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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재일 교포로 산다는 것 8년 만에 방한한 아쿠타가와상 수상 작가 유미리
일본에서 재일 교포로 산다는 것 8년 만에 방한한 아쿠타가와상 수상 작가 유미리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1.04.14 0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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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처음 한국에 이름을 알린 것은 1997년 자전적 이야기를 소재로 삼아 쓴 작품 ‘가족 시네마’로 제115회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하면서다. 아쿠타가와상은 일본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으로 재일 한국인 2세인 그녀가 수상했다는 사실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더구나 수상작인 ‘가족 시네마’는 재일 교포 1세대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살아가는 ‘자이니치(재일 한국인)’들의 현실을 투영했다는 점에서 영화로까지 만들어지며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기도 했다. 그러한 작품에 대한 관심은 작가 개인에게까지 이어졌다. 불우한 가정환경과 이지메 등으로 힘들었던 학창시절, 자살 기도와 고교 자퇴 등 아픈 성장기를 보낸 그녀.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태생적 불행을 작품으로 승화하며 작가로서 활발히 활동을 이어갔다.
작가로서 그녀의 관심은 다양한 방면에 미치고 있지만 유독 우리나라에 소개된 작품은 자전적 경험을 녹여낸 비극적인 소재의 작품들이 많았다. 일본에서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시각은 복잡하게 얽혀 있다. 특히 재일 한국인으로서 일본 사회에서 받은 상처를 드러내는 데 거침이 없는 그녀이기에 일본 극우집단의 오랜 위협을 받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녀는 익명으로 자신을 비판하는 혐한론자들에게 당당히 의견을 피력하는 한편, 몇 년 전에는 미혼모 선언을 하며 일본 사회에 또 한 번 화제를 불러오기도 했다. 또한 어린 시절 부모의 학대와 폭력, 이지메, 일본 극우단체의 테러위협 등을 담은 ‘유미리의 모든 불행 기록’ 표지에 자신의 누드를 싣는 등 독특한 성향의 작가이자 이슈메이커로 살아가고 있다.
오랜만에 조국을 찾은 그녀는 짧은 방한 일정에도 한 시간이 넘게 자신의 이야기를 가감 없이 풀어놓았다. 어느덧 40대에 접어들며 작가로서 깊이를 더해가고 있는 그녀가 털어놓은 자이니치의 삶, 그리고 한 아이의 어머니로 살아가며 경험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희곡작가로 팬들과 만나다
그녀가 8년이라는 긴 시간을 뒤로하고 방한한 이유는 자신이 21세 때 쓴 희곡작품 ‘해바라기의 관’이 지난 3월 세종문화회관 M시어터에서 재일 교포 연출가 김수진 씨가 이끄는 극단 신주쿠양산박의 공연으로 막을 올렸기 때문이다. 그녀의 작품이 무대에 오른 것은 이번이 세 번째. 그러나 한국 무대에 오른 자신의 작품을 직접 감상하는 것은 처음이다. 
8년 만에 한국을 찾은 소감은 어떤가?
오늘이 한국에 온 지 나흘째 되는 날인데 매일 인터뷰가 있어서 밖에 나갈 수가 없었다. 사실은 배우들이 연습하는 것도 못 봤다(웃음). 아무래도 오늘 공연 보고 나서 관객들과 같이 시간을 보낸 이후에 내일 밖으로 나가서 돌아봐야 실감할 것 같다.
‘해바라기의 관’이라는 작품은 21세 때 쓴 것으로 안다. 소개를 해준다면.
재일 한국인 가족의 붕괴를 그리고 있는 이야기다. ‘가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재일 한국이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람이 살아간다는 게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처음 ‘해바라기의 관’을 썼을 때가 스물한 살이었는데 지금 보면 굉장히 직설적인 작품이다. 마흔두 살인 지금의 내가 20년 전인 나와 재회하는 느낌이 들어 두근거리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조국에서 관객들과 처음 본다는 것 때문에 더욱 설렌다.
한국과 일본은 외적인 면에서는 꽤 비슷하다. 그러나 어떤 부분에서는 전혀 다른 이질성을 갖고 있는데 이번 방문에서 새롭게 느끼는 차이가 있나.
