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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와 헌신의 마음으로 걸어온 길 국민권익위원장 김영란ㆍ강지원 부부, 가치 있는 삶을 말하다
봉사와 헌신의 마음으로 걸어온 길 국민권익위원장 김영란ㆍ강지원 부부, 가치 있는 삶을 말하다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1.04.13 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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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8월 무거운 법복을 벗고 자연인으로 돌아간 김영란 전 대법관이 얼마 전 국민권익위원장 자리를 수락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퇴임 당시 본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자유를 얻었다”며 함박웃음을 짓던 그이가 다시 공직의 길로 들어선 까닭이 궁금했다. 책읽기를 즐겨하며 일생에서 처음으로 아무런 고민 없이 하루를 여유롭게 보내는 즐거움에 빠져 있던 그이. 아직 그 즐거움을 원 없이 누리기에는 충분치 못했을 기간이었다. 국민권익위원장 취임 후 다시 바빠진 그이와 그런 아내를 응원하는 강지원 변호사를 만나 ‘다시 자유를 잃어버린’ 소감(?)을 듣기 위해 연락을 취했다. 봉사와 헌신을 강조해온 부부이니만큼 나름의 이유도 있을 듯했다.
하지만 조심스레 인터뷰를 수락한 부부에게 안타까운 일이 생겨버렸다. 김 위원장의 부친 김응수 옹이 지난 3월 4일 병원에서 투병 중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인터뷰가 있기 전 갑작스러운 비보는 충분히 당혹스러웠다. 공교롭게도 당시는 김 위원장이 한국의 반부패 정책 홍보 및 국제 공조방안 모색을 위해 미국을 방문 중인 상황이었다. 본인의 부재 시 부친이 세상을 떠난 참담한 심경이었음에도 그이의 공사 구분은 명확했다. 즉시 귀국한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에서 “나랏일을 위해 진행 중인 일정을 취소할 수 없다”는 이유로 예정된 일정을 흔들림 없이 소화했던 것. 결국 발인 하루 전인 지난
3월 6일 모든 일정을 마치고 귀국한 그이는 그제야 빈소를 찾아 슬픔을 풀어놓았다.
며칠 뒤 마음을 추스르고 마주한 김 위원장과 강지원 변호사는 담담한 표정으로 취재진을 맞이했다. 부친을 여읜 지 얼마 안 되는 날짜에 잡힌 만남이기에 약속을 미룬다 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약속을 소홀히 하지 않는 부부의 원칙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를 외면하지 않은 것은 물론 작은 것까지 가벼이 여기지 않는 소신으로 권력이나 부를 좇는 대신 봉사와 헌신을 몸소 실천하며 살아온 시간. 이들에게는 본의 아니게(?) 얻게 된 사회적 명성보다 마음의 풍요로움이 더 큰 의미로 다가오고 있었다.

부친을 떠나 보내며
지난해 8월부터 올해 3월까지 어찌 보면 숨가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그이의 삶에는 그전까지와 다른 다양한 변화가 찾아왔다. 6년여의 대법관 임무를 끝으로 오랜 법관 생활을 홀가분하게 내려놓으며 법학대학원 석좌교수직을 선택했다.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을 병행하면서 법조계에서 해온 일들을 찬찬히 정리해볼 요량이었다. 그러나 아직 일복은 끝나지 않은 듯, 국가권익위원장으로 임명되며 다시 공직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한 와중에 부친상이라는 슬픔을 당한 것이다.
그이와 남편 강 변호사의 이력으로 봤을 때 보통의 생각으로는 고인을 애도하는 조문객들의 발길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이 당연했지만 이마저도 부부는 다른 소신을 드러냈다. 부친상을 주위에 알리지 않은 것은 물론 빈소 앞에 상주 이름에서 자신과 남편의 이름까지 빼버린 것. 이러한 선택은 지난 2004년 강 변호사의 모친이 세상을 떠났을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부부의 지인들 중에는
“꼭 가봐야 하는 자리였는데 기회조차 얻지 못해 당혹스럽다”고 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저보다는 남편이 속해 있는 모임의 지인들이 더러 그러시더군요. 저희는 평소에 결혼이나 장례와 같은 일은 가까운 친척끼리 간소하게 치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번에도 우선은 제가 공무로 빈소에 없는 상황에서 제 손님들을 오시게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죠. 공직자로서 지켜야 할 처신도 생각했고요. 친정식구들도 모두 저희 의견에 동의했어요. 제 동생(김문석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역시 공직자이기에 조의금을 받지 않는다는 공지를 했고요. 요즘같이 복잡한 시대에 바쁜 사람들을 어렵게 오게 하는 것보다 아버지와 평소 잘 알던 분들을 위주로 애도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어요.”
