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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될 ‘보편적 출생등록’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될 ‘보편적 출생등록’
  • 전현정
  • 승인 2021.02.16 14: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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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과 법

사람이 태어나 사회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 출생신고이다. 출생신고를 하면 가족관계등록부에 이름이 올라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출생신고를 당연히 거치는 하나의 절차로 여기고 출생신고를 하지 못하는 경우를 염두에 두지 않고 살아간다. 그런데 출생신고를 하지 못하는 삶은 어떠할까?


글 전현정 변호사(법무법인 케이씨엘) 사진 Queen DB

출생신고 없이는 공적 장부로 이름을 증명할 수도 없고 주민등록번호를 부여받지도 못한다. 주민등록번호가 없으니 의료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있을지 걱정되고 학교에 입학하여 생활하기도 쉽지 않다. 사람이 누리는 사회보장을 비롯한 많은 혜택은 출생신고에서 시작된다. 따라서 출생신고는 사람이 인간다운 삶을 누리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올해 초 인천에서 8살 아이가 출생신고가 안 된 채 방치되다가 친모에 의해 사망하는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하였다. 아이의 친모는 10여 년 전부터 아이 아빠와 동거하던 중 아이를 낳았지만, 전 남편과 이혼을 하지 않아 서류상 문제로 아이의 출생신고를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출생신고가 안 됐기 때문에 교육당국이나 행정당국 모두 아이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나라 출생신고 제도의 문제점에 관해서 다시 한 번 관심이 모아졌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015년 아동인권 모니터링을 통해 출생신고가 이루어지지 않는 사례를 조사하였다.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신고 의무자인 부모가 출생등록을 기피해 출생신고가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와 출생신고를 원하지만 법적·제도적 한계로 출생신고가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이다. 미혼부 자녀의 출생신고는 이주아동, 외국인, 난민의 출생신고 등과 함께 법적·제도적 한계로 출생신고가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에 속한다.

국제사회에서도 우리나라의 출생신고 제도에 대해 여러 차례 개선할 것을 권고해 왔다. 2011년 유엔 아동권리위원회는 우리나라에 모든 아동이 차별 없이 출생등록을 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할 것을 권고하였다. 2017년에는 유엔 사회권규약위원회에서 동일한 권고를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출생등록은 부모 등의 신고에 의존하고 있다. 사람이 태어나면 한 달 안에 어머니나 아버지가 출생신고를 해야 한다. 혼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낳은 아이, 즉 혼인 외 출생자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어머니가 출생신고를 해야 한다. 어머니가 출생신고를 하지 않을 경우에 어머니와 혼인관계에 있지 않은 아버지는 아이에 대해 출생신고를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이 문제를 해소하고자 2015년에 「가족관계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약칭 ‘가족관계등록법’)을 개정하여 제57조 제2항을 신설하였다. 이 규정을 ‘사랑이법’이라고 부른다. 어머니의 인적 사항을 알 수 없는 경우, 즉 어머니의 이름·등록기준지 및 주민등록번호를 알 수 없는 경우에 아버지가 가정법원의 확인을 받아 출생신고를 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런데 ‘어머니의 이름·등록기준지 및 주민등록번호를 알 수 없는 경우’가 무엇을 뜻하는지 문제되었다. 

대법원은 2020년 6월 사랑이법에 관한 중요한 결정을 하였다. 어머니의 인적사항을 아는 경우라도 생부 자신이 책임질 수 없는 사유로 출생신고에 필요한 서류를 갖출 수 없는 경우, 어머니가 소재불명인 경우 또는 어머니가 정당한 사유 없이 출생신고에 필요한 서류 발급에 협조하지 않는 경우에도 출생신고를 위한 확인을 해줘야 한다고 결정하였다. 이것은 사랑이법을 확장하여 적용함으로써 미혼부가 아이의 출생신고를 할 수 있는 길을 넓혔다.  

그러나 사랑이법이나 대법원 판례만으로 출생신고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인천에서 발생한 사건처럼 출생신고를 일부러 하지 않는 경우에는 출생등록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외국인의 출생신고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 코로나가 문제되기 전인 2020년 1월 기준으로 우리나라에는 약 17만 명의 장기체류 외국인이 있었다. 그중 비숙련, 저임금 노동 이주노동자에게는 가족동반이 허용되지 않는데, 우리나라에서 자녀를 출산하면 단속이나 강제퇴거를 피하기 위해 자녀를 본국법에 따라 신분등록을 하지도 않고 우리나라에서 출생등록을 하지도 않은 채 키우고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최근 여성가족부에서 출생통보제를 도입하려고 하고 있다. 이것은 분만을 담당한 의료진이 공공기관에 출생사실을 알리는 제도이다. 부모의 신고에만 의존하는 제도는 원시적이고 한계가 많다. 대법원 결정에서 강조하고 있듯이 ‘출생등록 될 권리는 법 앞에 인간으로 인정받을 권리로서 모든 기본권 보장의 전제가 되는 기본권’이다. 독일, 영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는 병원이나 의사도 아기의 출생사실을 공공기관에 알리도록 하고 있다. 부모의 국적도 묻지 않는다. 

존 롤스는 『정의론』에서 “사상체계의 제1덕목을 진리라고 한다면 정의는 사회제도의 제1덕목이다. 이론이 아무리 정치하고 간명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면 배척되거나 수정되어야 하듯이, 법이나 제도가 아무리 효율적이고 정연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정당하지 못하면 개선되거나 폐기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수많은 사람으로 구성된 국가나 사회를 편리하게 관리하려고 만든 제도가 오히려 사람의 기본적 권리를 제약하는 족쇄가 되는 경우가 있다. 출생등록은 출생과 동시에, 그리고 쉽고 간편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출생등록 제도를 전면적으로 개선하여 모든 아이가 출생등록을 할 수 있도록 보편적 출생등록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전현정 변호사는...
서울대 법대 출신으로 1990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23년간 판사로 일하다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를 끝으로 2016년 법원을 떠났다. 현재는 법무법인 KCL 고문변호사다. 한국여성변호사회 부회장, 대한변협 양성평등센터장, 국가기후환경회의 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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