이틀 전에 ‘가족 시네마’(아쿠타가와상을 받은 그녀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를 상영하고 나서 김수진 감독과 함께 관객과의 대화 시간을 가졌다. 많은 관객들이 손을 들고 질문을 했는데 일본에서는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일본 사람들은 자신이 뭔가 생각이 있더라도 손을 들고 사람들한테 말하지 않는다. 대신 얼굴을 마주하지 않는 트위터 같은 것을 통해 자기 생각을 말한다. 입으로 직접 말하는 것은 꽤 직설적인 행동인데 내 안에도 그런 부분이 존재한다.
과거 배우를 한 적도 있다는데 혹시 직접 무대에 오르는 것을 볼 기회는 없나?
팬들은 아마 내가 배우로 서는 걸 바라지 않을 거다(웃음). 열여섯 살 때부터 2년 정도 배우 생활을 한 것 같다. 사실 스물네 살 때부터는 희곡조차 쓰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예전에 희곡을 썼다고 하면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놀란다.

자이니치, 상처 받은 유랑자
가깝고도 먼 나라, 한국과 일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자이니치들의 삶은 언제나 주변인에 머물고 있다. 한국에 와서 그녀는 ‘한류’에 관한 질문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대부분이 한류가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에 대한 것이었지만, 그녀는 배타적인 일본인들의 성향이 달라진 것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관계는 상황에 따라 흐리다가 맑기를 반복한다. 본인의 유년기와 비교해봤을 때 한국에 대한 인식은 어떤가.
‘겨울 소나타(겨울 동화)’로 촉발된 한류 붐은 그 이후 드라마나 영화를 비롯해 카라나 소녀시대, 동방신기 같은 K-POP(한국 가요)의 인기로 이어지고 있다. 그런 만큼 일본 안에서 한국에 대한 편견이 사라지고 좀 우호적인 분위기로 바뀌지 않았느냐는 말을 많이 들었다. 내 경우, 유년기 시절 이지메를 당했고 아쿠타가와상을 받고 나서 기념 기자회견을 하려고 하는데 우익집단의 폭탄 협박전화 때문에 중지되기도 했다. 이게 10년의 간격을 두고 일어난 일이다. 그후에도 30대 들어 아이를 낳고 나서는 일본의 유명 인터넷 게시판에 “일본에 대해 계속 비판할 거면 한국으로 가버려”라는 글이 11년이 지난 지금까지 올라오고 있다. 얼마 전에는 내 아들을 태워 죽이겠다는 협박이 트위터에 뜨기도 했다. 이 이야기를 언론에 했더니 이번에는 그 기사를 읽은 사람들이 다시 트위터를 통해 “일본을 그렇게 비판할 거면 일본에 오지 말고 한국에 그냥 있어라”는 글을 올렸다. 일본은 외부에서 오는 사람들은 환영하지만 내부에서 사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 배타적 분위기가 팽배하다. 예나 지금이나 외부인에 대한 배타적인 인식은 변하지 않은 것 같다. 한국 스타가 일본에서 연기를 하거나 노래하는 것은 환영해도 자기 의견을 말하거나 눈에 띄는 행동을 하면 바로 일본에 대한 비판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맹렬하게 비난한다.
자신을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존재, 방랑자라는 표현을 자주 쓰는데 모든 자이니치들의 삶에는 어쩔 수 없는 공통점이 존재하는 듯하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채 한일 양국 사이 틈에 끼였다는 의식은 재일 교포라면 모두가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인터뷰 같은 것을 통해 교류는 할 수 있지만 양국 관계가 악화되면 가장 먼저 영향을 받는 다리와 같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쟁이 벌어지면 가장 먼저 다리를 없앤다. 그렇기에 제일 먼저 위험한 상황에 놓이는 것이 재일 교포다. 피해의식이라기보다는 양쪽 나라를 다 오갈 수 있고 양쪽의 문화를 다 알고 있는 입장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글을 쓰는 것을 삶 자체라고도 했고 또 상처를 일깨우는 아픈 작업이라고도 표현했는데, 어떻게 절충하나.
부정적인 것과 긍정적인 것을 조절하는 게 불가능해서 항상 괴로워한다. 결정적인 사건이 됐던 게 열네 살 때 학교 가는 역에서 내려 언덕으로 올라가면 과호흡증을 일으켜서 양호실에 갔던 것이다.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학교 쪽에서 정신과를 소개해줘 거기에 입원하게 됐다. 그러나 그것이 결정적으로 정신적인 균형을 무너뜨린 계기가 됐다. 이후에도 종종 그런 사건이 있었다. 아마 살아 있는 동안은 계속 불균형한 상태에서 살게 될 것 같다.
그런 아픔을 글로 승화해 많은 작품을 발표하며 작가로서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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