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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최고의 라이프스타일리스트 크리스틴 갤러리 박영숙 대표의 Bravo My Life
홍콩 최고의 라이프스타일리스트 크리스틴 갤러리 박영숙 대표의 Bravo My Life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1.05.16 14: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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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는 동안에는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어요.
하지만 돌아오는 비행기에서는 지옥으로 떠나는 느낌이었죠. 사실라이프스타일리스트로서 꾸준히 안목을 가지게 된 데는 이런 슬픈 사연도
숨겨져 있는 거예요”

 

지난해 말에 문을 연 크리스틴 갤러리에 들어서자 그 화려함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복층구조로 되어 있는 갤러리는 1층은 전시공간으로, 2층은 파티를 열 수 있도록 소규모 연회장으로 꾸며놓았다. 전시공간에는 밝은 크림색 대리석 바닥과 하얀 벽, 화려한 색조의 그림을 배경으로 다양한 디자인의 소파와 콘솔, 테이블과 안락의자 등을 배치해놓았다. 아무리 예쁜 소품과 가구더라도 어떻게 놓여 있느냐에 따라 분위기는 180도 달라질 수 있다. 이는 철저히 꾸미는 사람의 안목과 미적 감각에 의존된다. 박영숙 대표의 솜씨가 물씬 풍겨나는 갤러리는 마치 한 폭의 회화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따뜻하고 아름다웠다.
박 대표는 홍콩 최고의 라이프스타일리스트다. 미국과 유럽, 홍콩 상류사회를 상대로 고급스러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그이는 라이프아티스트로도 불린다. 홍콩에서는 그이 손이 닿으면 집값이 하루에 수천만원이 오른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평범하던 집도 그이가 꾸미면 환상적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홍콩 언론은 그이를 “홍콩 상류사회 여인들이 가장 닮고 싶어하는 여성”으로 표현한다.

전 세계를 다니며 키워온 남다른 안목
인터뷰를 위해 2층 연회장으로 들어서자 꽃과 초, 와인잔, 과일이 담긴 접시 등으로 세팅된 테이블이 가장 먼저 취재진을 반겼다. 하얀 커버를 씌운 의자에 앉아 은은한 자연광과 조용히 울려퍼지는 이름 모를 경음악에 취해 있을 때쯤 박영숙 대표가 모습을 나타냈다.
“갤러리 어때요? 일반 화랑하고는 조금 다른 느낌이죠. 이곳은 그림을 전시한 곳이 아닌 라이프스타일링을 제안하는 공간이에요. 제가 직접 디자인하고 만든 옷과 침구도 전시되어 있고요.”
그이는 삶의 전반적인 것에 관심이 많다. 인테리어뿐 아니라 의상디자이너로도 나름의 인정을 받았다. 그이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고급스러우면서도 편안한 분위기를 연출하자 주변에서는 그이를 아티스트로 대접했다. 그렇다고 그이가 미술이나 디자인을 전공한 것은 아니다. 누군가에게서 전문적으로 인테리어 스타일링을 배운 적도 없다.
다섯 살 때부터 무용을 배운 그이는 수도여사대(지금의 세종대)에서 한국무용을 전공했다. 무용은 음악부터 의상, 무대미술까지 그야말로 종합예술이다. 그이는 무용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지금의 안목과 감각을 지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대학원을 다니던 중 그이는 삼촌의 권유로 무용과 교수가 되기 위해 미국 샌프란시스코 발레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크리스틴 박이라는 미국식 이름은 그때부터 사용했다. 높은 꿈을 안고 미국에 발을 내딛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한국무용을 전공한 그이가 발레를 하려니 발이 퉁퉁 붓고 너무나 힘이 들었다. 무엇보다 언어가 통하지 않았다.
“샌프란시스코는 정말 아름다웠어요. 바다만 쳐다봐도 눈물이 절로 날 정도였죠. 그때마다 고향 생각이 나고 외로워서 못 견디겠더라고요. 언어학교에서 만난 한국 친구들과 시애틀을 거쳐 로스앤젤레스로 갔어요. 거기에는 한국 사람이 많으니까요. 그러다 비자가 만료돼 한국에 돌아왔는데 이제는 한국에 적응이 안 되는 거예요. 그때는 이미 외국 문화에 익숙해진 거죠. 주위에서 홍콩에 가면 저와 잘 맞을 거라고 했어요. 그렇게 홍콩 캐세이퍼시픽항공사에 입사하게 됐죠.”
그이가 항공사에 들어간 목적은 딱 하나, 유럽 문화를 몸소 체험하기 위해서였다. 홍콩에서 영국까지 열세 시간을 꼬박 비행해 피곤할 텐데도 도착 즉시 샤워를 한 후 프랑스 파리로 떠났다. 월급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돈을 아껴 마음에 쏙 드는 미술작품 등을 사기 시작했다. 당시 프랑스의 패션디자이너인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플로리스트였던 미셸 로보 등 파리의 예술인들과 교류하며 최고급 인테리어 감각도 익혔다. 박물관과 갤러리를 다니며 꼬박 시간을 보내다가 비행시간에 맞춰 다시 런던에 돌아왔다.
“많은 승무원들이 저를 부러워했어요. 다른 승무원들은 그렇게 할 용기도 없었고, 오직 회사에서 제공하는 호텔 테두리 안에서만 머물렀는데 저는 그 이상을 정복해나갔으니까요. 유럽 각국의 문화, 예술, 패션, 역사, 음식을 살피다 보니 절로 디자인 공부가 됐던 것 같아요.”

