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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의 결혼과 이혼 딸들과 함께하는 시인 김하리의 일상
두 번의 결혼과 이혼 딸들과 함께하는 시인 김하리의 일상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1.03.09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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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도 메말라 버린 인생의 슬픔
                                             삼키며 살아온 지난 세월…
                               그래도 인생은 경이로워”

이른 봄을 시샘하듯 찬바람이 불어오던 어느 아침, 긴 생머리에 트렌치코트를 입은 그이는 첫눈에 보아도 환한 얼굴이었다. 명랑한 웃음소리를 내며 인사하는 그이의 얼굴은 유달리 밝아 보였다. 하나 싱그러운 모습과는 달리 지난 삶이 쉽지 않았음을 전해 들었던 터라 약간은 어리둥절한 기분도 스쳤다. 카페에 자리를 잡고 나자 그제야 그이의 속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한 남자와 결혼 그리고 이혼, 배신
“예전에는 1년 가까이 불과 몇 시간도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길을 걸어가다가도 쓰러져 집에 못 갈 때도 있었고 집에서 잠들려고 누우면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라 잘 수가 없었죠. 불면증을 고치려고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쉽게 가시지 않더라고요.”
한 남자와 두 번의 결혼과 이혼, 34번의 이사 그리고 그의 배신. 그이의 지난 삶의 흔적이다. 시인이자 배우인 그이에게는 혹 새로운 작품의 스토리가 되었을 법한 사연이지만, 현실에서 아내이자 두 딸의 엄마로서는 가혹한 시간이었다.
그이를 학생 시절부터 8년간 따라다니며 좋아했던 전남편. 오랜 구애 끝에 시작한 결혼생활이지만 남들처럼 평범하지는 않았다. 학군단으로 대학을 졸업해 소위로 임관한 남편과 1978년부터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남편이 중동에 해외 근무자로 파견되는 바람에 오랜 기간 떨어져 살았다. 7년이라는 시간 동안 떨어져 있으면서 아이들이 아빠의 얼굴을 본 건 1년에 많아야 한 번 정도였다. 성장기를 거쳐 사춘기에 접어들 무렵 곁에 없었던 아빠는 두 딸에게 낯선 존재가 되었다.
“중동에서 돌아온 뒤에는 부동산 전세 차익으로 남편이 돈을 벌면서 전국을 돌아다니게 됐어요. 여기에서 한동안 살려나 싶으면 다른 곳으로 계속 옮겨다니는 삶이 반복됐죠. 그러다 보니 새로운 집에 들어가도 짐을 풀지 않게 됐어요. 피난민마냥 박스를 항상 쌓아놓고 살곤 했죠.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이유 중 하나도 그 때문인 것 같아요.”
하지만 무엇보다 그이가 참기 힘들었던 것은 술에 취하기만 하면 변하는 남편의 성격이었다. 평소에는 얌전하다가도 술만 먹고 오는 밤이면 딴사람으로 돌변하기 일쑤였다.
“조용한 새벽이면 온 아파트를 다 깨울 정도였어요. 아무리 말리려 하고 경비원이 와도 제어할 수 없을 정도였죠. 고장난 카세트테이프처럼 혼잣말을 하다가 날이 훤하게 새는 날이 다반사였어요.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신경이 곤두선 채 사는 날이 계속됐죠.”
사랑한다고 울며불며 따라다니던 때는 언제였는지.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나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남편이었지만 이해할 수도 참을 수도 없는 일들은 점차 늘어났다. 잠시 떨어져 살아보기도 했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혼을 결정하기까지 수많은 밤을 지새우며 제 마음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어요. 이혼하려고 하면 정말 맨땅에 헤딩하고 사막에 집 지을 정도의 각오가 없으면 안 되거든요. 당시만 해도 이혼녀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단단히 무장해야 하고 때로는 냉정하고 독해야 살 수 있었어요.”
결국 남편과 함께 살던 집을 나와 협의이혼에 다다른 그이. 이런 결정에 누구보다 찬성하며 반겼던 사람은 “이제 엄마의 인생을 살라”며 곁을 지켰던 중학생 딸들이었다. 이후 열 달간 남편은 세 모녀를 여러 번 찾아와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다. 미운 정 때문이었는지, 당시 재건축에 들어간 집을 나와 방 한 칸 얻을 돈조차 없었던 상황 탓이었는지, 혹은 아빠 없는 딸들의 앞날이 걱정됐기 때문인지 그이는 힘겹게 전남편과 두 번째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재결합 후 술을 마시는 횟수나 술주정은 줄어들었지만 예전보다 냉랭해진 분위기는 세 모녀에게 더 힘든 일로 다가왔다. 또한 지독할 만큼 아꼈던 남편의 돈 씀씀이는 이제 살림을 하기 버거울 정도에 치달았다. 그이가 셈을 못한다는 이유로 남편은 가계부뿐 아니라 장을 보는 것까지도 직접 챙겼다.
결국 다시 시작한 결혼생활은 길지도, 행복하지도 못했다. 그이가 외출한 사이 아빠에게 손찌검을 당한 둘째 딸을 본 순간 더 이상의 연민조차 남아 있지 않았던 것. 남편을 피해 아이들과 3개월간 자동차에서 생활하던 중 그이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이 명의의 집을 재건축하던 건설회사 사장이었다. 총 18가구 중에서 그이의 집에만 가압류가 걸려 있어 재건축 진행을 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법원에서 서류를 열람해보니 전남편이 제가 가출했다며 경찰서에 신고하고 법원에 가압류 신청을 했더라고요. 그것도 재결합한 지 한 달 만에요. 버젓이 같이 살고 있는 아내를 가출했다고 신고한 사실을 믿을 수 있겠어요? 재결합하고 싶다고 연락해온 것부터 남편이 아이를 때려 세 모녀가 집에 들어가지 못하게 한 것 모두가 계획적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온몸에 피가 다 빠져나가는 기분이었어요. 이 세상에 나만 홀로 남겨진 것 같았고, 시를 쓸 수조차 없었어요.”
그 와중에 그이 명의로 되어 있던 주택의 재건축 현장에서는 비리사건이 발생했다. 주민들에게 돌아갈 권리를 건축주가 횡포를 부려 이 일로 그이는 자신의 잇속을 챙기려던 건축주에게 소송을 재기했다. 한편 자신이 가출한 것으로 속여 법원에 주택 가압류를 신청한 남편에 대해서도 이혼소송을 신청했다. 그전까지 법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지만 주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싸웠다. 이 시간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어려웠고 고통 그 자체였다. 그렇게 1년 반 동안이나 끌었던 싸움의 결과는 두 소송 모두 그이가 승소했다.
“소송이 모두 끝나고 난 뒤 무언가 해냈다는 쾌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욕심내며 사는 것이 부질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후로는 그 누구도 무섭지 않다는 생각에서 완전히 탈피했다는 것만으로도 삶이 달라지게 됐죠.”

“잊으려 애쓰니 또 다른 내가 보이더라”
이혼과 재건축 문제로 소송을 준비하는 기간은 모든 면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마땅한 치유법도 없이 시간을 보내던 터에 딸들은 그이에게 다시 공부를 시작할 것을 권유했다.
“어느 날 큰딸이 제 손을 잡고 자신이 다니는 서울예전(현 서울예대)에 데려가더라고요. 나이도 소송도 자식도 모두 잊고 공부에 미쳐보라는 거였어요. 제가 이미 글을 쓰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있으니 그와 연관된 극작과에 들어가라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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