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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언어로 시간과 공간을 잇다
번역가, 언어로 시간과 공간을 잇다
  • 서혜란
  • 승인 2021.03.20 09: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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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23일 케빈 오록(Kevin O’Rouke) 신부가 선종했다. 1964년 성골롬방 외방선교회 신부로 한국에 파견된 그는 반세기가 넘는 세월을 한국문학 번역에 바쳤다.

최인훈의 <광장>,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서정주와 조병화의 시선집 등 수많은 문학 작품들이 그의 번역을 거쳐 영국과 미국에 소개됐다. 그는 우리의 고전문학에도 관심이 많아 신라시대의 향가를 비롯해 이규보, 정철, 윤선도 등의 시조를 영어로 옮겼다.

2017년에는 조선시대의 시조 600수를 번역한 <The Book of Korean Poetry>로 제25회 대산문학상(번역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국인들도 잘 알지 못하는 고전시가를 즐겨 읽고 번역한 아일랜드 태생 신부님 덕분에 우리 문학작품들이 세계의 독자들에게 소개될 수 있었다.

한국 문학작품의 번역가로서 근래에 가장 대중적 관심을 많이 끌었던 이는 아마도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를 번역한 데보라 스미스(Debora Smith)가 아닐까 싶다. 2016년에 영어로 번역되어 영국에서 출판된 작품을 대상으로 선정하는 영국의 문학상 ‘맨 부커 국제상(Man Booker International Prize)’을 받은 그녀는 “품격 있는 번역과 생생한 영어문장”(뉴욕타임즈의 서평)의 주인공으로서 국내외 언론의 조명을 받으며 원작자인 한강 작가만큼이나 유명해졌다.

지난 10월 15일에 제이크 레빈, 서소은, 최혜지가 공동 번역한 김이듬 시인의 시집 <히스테리아>의 영문판 <Hysteria>가 ‘전미번역상(National Translation Awards)’과 ‘루시앙 스트릭 아시아 번역상(Lucien Stryk Asian Translation Prize)’을 동시에 수상했다는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1998년에 제정된 ‘전미번역상’은 매년 영어로 번역된 시와 산문 가운데 원전의 예술적 힘을 멋지게 재창조한 번역가에게 주어진다. ‘루시앙 스트릭 아시아 번역상’은 선시(禪詩) 시인이자 번역가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던 루시앙 스트릭(1924-2013년)을 기념하여 2009년 제정된 상으로, 아시아 언어로 쓰인 시집 또는 선불교 문헌을 영어로 번역한 번역가에게 주어진다.

최돈미 번역가가 2012년에 김혜순 시인의 시집 <당신의 첫>을, 2019년에 역시 김혜순 시인의 시집 <죽음의 자서전>을 번역하여 두 번이나 이 상을 받았으니, 한국 시로서는 세 번째 수상이
다.

그런데 위에 열거한 모든 상을 받은 주인공은 번역가들임이 분명하건만, 이 소식을 전하는 국내 언론 대부분은 작가들에게 수상소감을 묻고 그 분들의 작품세계를 소개하는데 집중했을 뿐, 데보라 스미스의 경우와는 달리 번역가들에게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스스로 시인이기도 한 최돈미 번역가가 최근에 자신의 시집 <DMZ Colony>로 미국도서재단(National Book Foundation)이 수여하는 ‘전미도서상(National Book Award)’의 시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르면서 그나마 국내 언론에 소개되었을 뿐, 이번에 두 개의 상을 한꺼번에 받은 번역가 레빈이나 서
소은, 최혜지에 대한 정보는 찾기 어렵다.

번역이, 특히 문학작품의 번역이 거기에 담긴 의미와 감각과 맥락 등을 다른 언어로 생각하고 느끼는 다른 문화권의 독자들에게 오롯이 전달하려는 지난한 창작과정이라는 점을 생각해볼 때 번역가의 공로가 과소평가되는 것 같아서 아쉽다.

문학작품의 번역은 언어만이 아니라 문화와 정서와 경험을 옮기는 작업이다. 번역가들은 우리가 세대를 넘어, 인종과 지역을 넘어 소통하고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윤선도와 한강의 감성이 세계적으로 공감을 얻고, <해리포터>의 헤르미온느가 우리나라 독자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번역가들 덕분이다.

요즘 국립중앙도서관은 인공지능을 활용해서 고문헌을 번역하는 실험을 계획하고 있다. 정형화된 형식을 갖춘 문서를 인공지능으로 번역하는 것은 이미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상태이고, 이제는 시문(詩文) 같은 비정형 문헌의 번역에 도전하는 것이다. 한문 해독이 가능한 전문 인력이 점점 줄어드는 가운데 우리 선조들이 남겨준 소중한 문화유산을 마냥 방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이 쓴 시와 소설이 사람들을 감동시켰다는 말도 들리니, 이제 문학작품의 번역도 인공지능의 몫이 되는 건가?

 

사진=Queen

 

글 서혜란(국립중앙도서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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