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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 인터뷰] 정희자 전 서울힐튼호텔 회장의 삶과 도전..."김우중의 아내가 아닌 나의 이름으로 살고자 했다"
[독점 인터뷰] 정희자 전 서울힐튼호텔 회장의 삶과 도전..."김우중의 아내가 아닌 나의 이름으로 살고자 했다"
  • 송혜란 기자
  • 승인 2021.03.22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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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이여, 꿈을 키우고 도전하며 실천하라"
대우그룹 김우중 전 회장의 부인 정희자 전 서울힐튼호텔 회장이 지난 2월 15일 퀸과 인터뷰를 가졌다. 정 회장은 1년여 전 남편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낸 뒤 서둘러 자서전 '내 마음에 비친 나의 모습'을 펴냈다. 정 회장은 서울힐튼호텔을 세계 힐튼호텔 중 최고로 키운 장본인으로, 대우그룹이 폭풍성장하는 데 정 회장의 내조가 큰 힘을 차지했다는 데 이견이 없다.
대우그룹 김우중 전 회장의 부인 정희자 전 서울힐튼호텔 회장이 지난 2월 15일 퀸과 인터뷰를 가졌다. 정 회장은 1년여 전 남편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낸 뒤 서둘러 자서전 '내 마음에 비친 나의 모습'을 펴냈다. 정 회장은 서울힐튼호텔을 세계 힐튼호텔 중 최고로 키운 장본인으로, 대우그룹이 폭풍성장하는 데 정 회장의 내조가 큰 힘을 차지했다는 데 이견이 없다.

 

김우중의 아내가 아닌 자신의 이름으로 살고자 했던 정희자 회장. 그녀는비록 IMF 여파로 대우그룹은 산산조각이 났지만 서울힐튼호텔을 성공으로 이끈 그녀의 미술에 대한 조예와 문화, 사람을 보는 안목은 지금도 널리 회자되고 있다. 이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9년 제31회 신사임당상을 받기도한 그녀다. 1여 년 전 남편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낸 뒤 서둘러 자서전 <내 마음에 비친 나의 모습>을 펴낸 정희자 회장을 공동저자 이복실 전 여성가족부 차관이 만나 인터뷰했다.


올해로 팔순을 맞은 정희자 회장은 어릴 때부터 남다른 소녀였다. 학교 공부를 마치면 일찍이 결혼해 주부로 살던 당대 여성들과 달리 그녀는 자신의 일을 하고 싶다는 꿈을 꾸었다. 이런 딸이 기특했던 아버지도 그녀를 인정, 지지하고 격려했다.

1964년 고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과 결혼하면서 잠시 억눌려 살았으나 남편 역시 곧 그녀의 재능을 알아보고 비즈니스 동반자로 삼았다. 초기 사업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사채를 빌리러 다니고, 해외 바이어들을 집에 초대해 저녁 밥상을 차리는가 하면, 해외 수출을 위해 현지 문화를 습득해오는 것 모두 정 회장의 역할이었다. 결국 남편의 두터운 신뢰를 바탕으로 서울힐튼호텔의 회장 자리까지 꿰찬 그녀는 1996년 서울힐튼호텔이 전 세계 450~500개 힐튼호텔 가운데 최고의 호텔로 선정되도록 경영하며 ‘터프 마담’, ‘호텔의 여왕’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또한 현대미술에 대한 관심과 큰 아들 선재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1991년 경주에 선재미술관을 설립, 2003년에는 서울 종로에 아트선재센터를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성공의 기쁨도 잠시. 1999년 대우그룹 부도 사태로 정 회장은 사랑과 애정을 다해 키운 서울힐튼호텔과 선재미술관이 매각당하는 큰 아픔을 겪어야 했다.

이후 그녀는 줄곧 어떤 삶을 살았을까? 고 김우중 전 회장을 떠나보내며 되돌아보는 그녀의 어린 시절, 남편과의 첫 만남, 결혼생활, 꿈, 사업, 성공비결 그리고 현대 여성들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뭇 감흥을 일으키기 충분했다.

 

정희자 전 서울힐튼호텔 회장이 최근 펴낸 자서전 '내 마음에 비친 나의 모습' 공동저자 이복실 전 여성가족부 차관이 퀸 3월호 정 회장 인터뷰를 맡아주었다.
정희자 전 서울힐튼호텔 회장이 최근 펴낸 자서전 '내 마음에 비친 나의 모습' 공동저자 이복실 전 여성가족부 차관이 퀸 3월호 정 회장 인터뷰를 맡아주었다.

