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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찬·김종인, 킹메이커 진검승부 시작하다
이해찬·김종인, 킹메이커 진검승부 시작하다
  • 오수연
  • 승인 2020.07.30 18: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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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찬-김종인, 킹메이커 진검승부 시작하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김종인 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 현대 정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두 사람이 다시 외나무 다리에서 만났다. 32년전 총선에서 처음 만나 혈투를 벌인 두 사람은 총선과 대선 등 주요한 승부처에서 피할 수 없는 대결을 벌인 사이다. 돌고 돌아 이제 두 사람은 차기 대선의 길목에서 당대 최고의 전략가로서 ‘킹 메이커’의 타이틀을 놓고 진검 승부를 펼치게 됐다.

글 오수연(자유기고가) | 사진 서울신문

파트1. 32년의 질긴 악연, 이해찬 vs 김종인


지난 6월 3일 오전, 국회 당대표 회의실. 취임 인사차 예방한 김종인 비대위원장이 한마디 던졌다. “4년 전엔 내가 이 자리에 앉
아 있었는데….” 20대 총선을 앞두고 당시 민주당 비대위 대표 시절을 언급한 것이다. 당시 김 위원장의 전격적인 공천 배제로 무소속 출마의 아픔을 겪었던 이 대표로선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과거일 것이다.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이뤄진 15분가량의 만남은 표면적으로 화기애애했지만 두 사람 심중에 흐르는 묘한 긴장감마저 감출 수는 없었다.

1988년 총선서 대결… 저격수 이해찬의 첫 승리

두 사람의 첫 만남은 198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3대 총선을 앞두고 3선을 노리던 김종인 민정당 의원은 서울 관악을 지역구에 출사표를 던졌다. 앞서 두 차례 전국구(비례대표)로 배지를 달았던 김종인 위원장으로선 첫 번째 지역구 출마였다.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 선생의 손자였던 김 위원장은 노태우 정부 취임 준비위원을 맡는 등 정권 실세 중 한 명으로 꼽히던 정치인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DJ)이 총재를 맡고 있던 평화민주당은 운동권 출신 이해찬을 김 위원장 저격수로 내보냈다. 이 대표는 민청학
련 사건 구속, 서울대복학생협의회장 등 민주화운동 경력을 앞세우며 김 위원장과의 차별화를 노렸다. 지금의 용어로 하면 금수저(김종인)와 흙수저(이해찬)의 싸움이라고 할수 있다.
당시 관악을 지역은 여당 집권 세력 거물과 36세 청년 정치인 간 맞대결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대부분 거물의 승리를 점쳤지만 이 대표는 5000여 표 차이로 누르고 국회에 입성했다.

 
파트2. 박근혜, 문재인의 삼고초려… 해결사 김종인
 

박근혜, 문재인의 삼고초려… 해결사 김종인

 

2012년 김 위원장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삼고초려로 새누리당(미래통합당 전신) 국민행복추진위원장으로 ‘컴백’해 선거 전면
에 나섰다. 이해찬 대표는 당시 민주통합당(더불어민주당 전신) 대표였지만 정면 승부는 미뤄졌다. 이해찬 대표가 ‘친노 패권주
의’ 비판에 휩싸이며 선거 직전에 2선으로 후퇴했기 때문이다.

4년 후 2016년 문재인 당시 민주당 대표에 의해 두 사람의 악연은 다시 이어졌다. 문재인 대표는 김 위원장을 전격적으로 비대위 대표로 영입하면서 공천 전권을 줬다. 김 위원장은 ‘패권주의’를 청산하겠다며 친노 좌장 이해찬 대표를 공천에서 배제했다. 당시 정치권에서는 “당선이 확실시됐던 이해찬의 컷오프를 두고 김종인의 사적 감정이 작용했다는 말이 파다했었다”라고 떠올렸다.

