 후회가 되는 거예요. 당시 인천지역 무용단 단장 제안도 있었고 어느 지방대학에 전임교수로 서류를 넣을 수 있는 기회도 생겼거든요. 그래서 내린 결론은 6개월 동안 이것저것 다 해보고 결혼하겠다는 것이었어요. 대답을 보내니 한달음에 통역하는 사람과 스님이 인천으로 오셨더라고요. 그러고는 ‘정년퇴직이 있는 교수 할래, 임기가 있는 무용단 단장 할래, 죽을 때까지 행복할 내 마누리 할래’라고 하더군요. 이 한마디에 압도당했죠(웃음).”
그이는 자신의 결혼생활을 두고 “왕비처럼 살았다”고 표현했다. 경제적으로도 한층 안정을 찾아갔고, 두 사람의 사랑의 산물인 아들도 태어났다. 그러나 행복은 10년여 만에 막을 내렸다. 2007년 4월 오구리 스님이 뇌경색으로 쓰러져 한 달간 투병하다 타계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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