 

이복실_ 회장님은 여성이 사회생활은커녕 큰 목소리도 내기 어렵던 시절 서울힐튼호텔이라는 굵직한 기업의 총수 자리에 오르셨습니다. 결혼 후 남편 내조와 자녀 양육에만 전념하던 당대 여성들과 달리 신여성의 삶을 사셨는데, 어릴 적 부모님으로부터 어떤 가르침을 받으셨는지요?

정희자_ 저희 아버지 영향이 컸어요. 아버지는 와세다대 졸업생으로 당대 대단한 지식인이셨어요. 농업 관련 공부를 하셨는데, 귀국 후에는 크게 번창한 형님들의 광산업을 도와주면서 나름의 포부를 펼치고 싶어 하셨습니다. 경주에서 농장을 운영하셨지요. 후일 그 농장은 일본에서 활동하던 육종학자 우장춘 박사와 함께 새로운 품종을 개발, 연구하는 터전이 됐습니다. 아버지는 제게도 꿈을 심어주셨어요.
‘너는 보통 여자애가 아니다. 짐승 껍질로 옷을 해 입고 소가죽 신발을 지어 신고 다녀야 할 정도이니 말이다. 네가 비록 여자지만 넓은 세상을 바라보고 높은 뜻을 세워 봐라. 여자라고 약해지지 말고.’ 항상 저를 격려해주신 아버지는 가슴 아프게도 일찍 돌아가셨지요. 대신 그 빈자리를 큰언니가 채워줬습니다. 어머니의 살가운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어른들의 이런저런 상황으로 경주에서 혼자 자라는 여동생이 늘 안타까웠던 큰 언니는 제게 바이올린도 배우게 하고 책도 많이 사주며 틈틈이 뭐라도 가르치려고 애를 많이 썼습니다.


이복실_ 언제나 당찼던 소녀는 자라서 훗날 청년이었던 고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님을 만나게 되지요. 처음 고 김 전 회장님을 만났던 순간을 기억하시는지요?

정희자_ 아직 생생히 기억해요. 대학을 졸업한 후 큰아버지 회사 일을 도울 때였어요. 하루는 친구 아이의 백일잔치에 갔는데, 손님들 중에 안경을 낀 예쁜 남자가 있는 거예요. 첫 인상은 별로였어요. 인상이 차가워 보였거든요. 그런데 그이가 제 친구를 통해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습니다. 마음이 썩 내키지 않았으나 주변에서 자꾸 나가보라고 재촉하는 바람에 딱 세 번 만났는데 그이가 청혼하더라고요. 제가 공부에 욕심을 내는 것이 무엇보다 마음에 든다면서요. 자신이 한성실업에 다니는데 조만간 회사가 미국에 지사를 설립할 것이니 결혼해서 같이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를 하자더군요. 그이가 샐러리맨이라는 사실은 마음에 들었어요. 저희 집안이 모두 사업을 했던 터라 그 고초가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기에 제 생각이 바뀌었지요. 더욱이 결혼하라는 엄마의 성화가 점점 더 거세지는 상황에서 평생 기다려온 구세주를 만난 기분까지 들었어요. 당시 문화로서 저는 엄청난 노처녀였으니까요. 결혼 이야기가 나온 지 두 달 만에 그와 결혼식을 치르게 됐습니다.


이복실_ 고 김 전 회장님은 생전 어떤 남편이었나요?

정희자_ 남편은 매일 아침 도시락 두 개를 싸간 뒤 하루 종일 일하고 밤늦게 퇴근하는 워커홀릭이었어요. 평생 일만 하려고 태어난 사람 같았지요. 신혼 초기엔 저녁마다 남편의 전화를 기다리는 게 일상이었습니다. 마치 사랑하는 남자와 데이트 약속을 기다리는 처녀처럼 설랬어요. 남편을 마중하는 그 시간이 우리 부부가 바깥에서 갖는 유일한 데이트였거든요.
저와 남편은 장화를 신고 진흙탕 길을 찌그럭찌그럭 걸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나누었습니다. 오래 사귀지 않고 결혼해서 그런지, 남편 볼 시간이 적어서 그런지 결혼 후 제가 더 남편을 좋아하게 된 것 같아요. 제가 집 안에서 아이 낳아 키우고 밥이며 빨래에 시어머니를 모시는 생활로 정신없는 동안 남편은 직장에서 승승장구하며 최연소 임원으로 승진했습니다.