산전수전 다 겪은 이해찬 대표는 무소속으로 출마해 승리를 거머쥐며 저력을 과시하면서 당에 복귀했다. 반면 김 위원장은 ‘셀프 공천’ 파동 등을 거치면서 친노·친문 주류 세력들과 갈등을 빚다가 2017년 3월 민주당을 떠났다. 돌아온 이 대표는 2018년 당 대표로 선출됐다.

정치 인생이 다시 역전됐다. 이들의 리턴매치는 계속 이어졌다. 지난 4·15 총선에서 김 위원장은 미래통합당 총괄선대위원장으로서 복귀했고 이 대표는 민주당 사령탑으로 총선을 진두지휘했다.

 

여야 넘나드는 정치이력…신군부 정권서 활약

지난 6월 1일 취임한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은 1940년생으로 올해 80세의 나이다. 그의 이력은 참으로 화려하다.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한 뒤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 세력이 주도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국보위)에 참여하며 정치권에 본격 입문했다.

민주정의당 창당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981년부터 1988년까지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11대·12대 비례대표 의원을 지냈다. 1988년 13대 총선에선 서울 관악을에 출마했으나 이해찬 대표에서 패한 것이 유일한 낙선이다. 노태우 정부에서 보건사회부 장관,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냈다. 1992년 14대 총선에서 민주자유당 소속으로 다시 비례대표 의원이 됐다. 이후 보수·진보 진영을 넘나들며 2번의 비례대표를 보태 5선 의원이 된, 특이한 이력을 지닌 인물이다.

명문가 출신… 경제민주화 전문가

그는 명문가 출신이다.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 가인 김병로 선생이 그의 조부다. 그가 4살 때 아버지를 잃고 할아버지 손에서
컸다. 그가 대학교(한국외국어대 독어과)를 졸업하던 1963년부터 당시 야권 통합을 주도했던 조부의 비서 역할을 하며 정계에
입문했다. 그의 나이 23살 때였다. 20대 초반에 이미 큰 정치판을 직접 경험하면서 정치의 생리를 터득한 인물이다.

이듬해 조부가 별세한 뒤 독일 뮌스터 대학교로 유학을 떠나 1969년 경제학 석사, 1972년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사회 민
주주의 영향이 큰 독일에서 재정학(공공경제학)을 공부한 덕에 그의 정치적 자산이 된 ‘경제민주화’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는 평가다. 1987년 민주화로 탄생한 현행 헌법 개정 작업에 참여해 ‘경제민주화’ 정신을 헌법에 담았다.

명문가 출신의 아내… 맞선 두달만에 결혼

김 비대위원장의 아내는 김미경 이화여대 식품영양학과 명예교수다. 김 교수는 김 대표의 정치적 파트너에 가깝다. 기자들을 직접 만나거나 김 대표의 연설문을 써주고, 정무적 조언도 많이 하는 편이다. 정치에 대한 김 교수의 관심은 성장기에 자연스럽게 형성됐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김정호 전 한일은행장, 작은아버지는 8년 넘게 박정희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낸 김정렴이다.

정치에 대한 대화가 많은 집안 분위기 탓에 자연스레 정치적 감각을 키웠을 법하다. 김 비대위원장과는 중매로 만났다. ‘농담도 할 줄 모르고 다정한 말도 절대 할 줄 모르는’ 당시 35살의 노총각은 “대화가 통하는” 파트너를 찾아 수십 차례 선을 보다 김 교수를 만난 지 두 달 만에 결혼했다는 일화가 있다.
 

여의도 포레스트 검프 별명 얻어

김 비대위원장은 한국 정치사에서 그는 주요한 길목마다 역사의 현장에 있었고 중요 인물들과 인연을 맺었기 때문에 ‘여의도 포레스트 검프’라는 별명도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 두 사람 역시 직접 그의 자택에 찾아가 도움을 청했고 지난 총선 직전 미래통합당 황교안 대표가 삼고초려 끝에 그를 모셔올 정도였다.

