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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즈버그 대법관의 삶과 가치
긴즈버그 대법관의 삶과 가치
  • 박소이 기자
  • 승인 2020.11.10 10: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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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현정 변호사
전현정 변호사

 

“법은 사회를 위해 존재한다. 따라서 사회의 경험이 법에 반영되는 것은 당연하다. 법이 사람들의 생활 방식과 관계없이 무미건조하게 논리적이라면, 그것은 성공적인 제도로 자리 잡지 못할 것이다.”(긴즈버그·헌트,『긴즈버그의 말』)

지난 9월 미국의 두 번째 여성 대법관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Ruth Bader Ginsburg) 대법관이 87세로 별세하였다. 그녀는 삶 전체를 통해서 많은 영감을 주고 떠났다. 삶의 가치와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된다.

긴즈버그가 미국 연방대법관이 되기 전의 경력은 매우 흥미롭다. 긴즈버그는 코넬대학을 졸업하고 하버드 로스쿨에 입학하였다가 컬럼비아 로스쿨로 옮겼다. 로스쿨을 공동 1위로 졸업하였고 로 리뷰의 편집장을 지냈는데도 졸업 후 여성에게 냉담한 현실을 경험해야 했다. 뉴욕에 있던 로펌 어디에도 자리를 잡지 못했다. 그녀는 세 가지 핸디캡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유대인이었고, 여자였으며, 4살짜리 아이의 어머니였다. 당시 컬럼비아 로스쿨의 제럴드 건서 교수의 도움으로 그녀는 마침내 에드먼드 팔미어리 판사의 로클럭 자리를 얻었다. 이 시대를 함께 살고 있었던 여성이 더군다나 미국에서 그런 일을 겪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일찍이 긴즈버그 대법관을 직접 볼 기회가 있었다. 한번은 2003년 미국 뉴욕에서 열린 심포지엄이었고, 또 한 번은 2015년 우리나라 대법원에서 열린 좌담회였다.

2003년에 판사로서 뉴욕에 있는 컬럼비아 로스쿨에 방문학자로 있었다. 그 해는 긴즈버그가 미국 연방대법원의 대법관으로 임명된 지 1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축하하기 위하여 컬럼비아 로스쿨은 심포지엄을 열었다. 첫 번째 날에는 ‘성찰과 명언’이라는 제목으로, 다음날에는 ‘긴즈버그 대법관의 연방대법원 판결에 대한 기여’라는 제목으로 진행되었다. 이틀 내내 한 대법관의 삶과 판결에 대해 심포지엄을 열어 발표와 토론을 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녀가 판결에서든 삶에서든 일관되게 사회의 편견이 야기한 불평등으로부터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고자 노력했기에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었던 것이다. 동료인 브라이어 대법관의 표현대로 긴즈버그는 이미 미국 사회에서 상징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심포지엄에 참석했던 경험을 토대로 2004년 1월에 대법원의 해외사법소식을 통해 긴즈버그 대법관을 소개하는 글을 썼는데, 당시에는 긴즈버그 대법관이 우리나라에 널리 알려지기 전이었다.

10여년이란 세월이 흘러 긴즈버그 대법관은 2015년 8월 우리나라를 방문하였다. 미국에서 법률가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인기가 있게 된 그녀는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화제를 낳았다. 미국 연방대법관 중 최고령이었고 1999년에 직장암 수술을, 2009년에는 췌장암 수술을 받았고, 2014년에는 심장 스텐트 시술을 받았다. 깡마른 모습에 앉아 있을 때에는 의자에 몸을 기대야만 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일어나 걸을 때에는 목까지 수그러졌다. 그러한 건강상태와 노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활발하게 활동하였는데, 누군가 그 체력과 열정이 어디에서 나오느냐고 질문을 하자, ‘자신의 힘은 말과 글의 설득력에서 나온다’고 대답했다.

긴즈버그는 2013년 동성결혼식에서 주례를 서기도 했고, 2015년에는 동성애자의 혼인할 권리를 헌법상 권리로 인정하였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사람들의 생각이 변하고 사회가 변화하여 법원의 판결도 새로운 방향으로 반응하고 바뀔 수 있었다고 말한다. 어느 한 사회의 이상적인 시스템이 다른 사회에서는 이상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며 사회에 따른 차이도 존중한다.

긴즈버그 대법관은 진보의 아이콘이었다. 오랜 세월동안 인권에 대한 감수성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탁월한 실력에도 좌절을 겪으며 어렵사리 법률가 일을 시작했기에 평생에 걸쳐 사회적 차별에 맞서 싸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젊은 시절의 좌절과 경험만으로 그녀의 삶을 설명할 수는 없다. 비슷한 경험을 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똑같은 선택을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긴즈버그 대법관은 자신이 여성으로서 겪은 차별을 없애는 데 그치지 않고 보편적 인권에 관한 감수성을 토대로 사회의 불평등과 차별을 해소하기 위해 일관성 있는 삶을 살았다. 그녀의 삶과 판결에서 시대의 아픔을 느낄 수 있기에 그녀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며 시대의 아이콘이 되었다.


글 전현정 변호사(법무법인 케이씨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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