이복실_ 여느 부부들이 그렇듯 결혼 생활이 마냥 행복하기만 할 순 없지요. 회장님 부부에게도 위기가 있었을까요?

정희자_ 언젠가 한번 크게 이혼을 각오하고 가출한 적이 있어요. 둘째 선재를 낳고 산후 몸조리를 하던 중이었는데, 태어난 지 100일도 안 된 갓난애와 이제 겨우 종종 걸음마를 하는 선정이를 데리고 찬바람 부는 미아리 골목길을 나섰지요. 남편이 회사를 그만두고 창업하겠다는 뜻을 끝내 굽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출은 제 최후의 수단이었으나 효과는 없이 2주 만에 비참한 기분으로 돌아와야 했어요.


이복실_ 그렇지만 회장님은 그 누구보다 고 김 전 회장님의 사업을 적극적으로 돕지 않으셨나요?

정희자_ 네, 일단 사업을 시작한 이상 어떻게든 남편의 일을 도와야 한다는 마음뿐이었어요. 지금처럼 금융업이 발달하지 못한 시절이었으니 사업자금은 주로 사채에 의존했는데요. 어린 딸 선정이를 업고 사채업자들을 찾아다니며 사업자금을 꾸러 다니기 일쑤였습니다. 사채업자들 집에 가서 청소 하고 설거지도 해주며 그분들의 마음을 얻으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했지요.


이복실_ 집안 일에, 아이들 양육, 남편 사업 내조까지 다 감당하느라 많이 힘드셨겠어요.

정희자_ 많이 힘들었지요. 특히 남편은 유난히도 손님들을 집으로 초대하는 걸 좋아했어요. 대우실업을 창업한 이후 하루가 멀다고 외국 바이어들을 집으로 모셨는데, 그저 저는 군말 없이 손
님 밥상을 차릴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집이 식당도 아니고 점점 지치더라고요. 아이들이 하나둘 더 태어나고 나중에 막내 선용이까지 포함해 넷이나 되는 아이들을 챙기며 일주일에 서너 번씩 손님맞이를 한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1 꿈 많던 여고 시절의 정희자 회장 모습. 그녀는 학창 시절을 보낸 경주를 마음의 고향이라고 소개했다. 2 첫 딸 선정 씨를 낳은 정 회장. 젊었을 때 정 회장 부부는 둘 다 자존심이 강해 많이 다퉜다고 한다. 3 1964년 고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과 결혼하면서 그녀의 제2의 인생이 시작됐다. 4. 정 회장은 서울힐튼호텔을 최고의 호텔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5~7 정 회장은 특유의 사교성으로 북한의 김일성 주석은 물론 중국의 장쩌민 주석, 베트남의 도 므어이 당서기장,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총리 등 외국 정상들과 도 친분을 유지하며 활발히 교류했다. 8 1991년 러시아에서 백야 관광을 즐기고 있는 정 회장 부부. 부부가 함께 관광에 나선 것은 평생 한두 번에 지나지 않는 희귀한 일이었다. 9 정 회장이 한참 일에 몰두하던 시절. 얼굴이 검게 그을려 있다. 10 1999년 정 회장은 대한주부클럽연합회가 주관하는 제31회 신사임당상을 받았다. 11 금혼식에서. 1964년 결혼해 55년을 같이 산 정 회장 부부. 고 김 전 회장은 세상을 뜨기 몇 년 전 인터뷰에서 아내와 같이 시간을 못 보낸 것이 제일 안타깝다고 말한 바 있다.
1 꿈 많던 여고 시절의 정희자 회장 모습. 그녀는 학창 시절을 보낸 경주를 마음의 고향이라고 소개했다. 2 첫 딸 선정 씨를 낳은 정 회장. 젊었을 때 정 회장 부부는 둘 다 자존심이 강해 많이 다퉜다고 한다. 3 1964년 고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과 결혼하면서 그녀의 제2의 인생이 시작됐다. 4. 정 회장은 서울힐튼호텔을 최고의 호텔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5~7 정 회장은 특유의 사교성으로 북한의 김일성 주석은 물론 중국의 장쩌민 주석, 베트남의 도 므어이 당서기장,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총리 등 외국 정상들과 도 친분을 유지하며 활발히 교류했다. 8 1991년 러시아에서 백야 관광을 즐기고 있는 정 회장 부부. 부부가 함께 관광에 나선 것은 평생 한두 번에 지나지 않는 희귀한 일이었다. 9 정 회장이 한참 일에 몰두하던 시절. 얼굴이 검게 그을려 있다. 10 1999년 정 회장은 대한주부클럽연합회가 주관하는 제31회 신사임당상을 받았다. 11 금혼식에서. 1964년 결혼해 55년을 같이 산 정 회장 부부. 고 김 전 회장은 세상을 뜨기 몇 년 전 인터뷰에서 아내와 같이 시간을 못 보낸 것이 제일 안타깝다고 말한 바 있다. (사진 정희자 회장 제공)