정치적 오점도 있다. 1993년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에 연루돼 정치권을 떠나기도 했다. 하지만 시련도 잠깐 ‘경제민주화’ 전문가
라는 정치적 자산을 등에 업고 당을 옮겨 다니며 주가를 높였다.

좌클릭 선언… 기본소득 화두로 정치권 요동

지난 6월 1일 제1야당의 비대위원장으로서 취임하자마자 그는 정치판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보수의 깃발을 내리고 ‘좌클릭 정
치’를 선언한 것이다. 진보 진영의 전유물로 여겼던 ‘기본소득’ 이란 화두를 던지면서 단번에 이슈를 선점했다.

박원순 서울시장과 이재명 경기지사가 논쟁에 가세했고 차기 1순위 대선주자로 꼽히는 이낙연 의원까지 뛰어들었다. 이른바 김종인 발(發) 나비효과다. 지난 2012년 대선 당시 ‘경제민주화’ 화두로 정치권의 대격변을 이끈 김종인 위원장의 저력이 유감없이 드러난 대목이다.

과거 ‘김종인 정치’는 좌고우면하지 않고 직진을 하는 특징이 있다. 여야 주요 정당의 극심한 내부 반발도 손쉽게 돌파한다. ‘여의도 차르’라는 별명도 이렇게 얻었다.

하지만 현실의 정치는 녹록치 않다. 그는 통합당 창업주가 아니라 일시적으로 고용된 구원투수에 불과하다. 당의 실질적 대주
주는 존재하지도 않아 지원도 기대하기 어렵다. 과거의 명성만으로 미래의 성공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다.

빈약한 지원군… 당내 반발 등 장애물 많아

우선 손발이 되어줄 지원군이 빈약하다. 이는 지난 총선에서 공천작업에 직접 참여하지 못한 구조적 한계 때문이다. 통합당 내
부의 반대 목소리도 높다. 이른바 ‘자강파’로 불리는 중진그룹은 보수 깃발을 내린 김 비대위원장에 대한 의구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부산 출신의 3선 중진인 장제원 의원이나 원희룡 제주지사 등은 연일 융단폭격을 쏟아내고 있다. 김종인 체제를 그나마 지원하는 것은 정치적 비중이 떨어지는 수도권 중심의 초재선 개혁 그룹이다.

차기 대선에서 매력적인 야권의 대선주자는 아직 드러나지 않고 있다. 황교안 전 대표나 오세운 전 의원을 비롯해 홍준표·유승
민·안철수·원희룡 등 여론조사에서 거론되는 인물들 가운데 정치적 한계가 보인다. 일부 인사는 차기 지지율이 너무 미약해
정치적 미래를 낙관하기 어렵다. 그가 “경제를 잘 아는 70년대생” 등 이른바 ‘40대 기수론’을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김종
인의 성공신화를 지켜본 여야 모두 그의 향후 행보를 숨죽이며 지켜보는 이유다.
 

파트3. 운동권 대부 이해찬… 민청학련 사건 1년 옥고

 

운동권 대부 이해찬… 민청학련 사건 1년 옥고
운동권 대부 이해찬… 민청학련 사건 1년 옥고



1952년 생인 이해찬 대표는 올해 68살이다. 고향은 충남 청양군으로 1965년에 청양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상경, 덕수중
학교와 용산고를 졸업했다. 서울대 섬유공학과에 진학했다가 적성에 맞지 않아 자퇴하고 1972년 다시 서울대 사회학과에 입학했다. 박정희 유신체제에 맞서 운동권 학생이 됐고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1년을 감옥 생활도 했다.

