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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여신 『디케』 이야기
정의의 여신 『디케』 이야기
  • 박소이 기자
  • 승인 2020.09.11 10: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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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과 법률

                              

인간의 감정은 우주 삼라만상만큼이나 복잡하고 다양하다. 기뻐하고 슬퍼하며, 사랑하고 질투하며, 지배하고 미워하며, 포기하고 용서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는 신들의 전성시대부터 영웅의 시대, 그리고 인간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관계와 감정을 상상의 세계에서 펼쳐 나간다. 신의 세계는 인간 세상의 축소판이다.  

글 전현정변호사 (법무법인 케이씨엘)

그리스 신화에서 신의 세계에도 다툼이 존재하는데, 그 사이에서 옳고 그름을 관장하는 율법의 여신이 테미스다. 테미스는 질서, 평화, 정의라는 자신의 속성을 타고난 세 딸을 두었다. 그중 정의의 여신이 디케(Dike)이다. 디케는 인간 세상에서 정의의 문제를 관장한다. 율법의 신과 정의의 신이 모두 여신인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세계 곳곳에는 정의의 여신인 디케뿐만 아니라 어머니인 테미스의 조각이나 동상도 많이 세워져 법과 정의의 가치를 추앙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디케의 동상만이 알려져 있는데, 법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반영한 것일지 모르겠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디케는 한 손에는 저울을, 다른 한 손에는 칼을 들고 있다. 저울은 무겁고 가벼운 것을 재는 도구로서 균형 또는 형량(衡量)을 상징한다. 판단을 할 때에는 서로 대립하는 이익, 권리, 가치를 잘 비교해야 한다. 저울 없는 디케는 상상할 수 없다.

디케는 다른 한 손에는 칼을 쥐고 있는데, 우리 법원에 있는 정의의 여신은 법전을 들고 있다. 디케가 한 손에 들고 있던 칼이 법전으로 바뀐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스 시대에는 법전이 없었다. 칼은 범죄자를 단죄하는 것, 형벌로 처벌하는 것, 승패를 명확히 가르는 것을 뜻한다.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냉혹함도 감수해야 한다. 근대 이후 많은 나라에서 법전을 편찬하였다. 우리나라도 민법전을 비롯하여 여러 법전을 갖추고 있다.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기초하여 양심에 따라 재판을 해야 한다(헌법 제103조). 우리 법원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은 법에 따라 재판해야 한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칼과 법 중 어느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가? 

디케는 로마 시대에는 유스티티아(Justitia)라는 이름으로 바뀌고, 15세기 말부터는 눈을 헝겊으로 가리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인정이나 사사로움을 떠나 공평하고 엄격하게, 그리고 편견 없이 정의를 구현하라는 뜻이다. 눈을 뜨고 있는 것과 눈을 가리고 있는 것, 어느 것이 디케의 본모습일까?  

중국 역사에서는 제나라 선왕이 맹자에게 자기와 같은 사람도 왕도를 실천할 자질이 있는지 묻는 대목이 나온다. 왕이 대전에 앉아 있을 때 어떤 사람이 대전 아래로 소를 끌고 지나가자 왕은 소를 어디로 끌고 가느냐고 물었다. 그 사람은 새로 종을 만들 때 소를 희생양으로 삼아 제사 지내려고 한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왕은 그 소를 놓아주고 양으로 바꾸라고 하였다. 맹자는 제선왕에게 그런 일이 정말로 있었는지 물었다. 부들부들 떨면서 사지로 끌려가는 것을 측은하게 여겼다면 소와 양이 다를 수 없는데도, 어찌 차별을 한 것인지 물은 것이다. 왕은 웃으면서 무슨 마음으로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대답한다. 소를 양으로 바꾼 까닭은 소는 보았고 양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단 한 번 본 소가 희생당하는 것을 측은하게 여긴 것이다.

보고 만나고 서로 알면 관계가 생긴다. 신도 성인도 아닌 인간은 판단이 흐려질 수 있다. 법관은 모든 감각을 총동원하여 사건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공평무사하게 판단해야 한다. 정의의 여신상은 눈을 가린 모습으로 이 두 가지 덕목을 일러주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디케는 사사로움을 버리고 누구에게든지 공평하게 결론을 내리겠다는 뜻으로 눈을 헝겊으로 가리고 있다. 

디케는 안개로 몸을 감춘 채 이 세상 곳곳을 암행하며 인간의 부당한 판결과 수치스러운 행동을 감시한다. 부당한 판결로 법을 날조하고 정의를 왜곡하면 디케는 안개에 몸을 가린 채 울부짖으며 재앙을 가져다준다고 한다. 디케와 같은 인물로 여겨지는 아스트라이아(Astraea)는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에서 하늘의 신 가운데 마지막까지 땅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철의 시대에 이르러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인간을 떠나자 피로 범벅된 지상을 떠나 별이 되었다. 아스트라이아는 처녀자리가 되었고 그녀가 손에 들고 있던 저울은 천칭자리가 되었다.

우리나라에도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여성 법률가들이 각자 맡은 곳에서 제 역할을 해나가고 있다. 여성 법률가에게는 법률가로서 장점이 많다. 권위적이지 않고 섬세하여 정확하게 사건을 파악해야 하는 법률업무에 적합하다. 수평적이고 평등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어 공평하게 사건을 처리할 수 있다. 더군다나 부패에 친하지 않고, 이성과 감성 어느 한쪽에 치우지지 않을 수 있다. 여성으로서의 경험이 세상의 많은 약한 사람들에 공감하는 능력을 준다. 남성만이 법률가였던 그리스 시대에서부터 현재까지 율법과 정의를 관장하는 신을 여신으로 삼은 이유는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한다.
 

전현정 변호사(법무법인 케이씨엘)
전현정 변호사(법무법인 케이씨엘)

 




전현정 변호사는...
서울대 법대 출신으로 1990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23년간 판사로 일하다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를 끝으로 2016년 법원을 떠났다. 현재는 법무법인 KCL 고문변호사다. 한국여성변호사회 부회장, 대한변협 양성평등센터장, 국가기후환경회의 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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