 

이복실_ 회장님의 내조 덕분에 대우실업이 국내 굴지의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다시 태어나도 고 김 전 회장님과 결혼하시겠습니까?

정희자_ 옛날이나 지금이나 가장 많이 듣는 질문 중의 하나예요. 무척 난처하지요. ‘네’, ‘아니오’로 딱 잘라서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잖아요. 그러나 이제 저는 다음 생에 자상한 남편과 결혼하고 싶어요. 다시 태어나면 일밖에 모르는 무심한 남편과는 결혼 안 할 것 같아요. 건강하던 제게 갑자기 병마가 찾아왔을 때도 남편은 곁에 없었어요. 남편의 따뜻한 눈빛과 손길이 너무도 그리웠는데 말이에요.


이복실_ 그래도 고 김 전 회장님을 만난 데 후회는 없으시지요?

정희자_ 그럼요. 돌이켜보면 제 인생에서 가장 운명적인 일은 바로 남편을 만난 것입니다. 그이는 제 인생의 동반자였어요. 저는 남편 곁에서 꿈을 꾸었고, 또 동등한 조력자로서 인정받고자 노력했습니다. 남편이 다른 것은 몰라도 책은 군말 없이 다 사주었고 책을 좋아하는 저를 기특하게 생각했습니다. 또 세계여행이 자유롭지 않은 시절에 여행을 통해 세계의 넓은 문물을 보게 해 주었어요. 제가 일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이해해주었고, 결국 기회까지 만들어줬지요. 그런 면에서는 그에게 굉장히 고맙습니다. 제가 그이를 내조했듯 그이도 저를 외조한 셈이니까요.


이복실_ 고 김 전 회장님도 아내인 회장님을 많이 신뢰하고 의지했던 것 같습니다. 대우실업이 대우그룹으로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게 팽창해 갔는데요. 회사가 번창할수록 회장님의 영역도 확장됐지요?

정희자_ 남편은 해외 수출을 위해 새로운 나라에 진출할 때마다 자신이 먼저 현지에 다녀온 뒤 그 다음 꼭 저를 보냈어요. 현지 문화와 생활상을 파악하고 남편에게 알려주는 게 제 역할이었지요. 현지 사정에 대해 제가 뭐라고 말하면 남편은 ‘알았어’라고 한마디로 끝내지만 속으론 제 안목을 높이 평가했다고 생각합니다. 막내 선용이는 ‘대우가 새 국가로 나가려면 그 나라 지도자와 친해져야 하는데 어머니가 그런 관계를 잘 만든다고 생각하셔서 아버지가 항상 같이 가길 원했던 것 같다’며 ‘제가 없었으면 아버지 혼자서 대우그룹을 키우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남편은 제가 자신보다 더 잘한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전적으로 믿고 맡겼어요. 호텔과 문화, 미술에 관한 것은 철저하게 제 몫이었지요.


이복실_ 고 김 전 회장님이 회장님께 서울힐튼호텔 회장 자리를 준 데도 그만한 이유가 있었네요. 당시 파격적인 인사로 세상이 떠들썩했는데요. 회장님의 각오도 컸을 것 같습니다.

