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7 08:20 (수)
 실시간뉴스
작가 박완서가 우리에게 남긴것&큰딸 호원숙 씨 독점 인터뷰 "우리 엄마 박완서를 말하다"
작가 박완서가 우리에게 남긴것&큰딸 호원숙 씨 독점 인터뷰 "우리 엄마 박완서를 말하다"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1.03.10 13:0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목에서 거목이 된 작가, 박완서

지난해 9월 담낭암 진단을 받고 수술 뒤 치료를 받아오던 박완서 작가는 이후 급격히 병세가 악화되면서 지난 1월 22일 세상을 떠났다. 1931년 개성 외곽인 개풍에서 태어난 작가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유별한 교육열로 서울로 이사해 숙명여고를 졸업했다. 1950년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했으나 그해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학교를 중퇴하고 말았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등 시대의 질곡과도 같은 풍파를 경험한 작가는 이러한 삶이 오롯이 작품 속에도 녹아들었다. 6·25전쟁 때 좌우의 이념 대립 속에 방황하던 끝에 의용군으로 나갔다가 부상을 입고 돌아온 오빠가 결국 세상을 떠나고 가족이 차례로 ‘빨갱이’로 몰리며 수난을 겪었던 지난 시대의 상처는 작가를 글을 쓰도록 만들었다. 불혹의 나이에 ‘나목’으로 등단한 작가는 스스로도
“6·25가 없었으면 어떻게 소설을 썼을까”라고 말할 정도로 ‘엄마의 말뚝’,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에 있었을까’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작품을 통해 전쟁으로 인해 파괴된 가정과 작가 개인의 혹독한 시련을 생생하리 만치 치밀한 문체로 그려냈다.
박완서 작가는 자신이 겪었던 고통을 산문을 통해 고백하며 독자들에게 진한 감동을 남기기도 했다. 1988년 병으로 남편을 잃은 후 그해 서울대 의대 레지던트 과정에 있던 막내 외아들을 교통사고로 연이어 떠나보냈던 작가. 무너지는 마음을 추스르기 힘들어했던 작가는 이해인 수녀와 나눈 대담을 묶은 산문집 ‘대화’를 통해 개인의 아픔과 다시 삶의 의욕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박완서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런 작가를 두고 ‘영원한 현역’이라고 부른다. 투병 생활 중에도 펜을 놓지 않았을뿐더러 세상을 떠나기 하루 전날까지 일기를 써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던 작가다. 2010년 8월에 출간한 마지막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에서 작가는 죽음을 예감한 듯 초연한 문체로 글을 적어 내려갔다. 
“씨를 품은 흙의 기척은 부드럽고 따숩다. 내 몸이 그 안으로 스밀 생각을 하면 죽음조차 무섭지 않아진다.”


------------------------------------------------------------------

큰딸 호원숙 씨가 말하는
                    “우리 엄마 박완서…”

 

박완서 작가가 떠나던 그날 네 명의 딸들은 “엄마”를 외치며 구슬피 울었다. 반듯한 가정을 이루고 자녀들까지 모두 두었지만 어머니의 부재를 채우기에는 그 순간만큼은 버거워 보이는 듯했다.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처럼 눈물은 닦아내어도 자꾸만 두 뺨을 타고 흘러내렸고,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은 좀처럼 잦아드려 하지 않았다.
그중 장녀인 호원숙 씨는 어머니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딸이다. 서울대 국어교육학과를 졸업한 후 종합교양지 ‘뿌리깊은나무’ 편집기자로 일하고 수필집을 한 권 낸 그이는 정식적으로 등단을 하지는 않았지만 50여 년을 글과 함께 살아왔다. 그런 딸이기에 어머니와는 나눌 이야깃거리도 추억도 더 많았다.  
호원숙 씨를 만나기 위해 기자는 몇 차례 전화통화를 시도했다. 그때마다 번번이 “어머니를 보낸 슬픔이 다 정리되지 않았다”며 인터뷰를 고사했다. 그러던 중 그이가 토평동 성당에서 어머니의 평안한 안식을 위해 49일 동안 매일 미사를 드리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됐다. 기약 없이, 그러나 꼭 만나고픈 마음으로 찾아간 그곳에서 그이를 만날 수 있었다.
기자를 본 그이는 처음 조금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첫마디가 “어떻게 알고 왔느냐”였다. 오랜 설득 끝에 “직접 만나 정식으로 인터뷰를 하는 건 Queen이 처음”이라며 그제야 어머니 박완서를 꼭 닮은 따뜻한 시선을 보내왔다.

