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술이란 궁극적으로 무엇일까? 미술이 주는 시각적인 효과도 좋지만, 사실 예술은 눈에 보이는 세계를 넘어 상상하게 하고 또 그 세계를 지향하도록 하는 동력이라고 백지숙 서울시립미술관장은 이야기했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다양해지는 사회. 미술관은 항상 그 선두에 서 있다.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마찬가지다. 창의성을 갖춘 아티스트의 경쟁력이 더 강화될 미래. 현대 미술관은 과연 어떤 역할을 자처해야 할까?
하나의 전시가 나오기까지 수많은 스토리가 있다. 큐레이터가 전시를 기획할 때부터 작가는 물론 목공, 철공, 운반, 운전 등 다양한 인력이 협업해야 한다. 서울시립미술관의 직렬만 24개에 이를 정도다. 매우 복잡한 과정이 정교하게 엮여 마지막으로 떨어지는 게 전시고, 그조차도 지킴이, 도슨트가 있어야 현존이 가능하다. 어찌 보면 전시는 오케스트레이션과 많이 닮았다는 백지숙 관장. 그중 백 관장은 오랫동안 큐레이터이자 평론가로서 활동해왔다.
직장을 다니더라도 계약직이었기에 안정성이 떨어져 무엇인가 계획을 세울 수 없었던 것은 당연지사다.
그럼에도 그녀가 이 일을 계속해 온 데는 그만한 매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새로운 변화를 추구, 확인할 때 가장 보람찼어요.”
예컨대 미술품을 걸기 위해 벽에 못을 못 박게 하는 소소한 규제와 한계를 바꿔나가는 것도 가시적인 성과였다고 그녀는 회상했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되었지만 말이다. 또한 긴 시간을 함께한 동료 큐레이터, 평론가들이 서로 성장하는 모습을 포착하는 공동체적 유대감도 그녀를 지금의 이 자리에 있게 해줬다. 커먼 그라운드를 기반으로 성장해온 그녀는 어느덧 문화예술계에서 베테랑으로 통한다. 그리고 현재, 서울시립미술관을 이끄는 관장으로 와 있다.
아트와 테크놀로지
올 초 서울시립미술관장이 된 그녀의 책임감은 사뭇 무겁다. 아직 1년도 채 되지 않았으나 그녀는 직원들끼리 태스크 포스를 꾸려 여러 가지 아젠다를 중심으로 문제를 해석, 연결, 솔루션을 찾는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 실제로 해결책이 적용 가능한지 따져보는 시간도 있었다. 제일 큰 축은 역시 ‘사람’이었다는 백지숙 관장. 미술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관객들, 작가들, 그들의 작품을 관객과 연결하는 매개자인 스텝들.
미술관은 이들이 연합하는 활동의 장이다. 다 같이 힘을 모아 3년 안에 서울시립미술관의 정체성을 다잡을 것이라고 그녀는 포부를 밝혔다.

서울시립미술관 본관인 서소문관은 한창 공사 중이다. 인터뷰와 촬영을 위해 찾은 남서울미술관을 비롯해 서울시립미술관은 북서울미술관,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SeMA창고, 백남준기념관, SeMA벙커 등 7개의 분관을 운영하고 있다. 이 공간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가 그녀에겐 크나큰 과제다.
특히 '거대 도시 서울을 네트워킹하는 현대 미술관의 역할은 무엇일까'라는 고민은 그녀가 향후 서울시립미술관을 어떻게 이끌어갈 것인지 큰 그림과 맥을 같이 한다. 아마도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은 예술의 멋이 그윽한 도시로 변모하지 않을까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에 앞서 서울에는 세 개의 새로운 서울시립미술관 분관이 더 문을 열 것으로 보인다. 서서울미술관과 평창동에 미술관의 자료나 연구기능을 갖춘 아카이브, 창동에는 사진미술관 오픈이 예정돼 있다.
“서울시립미술관이 서울 도시의 크기만큼이나 볼륨을 갖춘 미술관이 될 거예요. 지리적으로 떨어진 기능을 어떻게 특화할 것인가에 요즘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IT 기술이 안 들어갈 수 없겠지요. 과거 필름 카메라에서 디지털 카메라로 옮겨간 것처럼, 또 필름 영화에서 비디오, 인터넷으로 발전할 것처럼 아트도 테크놀로지와 결합될 겁니다. 미디어도 이 둘의 관계를 해석하는 하나의 틀이기도 하고요. 그 프로세스에서 현대미술이 진화해왔다는 것은 미술사를 통해서도 계속 드러나고 있습니다.”
다양한 사회, 다양한 표현
더욱이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 창의적인 인재가 각광받고 있다. 아티스트들의 경쟁력이 강화되고 있다는 뜻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더 다양해지는 사회. 그 흐름은 늘 미술관에서 제일 먼저 느낄 수 있었다. 다양한 작가들의 다양한 작품, 다양한 표현 방식이 눈에 띈다. 전시회장에서 선보일 수 있는 예술의 범주가 한층 넓어지고 있다는 것도 참 반가운 일이다.
올 한 해 현대미술과 씨름해온 백지숙 관장. 관장으로서 그녀의 고민은 많지만, 결은 하나다. 어떻게 미술로 파티를 열 것인가? 어떻게 사람들이 소통하게 할 것인가? 이야기하게 할 것인가? 현대미술만큼 어떤 형식을 가지고 계속 실험하고 도전, 변화해온 매체가 있을까 싶을 정도다. 관람객은 그림에 어떤 내용이 담겼느냐를 중심으로 볼뿐, 작가나 현대 미술 생태계에 있는 사람들은 그 내용을 어떤 형식으로 재해석해서 보여줄지를 치열하게 고뇌해왔다.