정희자_ 남편은 제가 투덜거리긴 해도 무얼 하든 열심히 잘해보려고 애를 쓰니까 생각을 많이 바꿨던 모양이에요. 열정과 활력이 넘치고 기가 센 마누라를 잘 써먹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시험 삼아 해보라고 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어쨌든 남편은 제 사회생활을 위해 물꼬를 터줬습니다. 서울힐튼호텔을 맡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일하는 여성으로 세상에 뛰어들 수 있었으니까요. 물론 당시 숱한 사람이 제가 그냥 이름만 걸어둔 것이라느니 실권은 없을 거라느니 금방 그만둘 거라느니 말들을 많이 했어요. 그이도 제가 잠깐 하다가 그만둔다고 할 줄 알았을 거예요. 그러나 제가 속으로 얼마나 이를 악물며 다짐했는지 몰라요. ‘죽어도 그만 안 둔다. 남보다 잘한다는 소리를 꼭 듣고야 말겠다.’ 각오를 단단히 했습니다.


이복실_ 마침내 회장님은 일이 년 하고 그만둘 거라는 세간의 시각과 달리 18년 동안 서울힐튼호텔을 아주 훌륭하게 이끄셨습니다. 성공 비결이 뭘까요?

정희자_ 호텔 일은 할수록 재미있었어요. 사람마다 각자 자기만의 길이 있다면 저는 태어날 때부터 호텔 경영자가 되기로 정해져 있던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습니다. 음식 솜씨 좋고 다림질이며 정리정돈을 잘하는 어머니 밑에서 야무지게 살림을 배운 것, 워낙 눈썰미가 좋은데다 어린 시절부터 인테리어 디자이너를 꿈꿀 만큼 집안 꾸미기를 좋아했던 것, 여러 나라의 바이어에게 오랫동안 음식을 대접해온 경험을 가진 것, 남편을 따라 세계 각국의 다양한 호텔에 투숙해본 것, 그리고 거기서 음식을 맛본 것 등 모든 일이 호텔경영에 도움이 됐습니다. 호텔은 효율적인 범위 내에서 마치 내 집처럼 편안한 느낌과 여성적인 인테리어 감각, 조명으로 고급스러움, 세련미를 제공해야 해요. 저는 호텔 경영을 제 집 살림하듯이 했습니다.


이복실_ 서울힐튼호텔에서 회장님 별명이 ‘터프 마담’이었다고 들었습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정희자_ 제가 하도 억척스럽게 일을 하니 호텔에서 터프 마담이라는 별명까지 지어 줬어요. 저는 현장을 중시하는 경영자였습니다. 제가 잘해야 직원들이 그걸 본받을 수 있고, 그것이 끝내 원가 절감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직접 주방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음식 맛을 보기도 했고, 새벽에 꽃 시장에 들러 손수 꽃을 사 오기도 했지요. 이탈리아 식당을 오픈할 때는 실제 직원들과 이탈리아에 가서 여러 식당을 다니며 음식을 먹어봤습니다. 그 결과 서울힐튼호텔이 서울의 그 어느 곳보다도 이탈리아 음식을 잘 하는 곳으로 평가받았어요.
그때 저는 돈 욕심 없이 오로지 서울힐튼호텔을 최고의 호텔로 만들어 인정받고 싶었어요. 저의 고급호텔에 대한 집념은 1996년 서울힐튼호텔이 전 세계 450~500개 힐튼호텔 가운데 최고의 호텔로 선정되는 기쁨을 가져다줬습니다. 이후 경주힐튼호텔, 중국 옌볜대우호텔 등을 잇달아 오픈했고, 불가리아 소피아 쉐라톤호텔, 알제리 인터내셔널 알제호텔도 인수해 운영했지요.


이복실_ 그토록 호텔에 정성을 다했는데 대우그룹 부도로 채권단에 넘어가게 됐으니 얼마나 속이 상하셨겠어요.

정희자_ 그때는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한 해 수십 억씩 흑자를 내던, 제 분신 같은 서울힐튼호텔은 가장 먼저 매각 대상에 포함됐습니다. 싱가포르 투자청에 팔렸는데 판매액이 당시 채무의 두 달 이자에 불과하더군요. 피땀 흘려 일군 호텔이 그렇게 끝나니 허무했어요. 집도 그렇지만 호텔을 잃은 건 제게 너무 큰 아픔입니다. 풀 한 포기, 장식품 하나 제 손길이 닿지 않은 게 없으니까요.