반강제적인 결혼 이후 힘들었던 생활
전 세계를 무대로 살아가던 박 대표는 남자들에게도 무척 인기가 좋았다. 당시 인기 있는 직업 중 하나가 승무원인 데다 외모적인 매력과 미적 감각까지 갖췄으니 상류층 남성들의 대시는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비행기 도착 시간에 맞춰 그이를 픽업하기 위해 나온 남자들이 줄을 서 기다릴 정도였다고 하니 가히 그 인기를 짐작할 만하다.
“남자들에게 인기가 있다는 건 즐거운 일이죠. 하지만 저는 저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어요. 남자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세계를 둘러보고 다양한 경험을 하고 싶었죠. 그런 중에 아는 분을 통해 홍콩의 한인교회에 가게 됐어요. 우리말로 설교를 들을 수 있어서 즐거웠죠. 목사님은 사람들에게 저를 소개하며 싱글이라고 말했어요. 제가 다닌 교회는 홍콩 주재원들이 주로 다니는 곳이었어요. 그렇다 보니 부부가 대다수고 싱글은 저 혼자밖에 없는 듯했죠.”
그이의 인생이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한 건 전남편인 미국 하버드대 출신의 중국계 변호사를 만나면서부터다. 그이는 “겉으로는 화려하고 행복한 인생이었지만 결혼생활은 밖에서 비쳐지는 것만큼 행복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연애할 때부터 키스 한번, 부부관계 한번 하지 않았고 전남편은 늘 폭음과 난폭한 성격으로 위화감을 조성했다. 그러다 전남편의 일방적인 소송으로 결혼생활 19년 만에 이혼을 당하게 됐다.
전남편은 교회의 교인 부부가 소개해주면서 만나게 되었다. 이성을 만나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그이는 정중하게 거절했지만 거듭된 부탁으로 그들 부부와 함께 식사자리를 가지게 되었다. 이후 전남편의 펜트하우스를 찾았고 그 집에서 바라본 야경이 너무도 아름다워 교제를 시작하게 되었다.
“틱 장애가 있는 사람이었어요. 외모도 제 스타일이 아니었죠. 식사 후 거절하려고 했는데 그 집에서 바라본 야경이 눈물이 날 만큼 아름다운 거예요. 어떤 사람이기에 이토록 아름다운 다이아몬드뷰를 가지고 있을까, 호기심이 생겼죠.”
로맨틱한 첫 만남이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박 대표에게 청혼을 했다. 하지만 좀처럼 허락할 수가 없었다. 알코올중독자처럼 술을 마셨고 성격 또한 난폭한 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전남편은 주먹으로 그이를 친 뒤 강제로 차에 태웠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결혼신고센터. 그이는 무척 화가 났지만 한편으로는 ‘얼마나 나를 사랑하면 이렇게 강제로 결혼하려 할까’라고 생각하다 반강제적으로 결혼서약서에 사인을 했다.
그이는 결혼 후인 1991년 승무원 생활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라이프스타일리스트 크리스틴 박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이름도 미세스 크리스틴 추로 바뀌었다. 당시 홍콩의 각종 대연회나 국가 귀빈 행사 자리는 그이의 연출로 이뤄졌다. 테너 호세 카레라스 등 세계적인 거장을 초청해 자선공연도 자주 열었고 2006년에는 한국과 프랑스 수교 120주년 기념으로 열린 프랑스 홈페어에 초대받아
<그림·꽃·가구전>을 선보이기도 했다.
“항공사를 그만둘 때 이미 홍콩에서는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상태였어요. 라이프아티스트로 불렸죠. 승무원 생활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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