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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휴머니스트’소설 <객주>의 작가 김주영과 과거와 현재 사이를 걷다
‘길 위의 휴머니스트’소설 <객주>의 작가 김주영과 과거와 현재 사이를 걷다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1.07.11 09: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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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희생적인 삶을 떠올리지 않아도
아버지의 고달프고 버거웠던 삶을 이야기 하지 않아도
가슴에 요동치는 그 것!
인생의 초입에서 끝까지 계속되어지는 그 것!
영원으로 향하는 그 것!  
그 것은 사랑!

현자는 절대로 소리쳐 말하지 않는다
아주 아주 작은 소리로 말하는 것이다.
수십 번, 수백 번, 수십만 번을 갈고 다듬어
노루목이 어디인지를, 인생의 해법이 무엇인지를 제시하는 것이다.

쉼표와 마침표, 그리고 말없음 표를...

김주영
만나면 멋진 사람
만나면 이웃이 되는 사람

2011년 6월   이재만

 

 

 


역사의 행간 속 민생의 삶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다
1878년부터 1885년에 걸친 시기에 보부상의 삶과 활약상에 관한 이야기를 장편소설 <객주>로 엮어낸 작가 김주영. 작품에서 19세기 말인 조선 후기의 상업자본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사실적으로 그려내면서 역사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 외에도 <화척>, <홍어>, <아라리 난장> 등으로 이산문학상을 비롯해 국내의 여러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는 ‘우리 시대의 작가’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 건강한 하층민의 삶과 더불어 자신의 힘들었던 어린 시절을 소설 속에 풀어낸 작가의 속 깊은 이야기가 문득 궁금해졌다. 소설 속 가공된 현실이 아닌 진짜 인생, 조금은 투박하더라도 지금의 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작가의 오늘을 오감으로 느껴보고 싶었다.

이재만 서른한 살에 등단해 작가로 활동한지 올해로 41년이 되셨습니다. 보통 한 분야에서 이 정도 세월이면 장인이라고 말하는데요. 선생님 스스로는 어떤 느낌이신가요.
김주영 벌써 41년이 되었던가요. 이재만 변호사의 말처럼 한 분야에 그렇게 오랫동안 있었으면 장인이 되어야 하는데 아직은 그 경지에 이르지 못한 것 같아요. 신인작가의 기분으로 지금까지 활동해왔거든요. 특히 시대가 계속 변하고 진리라고 말하는 것들도 변하기 때문에 글 쓰는 것도 매번 바뀔 수밖에 없어요. 사회의 흐름에 적응하다보면 항상 뒤처지게 되는 걸 느껴요. 장인은 앞서가야 하는데 말이죠. 아직은 완성도 높은 삶을 살았다고 말하기 힘든 것 같아요.
이재만 어린 시절 본래 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나요.
김주영 작가가 되기에 좋은 능력을 어릴 적 많이 길렀다는 생각을 해요. 경북 청송의 산골마을에 살았기 때문에 호기심 많은 소년시절을 보냈거든요. 매일 보는 사람과 산등성이 사이에서 때때로 시골 장날이나 시외버스, 낯선 사람들이 마을에 찾아와 보여주는 모습 같은 것에 대한 호기심이 강했어요. 호기심이 많은 아이로 자란 것이 글을 쓰는 데 작은 동기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재만 서울신문에 <객주> 연재를 시작했던 1979년은 박정희 대통령 암살이 있었고, 연재를 마친 1983년까지 정치, 경제, 사회, 안보 전 분야에 걸쳐 혼란스러운 시절이었는데요. 그런 시대에서 보부상들의 이야기를 쓰는데 어려움은 없었나요.
김주영 <객주>는 당시 시대상황과 상당히 거리가 있는 이야기죠. 그 시절에는 기업 활동을 소재로 다룬 이야기가 거의 없었어요. 정치적인 문제만 아니라면 상행위나 기업행위에 대해서는 크게 간섭하지 않던 분위기였죠. 신문에 소설을 연재하면 외부로부터 여러 요구사항이 들어오기 마련인데 저한테는 전혀 없었어요.
이재만 신문 연재라는 것이 마감시한을 지키는 일이나 펑크나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가 상당하다고 들었어요. 선생님은 어떠셨나요?
김주영 그때 저는 생계유지를 이해 오로지 글 쓰는 일에 매달렸어요. 다른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요. 그래서 소설 연재를 하는
4년 8개월 동안 신문사에서 원고 독촉을 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요. 특히 <객주>의 절반가량은 보따리를 싸들고 시골 여관에서 썼어요. 장터를 순례하면서 소설을 썼기 때문에 반은 집에서 반은 지방의 여인숙에 엎드려서 쓴 적이 많죠.
이재만 길 위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작가로도 유명하시잖아요. 그런 삶이 힘들어 다른 직업을 동경해본 적은 없으신가요.
김주영 1989년 <화척>이라는 소설을 쓸 때였어요. 소설의 배경이 송도, 그러니까 지금의 개성이라 소설의 배경이 되는 자료를 얻기 위해 순수한 목적으로 북한을 다녀오려고 했는데, 결국 좌절감을 크게 느꼈어요. 가까운데도 못가는 분단 현실에 대해서요. 그때 1년 반 정도 절필을 했죠. 그 당시 기업운영을 하시는 분들을 좀 도와드린 적이 있는데 체질에 안 맞더라고요. 도저히 못하겠어서 결국 글 쓰는 일로 돌아왔죠. 그래서 지금도 내가 다른 일을 해서는 살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해요.
이재만 선생님의 작품에는 가난함에 대한 것과 서민들의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 것 같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김주영 다른 나라에 비해 대한민국은 고유의 풍속이나 문화적인 DNA를 비교적 잘 유지해 왔어요. 그건 몇몇의 잘난 왕이나 장수 같은 사람들의 역할보다는 역사의 뒤, 그리고 행간 사이에 존재하는 이름 없는 사람들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들의 저력과 생명력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고민하다보니 그런 내용들을 소재로 소설을 쓰게 됐어요.
이재만 작가만큼 인생과 글이 서로 긴밀하게 영향을 주고받는 사람도 없을텐데요. 작가의 가치관이나 지향점에 따라 작품 역시 따라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경우는 어떠한가요.
김주영 마흔 살 전까지는 아버지가 우리를 버리고 나가 편모슬하에서 자란 비참하고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숨기고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양 지냈어요.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비로소 깨달은 것이 힘겨운 시간들이 나로 하여금 오늘날의 나를 작가로 만들었고, 거기에 만족하며 살 수 있게 만들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이 영향으로 제 소설 중에 <홍어>, <고기잡이는 갈대를 꺽지 않는다> 등은 그전에 나온 책들과 달리 어린시절의 가난이 이야기 중심에 들어있어요.

시간이 흐를수록 더 소중할 수밖에 없는 것들
우직할 것 같지만 한 없이 여린 속내를 가진 대작가를 곁에서 바라보고 있으니, 그가 들려준 소설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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