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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Queen 다시보기] 1991년 2월호 -단독 밀착취재/영주귀국 후 국적 못 찾고 투병생활하는 일송 김동삼선생 유족
[옛날 Queen 다시보기] 1991년 2월호 -단독 밀착취재/영주귀국 후 국적 못 찾고 투병생활하는 일송 김동삼선생 유족
  • 양우영 기자
  • 승인 2020.05.09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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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2월호

"내나라 하늘 아래서 숨쉬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행복합니다"

지난 89년 10월 중국에서 영주귀국한 독립운동가 일송 김동삼선생의 고명딸 김영애씨(68) 가족이 1년이 넘도록 한국 국적을 얻지못하고 취업의 길도 막힌 채 궁핍한 생활을 계속하고 있어 주위사람들을 안타깝게 하고있다. 특히 김영애씨는 애타게 글던 고국에 돌아오자마자 췌장암 선고를 받고 투병생활을 하고 있는 중. '만주벌의 맹호'라 불리던 일송의 유족들이 보낸 지난 1년의 한국생활.

1991년 2월호 -단독 밀착취재/영주귀국 후 국적 못 찾고 투병생활하는 일송 김동삼선생 유족1
1991년 2월호 -단독 밀착취재/영주귀국 후 국적 못 찾고 투병생활하는 일송 김동삼선생 유족1
1991년 2월호 -단독 밀착취재/영주귀국 후 국적 못 찾고 투병생활하는 일송 김동삼선생 유족2
1991년 2월호 -단독 밀착취재/영주귀국 후 국적 못 찾고 투병생활하는 일송 김동삼선생 유족2

 

"어머니 병이 가장 큰 걱정입니다. 직장이야 살면서리 어찌 되겠지요 호적이 나오기만 하면 말입니다. 그동안 일자리를 구하려고 많이 돌아다녀 보기도 했지요. 하지만 아직 국적이 없는 외국인으로 돼 있기 때문에 아무데서 써주질 않아요···"

유운석(36)는 기자가 집을 찾은 그날도 국적취득문제를 알아보기 위해 보훈처에 들렀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영주귀국 후 1년 3개월. 이 기간동안 그의 가족들은 '무국적자'로 공중에 뜬 신세였다. 

유씨는 기자에게 '국적취득은 이루어질 것이며 주민등록증도 곧 나올 것이니 그 문제에 대해서는 일체 보도하지 말아달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는 사회주의 체제에서 평생 살아온 사람답게 대화 도중에 가끔씩 막연한 두려움을 내비치곤 했다. 자기 가족들의 보도가 나가게 되면 국적취득문제를 담당하는 법무부와 보훈처의 공무원들을 자극하게 돼 주민등록 발급이 최소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인듯했다. 그러한 두려움은 그의 때묻지 않은 '순박함'에서 비롯된 것으로 비쳐졌다. 

목동의 20평짜리 임대아파트에 유씨 가족은 보금자리를 틀었다. 독립유공자 가족을 위해 보훈처가 마련해준 것. 이 집에 일송 김동삼 선생의 외동딸 김영애(68)씨와 외손자인 유씨, 유씨의 아내 김홍씨(34), 그리고 두 자녀 등 5명이 함께 살고 있었다. 

"처음에는 바로 호적이 나올줄 믿었어요. 그래서 럭키개발에 입사하기로 결정을 해두었지요. 면접까지 모두 끝낸 상태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1년이 넘도록 이러고 있는 겁니다. 럭키개발은 마침 중국진출계획이 있는 회사라 잘 되었다 싶었는데···"

"90년 상반기에는 신문광고들을 유심히 살펴보았지요. 중국어강사를 모집하는 학원광고가 쏟아졌던 거에요. 직접 찾아가 보니 모두들 거부하더군요. 대만인은 써도 중국인은 안 쓴다는 곳도 있고, 주민등록증이 없으면 자기네들이 당한다고 고개를 젓곤합디다"

유씨는 여기저기 일자리를 알아보러 다니다가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고 한다. 날씨는 춥고 생활비에, 병든 어머니의 치료비를 걱정하며 낯선 서울거리를 해매면서 그는 순간순간 자신이 생계를 책임져야 할 가장임을 상기하곤 했다. 

일제 떨게 한 '만주벌의 맹호' 김동삼

일송 김동삼선생은 일제 강점 직후인 1911년 만주로 건너가 이동녕선생 등과 함께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근대적인 군대체제로 독립군을 편성, 항일 무력투쟁을 벌인 독립운동의 거목.

한국독립운동사에서 그의 활약상은 너무나 뚜렷하지만, 서거 반세기가 지나도록 일송의 공적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않은 실정이다. 

당시 많은 애국지사들이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벌렸으나, 일송 만은 시종 일본군이 우굴거리는 만주벌에서 끈질기게 무력투쟁을 벌였다.

김구, 김좌진, 이승만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들 가운데 일송이 어떤 인물이었는가를 증명하는 한가지 예.

1932년 당시 상해에서는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된 적이 있었다. 이는 국내는 물론 중국 본토, 러시아, 만주, 미주 등 국내외 각 독립운동단체 대표 1백4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6개월 간이나 계속된 독립운동사상 전무후무한 대규모의 회의. 이처럼 내노라 하는 거물들이 모인 자리에서 선거를 통해 의장에 선출된 사람이 바로 일송이었다. (부의장은 안창호선생)(중략)

 

Queen DB

[Queen 사진_양우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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