독서 모임에서 만난 사회학과 출신의 아내 취업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무역업무와 번역 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다가 사회학과 학술모임에서 만나 사귀어 오던 아내 김정옥 여사와 1978년 결혼을 했다. 김 여사는 이 대표 보다 한살 연하로 이화여대 사회학과 출신이다. 이후 이 대표는 80년대 학생 운동권의 거점이 된 광장 서적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는 70년대 민청학련 사태 때부터 30대 중반까지 학생 민주화운동의 최전선 지도자로 활약한 민주화 운동 출신의 정치인이다. 30대 후반에 당시 야권의 최고 실세였던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여의도 정치권에 발을 디뎠다. 이후 7선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3번의 정책위의장을 거쳤다. 1998년 2월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시절 교육부 장관(당시 47세)을 지냈고 노무현 정부 시절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그는 7선의 국회의원 중 5선(13~17대)을 관악을에서 당선됐고 2012년 19대 총선에서 신설된 세종시에서 내리 2선을 했다. 세종시는 자신의 고향인 충남 청양군과 인접한 지역이기도 하다.

세 명의 대통령 배출… 자타 공인 선거 전략가

이해찬 대표는 자타가 공인하는 진보진영의 대표적인 선거 전략가다. 1995년 6·27 지방선거 때 조순 서울시장 후보 캠프에서 선거 전략을 담당하면서 승리로 이끌어 처음으로 선거 기획 능력을 인정받았다. 이후 자신이 선거 전략에 관여하면서 대통령 세 명을 배출하여 ‘킹 메이커’라는 별명도 얻었다.

2002년 16대 대선 때는 노무현 캠프에 참여하여 노무현 정부 탄생에 일조하였고 국무총리 시절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자발적인 역할 분담으로 행정부 2인자의 권력을 행사했다. 역대 국무총리 중 김종필(JP)고 더불어 실세 총리의 대명사라 통했다.
 

슈퍼 여당 산파역… 20년 집권 시나리오 가동

이런 그가 8월 전당대회를 앞두고 그는 요즘 자신의 정치 경험을 총망라한 이른바 ‘이해찬 회고록’을 준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30년 넘는 정치 인생을 정리하는 것으로 진보 진영의 역사를 정리하는 작업이 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여권 내에서 압도적인 그의 위상에 비쳐 당 대표 이후 ‘킹메이커’ 역할에 나설 것이란 분석이 설득력이 있다.

2년 전 8·25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가 된 이후 그는 지난 총선에서 진보진영 사상 초유의 177석의 슈퍼 정당을 만든 일등공신이
다. 그를 통하지 않고는 여권에서 차기 대선주자가 된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들 정도다.

이 대표는 7선 국회의원으로 국무총리와 3번의 정책위의장을 경험한 정치 베테랑이다. 자신의 세력 기반을 활용해 차기 대선 구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당정청을 두루 거치며 두터운 인맥을 보유했을 뿐 아니라, 현재 당 대표로서 친노·친
문·비문을 아우르는 폭넓은 지지 기반을 갖고 있다.

문 대통령을 정계로 이끌며 ‘킹메이커’로 등극한 이 대표의 경험이 있다. 2011년 문 대통령을 포함한 친노 세력과 함께 ‘혁신과 통합’ 그룹을 구성, 당시 당권을 쥐고 있던 손학규 의원을 제치고 문의원을 2012년 민주당 대선 후보로 만들었다.

지난 4·15총선에서 민주당을 이끌며 177석을 안겨준 이해찬 대표의 임기는 오는 8월까지다. 건강이상설 등이 불거지며 미리 물
러나는 게 아니냐는 예상이 있었으나 일축했다. 불출마한 탓에 원외로 물러나지만 당대표로서 메시지를 내며 당을 이끈다. 이
대표를 중심으로 한 당권파의 위세도 여전히 기세등등하다.

이 대표의 남은 과제는 2년가량 남은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는 밑그림을 미리 그려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총선에서의 대승리로 재집권의 기반을 쌓은 만큼 안정적으로 당이 운영될 수 있도록 다음 지도부 구성을 위한 전당대회 개최를 측근에 주문하고 있다.

그동안 공공연하게 민주당의 20년 집권론을 설파하며 ‘마지막 소임’임을 강조해온 만큼 다음 대선까지는 영향력을 발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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