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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 발전에 평생을 헌신 대통령 한방 주치의, 경희의료원 한방병원 류봉하 원장
한의학 발전에 평생을 헌신 대통령 한방 주치의, 경희의료원 한방병원 류봉하 원장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1.07.11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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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주치의는 말 그대로 대통령의 건강을 전담하는 의사를 뜻한다. 옛날로 치면 어의(御醫)라고 할 수 있다. 3년 전 ‘대통령 한방 주치의제도’가 폐지되고 얼마 전 류봉하 원장이 다시 한방 주치의가 되기까지 양방 주치의만이 ‘대통령주치의’의 역할을 수행해왔다. 대통령주치의는 무보수명예직으로 차관급에 준하는 예우를 받게 된다. 대통령이 해외 순방길에 오를 경우 동행하는 것은 물론이다. 또 언제 어느 때 발생할지 모르는 대통령이 건강상 문제에 대비해 늘 청와대에 30분 안에 도착할 수 있도록 상시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 더불어 대통령을 비롯해 그 직계가족의 건강까지도 살펴야 하는 것이 주치의로서 류 원장의 역할이다. 국가 최고 권력자의 건강을 책임지는 주치의로 임명됐다는 사실은 평생 한의로서 한 길만을 고집했던 류 원장에게 여러 가지 의미로 다가오는 듯했다. 소감도 남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 한의학계의 입장에서 3년 만의 부활이 다행으로 여겨집니다. 원래 제자리를 찾았다고 생각되기도 하고요. 한의학계 전체의 영광이기도 하고 제가 몸담고 있는 경희의료원 한방병원의 일원으로서도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평소 열정적으로 국정에 임하는 이명박 대통령이지만 적지 않은 나이 탓에 건강이 염려되는 것도 사실. 그러나 젊은 시절부터 기업인으로 세계 각국을 넘나들며 키워온 체력은 여전한 듯, 대통령을 진맥해본 류 원장은 “평소 관리를 잘 하시고 워낙 열정적으로 일하시는 분이라 연세에 비해 체력이 좋았다”고 말하며 한의학계를 대표하는 책임감을 털어놨다.
“한의학계를 대표해 대통령의 건강을 책임지는 만큼 주치의로서의 역할에도 충실하고, 한편으로 제도적인 면이나 한의학의 발전을 위한 부분에 대해 필요하다면 대통령께 건의하는 역할도 해야 되겠죠.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책임이 무겁군요(웃음).”

선대부터 이어진 한의학 가문
우리나라 한의학은 한때 동의보감과 사상의학 등 독자적인 의학으로 꽃피웠던 시절이 있다. 그러다 일제시대와 6.25 전쟁을 거치면서 쇠퇴의 길을 면치 못했다. 특히 일제시대는 비단 한의학만이 아니라 우리 민족 전체가 가혹한 탄압을 받던 시기였다. 그러나 류 원장의 조부인 류종우 옹은 그때부터 한의학에 몰두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경북 안동 하회마을에 630년간 터 잡고 살아오며 수많은 학자와 정치가를 배출해왔던 가문이지만, 망국의 치욕을 맞이한 선비로서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고. 유교에 입각해 살아온 한학자로서 교육에  뜻을 두기도 했지만 신학문의 물결이 휘몰아치면서 그마저 여의치 않았던 탓이다. 혼란한 시대에 질병으로 고통 받는 서민을 달래는 한의사로서의 사명은 이후 아들이자 류 원장의 부친인 류시철 옹으로 이어졌다. 때문에 류 원장에게 한의학은 타고난 운명과 다름없었다. 
“할아버님의 뒤를 이은 아버님은 포항에 내려가서 의술을 펼치셨어요. 당시에는 건재상도 하셨기 때문에 어린 시절 한약 창고는 저의 놀이터와 같았습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약으로 건강을 지켰고요. 그야말로 한약 속에서 평생을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운명이었다고 할 수밖에요(웃음).”
그러나 그에게도 이러한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기 싫었던 치기 어린 젊은 시절이 있었다. 전후 우리나라에 새로운 문물이 물밀듯 쏟아져 들어오는 와중에는 그 역시도 정치와 경제, 역사 분야에 관심이 많았던 젊은이였다. 하고 싶은 일도 배우고 싶은 것도 많았던 시절, 그러나 자신이 원하는 길과 가업을 잇기 바라는 부친의 뜻은 정반대의 상황에서 갈등에 직면하기도 했다. 더구나 그 시절 한의학은 놀라운 치료 효과를 보이며 보편화된 양의학에 밀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분야이기도 했다. 류 원장은 “부친의 뜻은 확고했고 끝내 거스르기 쉽지 않았다”며 옛 기억을 돌이켰다.