 

1999년 제31회 신사임당상을 받은 정희자 회장. 정 회장은 아들이 '엄마는 21세기 신사임당이야'라고 말하며 일과 가정을 완벽하게 실천한 엄마라고 생각해주는 자녀들이 있어 행복하다고 말했다.
1999년 제31회 신사임당상을 받은 정희자 회장. 정 회장은 아들이 '엄마는 21세기 신사임당이야'라고 말하며 일과 가정을 완벽하게 실천한 엄마라고 생각해주는 자녀들이 있어 행복하다고 말했다.

 


이복실_ 그 고통의 시기를 어떻게 이겨내셨어요?

정희자_ 남편의 병구완과 소송 등 닥친 현안들이 휘몰아치는 상황에서 슬픔에만 잠겨 있을 수 없었어요. 모든 게 마무리되는 데 거의 10년이 걸렸습니다. 자식들은 큰 시련을 뚫고 나가기에 너무 어렸어요.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저밖에 없었어요. 그 와중에 제 건강도 나빠져 장과 위 수술 등을 여덟 차례나 하며 죽음 문턱까지 갔습니다. 제 심정은 정말 피를 토할 정도로 괴로웠습니다. 20년이 흐른 지금에야 비로소 모든 것을 내려놓았어요. 대우의 업적은 분명 공과가 있을 것이고, 훗날 역사가 평가해줄 것이라 믿어요. 대우그룹이라는 회사는 잃었지만 우리는 가족이 있어 서로 버틸 수 있었습니다.


이복실_ 역시 가족들이 큰 버팀목이 되었군요. 자녀분들은 잘 자라셨나요?

정희자_ 제가 바깥일을 하면서도 아이들 교육은 엄하게 했어요. 남편과 큰 아들 선재가 제 곁을 떠났지만 남은 가족이 아니면 못 살았을 거예요. 지금은 결혼해 자녀를 셋이나 둔 막내아들 선용이는 ‘엄마는 21세기 신사임당이야’라고 종종 말하곤 합니다. 그가 생각하는 신사임당은 일과 가정을 완벽하게 실천한 인물이에요. ‘엄마처럼 바깥일 열심히 하면서 아버지 내조와 자녀 교육에 모두 철저한 엄마는 드물 거야’라고 저를 한껏 치켜세우는데 그런 애들이 있어 참 행복합니다.


이복실_ 고 김 전 회장님이 떠나신 지 1년이 좀 넘었습니다. 여전히 그리우시지요?

정희자_ 남편이 막상 떠나고 나니 보고 싶고 그립네요. 집 거실에 그이의 사진을 걸어놓고 작은 제단을 만들었어요. 아침에 일어나 그이에게 인사하고 외출 후 돌아와서도 꼭 향을 피웁니다. 그러면 보고 싶은 마음이 조금 위안되는 것 같아요.


이복실_ 회장님께서는 일생을 다해 신여성의 삶을 본보기로 보여주셨는데요. 후배, 딸과 같은 현대 여성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정희자_ 제 뒤에 오는 여성들이 조언을 구한다면 ‘꿈을 키우고, 도전하며, 실천하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요. 사회에 진출하려는 여성에게 꿈은 꼭 필요합니다. 꿈이 없다면 도전도 없고 실천도 없어요. 시작을 위해 꿈을 꾸어야 하며, 앞으로 나가기 위해 도전해야 하고, 꿈을 완성하기 위해 실천해야 합니다. 그런 뜻에서 저는 큰딸 선정이가 결혼을 늦추고 자기만의 일을 갖기를 원했으나 제 바람과는 다르게 일찍 결혼했지요. 그러나 다행히 결혼하고도 자기 소질을 개척하면서 전문성을 키워나가고 있어 자랑스럽습니다.

 

이복실 전 여성가족부 차관
이복실 전 여성가족부 차관

 





이복실은…
전 여성가족부 차관, 세계여성이사협회 한국지부 회장. 서울시립대 도시행정학과를 졸업,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USC에서 교육학으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1985년 여성으로서 네 번째 행정고시 합격자이다.
30년간 중앙부처에 재직했으며, 2013년 여성가족부가 설립된 이래 최초 여성 차관으로 임명됐다.
저서로는 <여자의 자리 엄마의 자리>, <나는 죽을 때까지 성장하고 싶다> 등이 있다.











[Queen 송혜란 기자] 사진 양우영 기자 | 촬영 협조 아트선재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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