“스스로 자유롭기를 바랐던 어머니는 자식들에게도
자유를 주셨어요”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원고청탁이 많이 들어와요. 2월 15일부터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어머니 도서전을 해요. 큰 문학 잡지사마다 특집기사를 기획하고 있고요. 딸로서 어머니의 작품에 책임감을 느끼고 제가 할 수 있는 부분에서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Queen 지면을 빌려 장례식에 와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어요. 큰 슬픔이었지만 많은 분들 덕분에 위로가 되었어요.
49일 동안 매일 미사를 드린다고 하던데, 다른 동생들도 함께하나요.
저는 매일 미사를 드리고, 둘째 동생도 거의 매일 드려요. 다른 동생들도 자신들이 다니는 성당을 찾아 미사를 드리고 있죠. 가톨릭 신자가 아닌 남편들까지 함께하고 있어요. 고맙죠. 
어머니 외에 가족 중 문인이 있나요.
아뇨, 어머니처럼 글을 쓰는 사람은 없어요. 저만 국어교육과를 나와 글과 관련된 일을 할 뿐이죠. 가끔 기사에 제 이야기가 나올 때
‘작가’라고 적혀 있는데 그건 너무 과대포장이에요. 저는 수필집 한 권을 냈고, 몇 권의 공저가 있을 뿐이에요. 또 어머니에 대한 연대기를 썼죠. 그야말로 글을 쓰는 일을 하고 있지만 아직 작가는 아니에요.  
생전 어머니가 큰딸에게 특별히 자주 했던 말이 있나요.
어머니는 말보다 삶을 통해 가르침을 보여주셨어요. ‘어머니가 저렇게 사는데 내가 이렇게 하면 안 되겠구나’라는 깨달음을 얻었죠. 어쩌다 한마디하실 때는 가슴을 후벼팔 정도로 크게 와닿았어요.
어머니 박완서는 어떤 분이었는지 궁금하네요.
여성스러운 분이었어요. 연두색처럼 연한 느낌이죠. 정신력이나 영혼은 무척 강하지만 내면은 부드럽고 매력적이었죠. 어머니는 우리에게 굉장한 자유를 주셨어요. 우리를 믿고 사랑해서 준 자유이기도 하지만, 당신도 자유로운 걸 너무 좋아하셨어요. 스스로 구속받는 걸 싫어했기 때문에 남도 구속하지 않는 거죠. 물론 제가 어머니 마음속에 들어가본 적은 없지만 누구의 편이 된 적도 없고, 거느리는 사람도 없었어요. 존경스럽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무섭기도 했죠. 상대방의 사회적 지위가 어떻든 예의바르면서도 당당했던 어머니의 모습…. 저희 자매는 모두 결혼도 연애로 했어요. 자식을 구속하기보다는 존중하되 그 결정에 대한 책임을 요구하셨던 것 같아요.
딸이기 전에 독자로서 어머니의 글을 읽었을 때 어떤 감동이 있었나요.
저 개인적으로는 어머니의 자전적인 소설을 볼 때마다 깊은 존경심을 느껴요. ‘나목’,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거기에 있었을까’, ‘엄마의 말뚝’과 같은 작품은 정말로 좋아하죠. 자전적인 소설은 너무도 쓰기 어려운 거예요. 진실을 쓴다는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