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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도 칵테일을 마시죠 Men drink cocktails, too
남자도 칵테일을 마시죠 Men drink cocktails, too
  • 전해영 기자
  • 승인 2020.11.16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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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아주 흥미로운 광고를 보았다. 바(Bar)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남녀에게 종업원이 다가간다. 그는 한 손에는 맥주, 다른 한 손에는 칵테일을 들고 와서 망설임 없이 남자 앞에 맥주를, 여자 앞에는 칵테일을 가져다 놓는다. 테이블에 앉은 남녀는 멋쩍은 듯 웃으며 자신들 앞의 맥주와 칵테일을 서로의 앞에 밀어준다. 맥주를 마시려던 사람은 여자, 칵테일을 마시려던 사람은 남자였기 때문이다.

이 광고는 비슷한 에피소드를 몇 차례 더 보여준 뒤 이 카피를 남긴다. “남자도 칵테일을 마시죠(Men drink cocktails, too)”. 네덜란드 맥주 브랜드인 하이네켄의 이 광고는 일상 속에서 이뤄지는 성 고정관념을 자연스럽게 비튼 시각을 보여준 것으로 화제가 됐다.

방송가에서도 오랫동안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이 이어져왔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관록 있는 중년 남성과 젊고 아름다운 여성 진행자’의 조합이다. 뉴스 앵커를 선정할 때도, 시사교양 혹은 예능 프로그램의 진행자를 캐스팅할 때도 이런 조합은 오랫동안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사회적으로 중요하거나 무게감 있는 내용은 주로 남성이 전달하고, 상대적으로 가볍고 밝은 그리고 친절한 설명이 필요한 내용은 여성이 주로 전달하는 방식이었다.

그동안 예를 들어 여성을 메인 MC로 전면에 내세우기도 하는, 성 역할에 대한 새로운 시도를 한 프로그램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리고 최근엔 이러한 고정관념을 깨는 캐스팅도 많이 이뤄지고 있다. 다만 고정된 성역할에 대한 인식이 견고하게 자리잡고 있을 때가 있었다는 것이다.


내면 속 잠자고 있는 당당함을 찾자

 

손정은 아나운서. 사진=손정은
손정은 아나운서. 사진=손정은

 

방송계에서의 성 상품화에 대한 이야기도 해보자. 성 상품화는 상업적 목표를 위해 성적 매력을 활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각종 광고, 음악, 영화, 드라마, 예능 등 방송계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보편화된 방식이다.

아름다움을 소비하고 동경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고 이를 무조건 배척할 수는 없다. 문제의 본질은 ‘상품화 자체’라기보다 당사자들이 자유의지와 관계없이 비인격적으로 소비된다는 것이다. 존엄성을 지키며 자유의지를 가지고 선택한다면 문제가 될 리 없다. 광고에서 몸매가 다 드러나는 드레스를 입어도, 영화를 위해 누드 연기를 해도, 예능에서 거침없이 자신의 성 욕망을 풀어낼 때도, 성적으로 소비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건 그들이 당당함과 자신감을 바탕으로 인격과 존엄을 유지한 채 스스로 선택한 일이기 때문 아닐까.

수동적인 모습으로 나를 평가하는 사람들의 기준에 맞추려 했던 지난날이 떠오른다. 방송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을 무렵,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기준은 나를 캐스팅하는 사람들의 기준에 맞춰져 갔다. 실제로 그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도 못하면서 몸매, 헤어, 말투 그리고 소위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떠올리게 되는 여성적인 애티튜드까지, 맞추려 노력했다. 스트레스를 받으며 다이어트를 했고 헤어 스타일과 의상 하나 바꾸는 것 역시 하나 하나 신경을 썼다. 그들에게 평가 절하될 것이 두려워 나는 마음속으로 전전긍긍해야만했다.

어린 여성이 감당하기엔 너무 큰 역할의 방송을 맡으면서 내면의 단단함과 실력보다는 그들에게 보여지는 모습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제 와서 그 시간을 돌이켜보면, 아쉬운 부분이 정말 많다. 물론 그때도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들의 기준에 맞추느라 신경 쓸 시간에 나는 좀 더 깊이 있게 공부하고, 사색하고, 많은 독서를 하고, 진짜 건강함을 위한 생활을 했어야 했다.

웨이트 트레이닝을 처음 시작했던 5년 전부터 생긴 목표가 있었다. 날씬한 몸이 아니라 건강한 근육을 갖춘 몸만들기. 처음 운동을 시작하기 전 체지방 성분을 분석했는데 근육량이 거의 없는 표준이하로 나와서 충격을 받았었다. 적은 근육량이 건강에 매우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때부터 근력운동을 시작했다. 5년간 꾸준히 한 결과 지금은 근육량이 표준으로 늘어났다. 단기간에 억지로 만드는 것이 아닌, 긴 시간에 걸쳐 즐겁게 운동한 결과다. 건강을 위해 그리고 내면을 위해 운동하며 한결 가벼워진 내 자신을 발견한다.

상대의 틀에 억지로 맞추려는 사고에서 벗어나려는 인식의 전환이,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해방의 시작 아닐까. 남들의 기준에 맞추려고 쏟는 에너지를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에 쓰기 시작하면서, 나는 진정 훨씬 자유롭고 행복해졌다.

우리를 소비하려는 사회를 탓하는 것을 넘어, 내면의 잠자고 있는 당당함을 찾아내는 것. 그 시작은 남이 아닌 자신만이 할 수 있다. 당신의 용기를 응원한다.


글·사진 손정은(MBC 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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