국민권익위원장직을 수락하고 다시 공직에 들어선 시점에서 늘 자신을 응원했던 부친을 떠나보내면서 만감이 교차하는 듯 목소리가 잠기는 그이. 부친 역시 평생을 공직에 몸담으며 모범적인 삶을 살아왔고, 그것은 그이를 비롯한 자녀들의 삶에 크고 작은 영향을 주었기에 아버지를 떠나보내는 그이의 안타까움은 더욱 컸다.
“제가 국민권익위원장에 임명될 때도 중환자실에 계셨어요. 저 역시 오랜 공직 생활을 해왔지만 행정부 공무원은 처음이잖아요. 그래서 아버지 생전에 빨리 일어나서 조언을 많이 해주시라고 말씀드리기도 했어요. 그땐 그러마 하고 고개를 끄덕이셨는데…. 병석에서도 제가 다시 국가 일을 하게 된 것을 좋아하셨어요. 많이… 서운하죠.”       

다시 들어선 공직의 길
사람의 삶이란 역시 생각한 대로만 살 수 없는 듯하다. 얼마 전 대법관에서 물러날 당시만 해도 한없이 편안한 웃음을 지었던 그이지만 다시 공직에 발을 들인 지금의 표정에는 새로운 고민이 묻어났다.
“여러 차례 사양했지만 솔직히 끝내 힘에 부쳐 수락했어요(웃음). 너무 사양만 하는 게 능사는 아니다 싶더군요. 한편으로는 직접 정책을 집행하는 기관이 아니라 정책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기에 할 수 있을 때 돕는 것이 올바른 태도라 생각했고요. 국민권익위원회는 고충 민원을 처리해주는 정부의 민원 포털 기관 같은 것이에요. 110 콜센터를 통해 전국적인 민원을 전화로 상담해주기도 하고 행정심판을 전담하는 것과 부패방지 업무도 수행하고 있죠. 수사기관이나 사정기관과 달리 누구를 실제로 수사할 권한은 없지만 예방과 교육을 전담하는 기관입니다. 그 업무가 나름대로 재미있어 열심히 배우고 있어요. 특히 청렴한 태도가 몸에 밴 직원들의 자세가 아주 훌륭하더라고요.”
개인적인 판단도 있었지만 국민권익위원장직을 수락한 데는 강지원 변호사의 적극적인 권유도 크게 작용했다. “그렇게 대법관에서 퇴임한 것을 좋아하던 사람이 결국 다시 공직자가 됐다”며 짓궂은 웃음을 터트리는 남편. 김 위원장이 대법관 시절 법관의 공정성을 위해 변호사 일까지 그만두며 적극적인 외조를 했던 그이기에 이제는 부부만의 한가로운 일상을 누려도 좋으련만 다시금 제약이 뒤따르는 공직을 권한 이유가 궁금해졌다.
“저 역시 처음부터 권하지는 않았어요. 아내의 성품으로 봐서 안 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일을 할 수 있는 나이고 국가에서 봉사하라고 하는데 마냥 사양한다는 게 적절치 않은 듯하더군요. 60세가 넘었으면 권하지 않았을 텐데(웃음)…. 이게 정치를 하는 자리였다면 반대했을 겁니다. 정당이나 정치가 아니라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일이기에 권한 거죠. 우리는 늘 인재를 널리 구하라고 하잖아요. 평소에 그렇게 말하면서 나만 예외가 되면 도리가 아니죠. 또 법조계의 경험이 아깝잖아요. 물론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도 좋지만 (국민권익위원장으로서) 더 좋은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합니다.”
위원장을 맡고 나서 그이가 처음 언급한 것 역시 부패와 비리, 편법 등에 대한 문제였다. 올바르지 않은 방법들이 만연할 때 국민의 권익은 불이익을 받기 마련이다. 대법관 퇴임 당시에도 전관예우가 있다는 인식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변호사 일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만큼 권익위원장이 된 후 최대 관심 역시 부패를 근절하고 청렴도를 높이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국제투명성기구가 발표하는 부패인식지수(CPIㆍcorruption perceptions index)에 따르면 2010년 기준 우리나라의 순위는 세계 39위. 과거 참여정부 출범 당시인 2003년 50위였던 것에 비하면 긍정적인 수치지만 부패수준은 10점 만점에 5.4점으로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30개국 평균치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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