“그 나이 나름대로의 꿈도 있었고 아버님과는 다른 길을 모색했죠. 하지만 결국은 아버님의 뜻에 따라 경희대 한의대학의 전신인 동양의학대학에 입학을 했어요. 당시에는 서울한의학대학이라는 명칭이었죠. 대학을 다니면서도 한 1년간은 마음을 못 잡았는데… 나중에는 포기하고 열심히 하기 시작했죠. 지금 와서 생각하면 사람이 살면서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성공이라고 봐야 할지, 아니면 이런 위치에 이르렀으니 성공이라고 해야 할지(웃음)…. 결론적으로는 잘된 셈이지만 다른 길로 갔으면 어떻게 됐을지 모를 일이죠. 한편으로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아직 남아 있기도 해요. 그러나 그 시절에는 저 외에도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았을 때니까.”
마음을 다잡은 후 공부가 깊어질수록 한의학 정수에 대한 이해가 높아졌고 그를 더욱 몰입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은 체계가 잡히지 못한 탓에 사람들 사이에 ‘한의학은 고루하고 큰 효과가 없다’는 인식이 팽배했다. 게다가 긴 일제치하에서 전통의 근간마저 전부 파헤쳐져지고 거의 고사 위기에 처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 뿌리를 다시 공고히 하고 지금의 발전을 이룬 것은 류 원장 같이 해방 후 처음으로 체계화된 교육을 받은 한의학 1세대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한의학이 주가 돼 왔다고 하지만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말살 직전에까지 내몰렸습니다. 의원이라는 말도 한약종상으로 격하시켰을 정도니까요. 결국 민간에 의해서 개인적으로 전승돼 왔죠. 제가 처음 대학에 들어갈 당시에 정규과정으로 편성된 이후 지금의 경희의료원 한방병원과 같이 발전하게 된 것이니 그때에 비하면 지금의 한의학 발전상은 눈부실 정도입니다. 졸업생도 30명 배출에서 매년 700명 수준으로 늘어났으니까요.”
세월이 흘러 그도 후대에 업을 물려줄 시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자신의 선례가 있었기에 두 아들에게는 가문의 업을 잇는 것을 강요하지 않았다. 4대째 한의사 탄생에 대해 묻는 질문에 웃음 지으며 답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두 아들 모두 각자 다른 길을 선택해 대학에 진학했지만 최근 한 명이 아버지의 뒤를 잇겠다는 심중을 밝혔다는 것.

대한민국 한의학의 기틀을 세운 시간들
1974년 경희대학교 한의과 대학을 졸업한 후 다시 모교에 몸담은 그는 지금까지 40년 가까운 세월을 오롯이 한의학계 발전을 위해 살았다. 처음 제자들을 가르칠 당시, 비록 한의학이 정규 대학 과정이 됐다고 하지만 제자들을 키워내고 한의학 저변을 확대하기 위한 과정에 어려움도 적지 않았다. 또한 병을 진단하는 방법이나 치료 원리가 판이하게 다른 탓에 한의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양의학과의 갈등도 적지 않았던 것이 사실. 그러나 가장 큰 벽은 일반인의 고정관념이었다고.
“지금은 바로잡혔지만 제가 군대에 갔을 때는 한의과 학생들은 군의관으로 갈 수 없었어요. 제도적으로 차별이 있었죠. 한의학에 대한 뿌리박힌 고정관념에 더해 한의학을 부정하는 세력들까지 있었으니까요. 또 양방에서는 한약을 먹으면 무조건 간이 나빠진다고 하던 시절도 있었죠. 하지만 한약재 수천 가지 중에 간에 안 좋은 영향을 주는 것은 극히 일부입니다. 게다가 그것은 한의학에서도 파악하고 있는 부분이고요. 또 양약 역시 간을 비롯해 다른 장기에 부작용을 끼치는 사례가 있지 않습니까. 같은 나라에 살았고 그 조상도 한의학의 혜택을 받았는데 너무 직업적인 편견을 가지고 백안시하는 것은 지금도 개선되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이러한 편견과 마주하며 그를 포함해 한의학계는 꾸준히 제도권 의학으로서 한의학의 기틀을 다져왔다. 과학적인 진단방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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