그 형식을 새롭게 하는 일 자체가 관객의 사물이나 사람을 파악하는 관점을 바꿔줄 수 있다고 백 관장은 확신했다.
“그런 점에서 현대미술이 다양해진 것은 너무나 당연해요. 그 당연함은 어디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변하는 속도와 유사합니다. 약간 빠르거나 앞선 정도일 뿐이에요.”
이제는 그 형식이 테크놀로지로 결합되어 표현될 가능성이 클 것이다. 거기서 미술관은 단순히 전시만 하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신진 큐레이터와 신진작가를 발굴, 지원하는 사업도 병행하고 있다고 그녀는 덧붙였다. 미술관이 작가의 작품을 소장하는 등 금전적으로 직접 지원해 미술 생태계를 선순환되도록 하는 게 현대 미술관의 역할 중 하나다.
창의력 못지않게 중요한 소통능력
예술을 향유하는 공간, 미술관. 미술관은 광장과 닮았다. 두 개의 서로 이질적인 공간이 시대에 따라 겹치기도 하고, 뒤집히기도 하며, 그 영역이 오버랩 되기도 한다. 혹은 완전히 단절될 수도 있다. 사회적인 담론과 미술의 관계가 어떻게 펼쳐지는지 계속 봐온 백 관장은 어쩌면 구리고 낡은 이야기라 할지라도 미술관은 앞으로도 가장 진보적인 담론을 제시하는 곳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미술관이 결코 현실과 동떨어진 무중력 상태에서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지난 벨기에 영사관이었던 남서울미술관에도 이미 왜 미술관이 중요한지 인공지능의 모습을 한 아나운서가 이야기하는 영상작품이 전시돼 있다. 미술관을 안내해주는 안내 로봇도 있다. 단지 에이아이와 비판적인 거리를 확보할 것인가, 산업적인 측면에서 말하는 에이아이, 노동과 관련된 인공지능의 새로운 롤에 대해서는 작가마다 해석을 달리할 수 있다.
이때 개인의 창의력만큼이나 협업능력이 요구되는 인공지능 시대에 어떻게 정확하고 심도 있는 이야기로 서로의 생각 차이를 좁힐 수 있을지는 작가들에게 예술적 감성 못지않게 중요한 이슈다. 특히 협업정신은 후배 큐레이터, 신진 작가에게 그녀가 늘 강조하는 점이기도 하다.
미술관을 제대로 즐기는 법
수많은 것들이 한 데 집합된 미술관이라는 공간은 어떻게든 방문하는 이들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그녀는 믿는다. 미술이 보이는 세계를 넘어 상상하게 하고, 그 세계를 지향하도록 하는 동력이 있기 때문이다.
“미술이야말로 우리가 가보지 않은 세계, 시간에 대해 예측, 끝까지 그 한계까지 밀어낼 수 있는 경험들을 제공하는 예술 장르인 셈이지요.”
이에 백 관장은 퀸 독자들에게 미술관을 제대로 즐기는 팁을 공개했다.
실제로 그녀가 잘 써먹는 기법이다. 바로 국내 미술관을 마치 외국인 관광객이 되어 들어가는 것.
“우리가 해외여행을 가면 새로운 경험을 할 것이라는 기대를 잔뜩 품고 미술관에 가지요. 그 미술관에서 만나는 작품들, 사람들, 공간적 체험들, 건물들이 평소 쓰지 않던 근육이나 세포를 자극하고 단련하는 계기가 돼요. 한국에 있는 미술관을 들어갈 때도 이러한 마인드 셋을 하면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일종의 ‘낯설게 보기’와 같다.
“그래서 더 집중할 수 있어요. 이국적인 풍경을 기억 속에 저장하겠다는 강력한 욕망을 갖게 되는 것처럼요.”
자녀의 미술관 문턱 낮추기
이를 자녀교육 측면에서도 활용해 볼 수 있다는 백 관장. 다만 이때는 무엇보다 양이 절대적으로 우선시 된다. 아이들과 무조건 자주 미술관에 들르라는 의미다.
“아이의 미술관 문턱을 조금 낮출 필요가 있어요.”
어릴 때 운동을 많이 하면 몸에 배는 바람에 커서 운동을 안 하면 견딜 수 없다. 미술관도 신체적인 체험이다. 어려서부터 아이가 미술관에 종종 가 예술을 쉽고 편하게 생각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녀는 재차 강조했다.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한 백지숙 관장이 미학, 미술 쪽으로 진로를 구체화한 것도 유년 시절 스스럼없이 예술을 접한 게 큰 바탕이 되었다.
“부모님이 매달 미술 잡지를 정독했었고, 미술학원 선생님이 옆집에 살아서 친하게 지냈거든요. 자연스럽게 미술관도 자주 보러 다니게 됐고요.”
서울 시내에 있는 미술관과 박물관만 170여 개에 이른다. 한 달에 한 번씩 아이들 손을 잡고 미술관에 들러보는 것은 어떨까.
“부모님부터 잠시 스마트 폰을 꺼둔 채 미술관으로 접속해보세요. 복잡한 도시 삶 속에서 벗어나 새로운 차원으로 이동할 수 있답니다.”
[Queen 송혜란 기자] 사진 양우영 기자 | 촬영 협조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 분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