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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 평창’ 2018 동계올림픽
‘YES! 평창’ 2018 동계올림픽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1.08.11 15: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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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7일 0시 18분(한국 시각). 평창은 남아공 더반에서 열린 2018 동계올림픽 개최지 결정 1차 투표에서 유효표 95표 가운데 무려 66.3%에 해당하는 63표를 얻으며 개최권을 따냈다. 2위인 독일 뮌헨(25표)보다 38표나 앞섰다. 이로써 한국은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일본에 이어 지구촌 주요 스포츠 이벤트인 동·하계 올림픽, 월드컵 축구, 세계육상선수권, 포뮬러 원(F1) 자동차 경주를 모두 개최하는 사상 다섯 번째 국가가 됐다.

평창, 그 위대한 승리가 있기까지…
평창의 도전은 1999년부터 시작됐다. 평창이 2010 동계올림픽 도전 결정을 발표할 당시는 IMF 외환위기로 나라가 휘청거리던 때였다. 위기 상황에서 올림픽이란 말을 꺼내기란 쉽지 않았다. 여러 가지 악조건 속에서도 평창은 동계올림픽 개최라는 꿈을 가지고 2003년 7월 체코 프라하에서 열린 2010 동계올림픽 개최 회의에 참석했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캐나다 밴쿠버와 맞붙은 대한민국 평창은 당시만 해도 다른 나라에 위축됐다. IOC 위원들에게 열심히 ‘평창’을 소개했지만 상당수가 ‘평양’으로 오해했다. 그러나 포기할 수는 없었다. IOC 위원들이 현지 실사를 왔을 때 평창 지역의 모든 주민이 거리로 나와 환영하는 등 각고의 노력을 펼쳤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평창의 인지도는 시간이 지날수록 높아졌고 개최지 결정투표에서 3표 차로 석패하자 IOC 위원들은 “2010의 진정한 승자는 평창”이라는 편지를 보내왔다.
한 번의 쓴잔을 마셨다고 해서 포기할 평창이 아니었다. 평창은 몇 년의 준비 끝에 2007년 7월 과테말라시티를 찾았다. 당시 평창은 이번에야말로 동계올림픽을 개최할 줄로만 알았다. IOC 위원들을 개별적으로 공략하고 점검한 결과 70%는 평창 표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강력한 라이벌, 러시아가 있었다. 전세기 한 대로 과테말라에 입성한 우리나라와 달리 러시아는 군용기 9대를 동원했고 푸틴 대통령뿐 아니라 에너지 관련 CEO와 역대 메달리스트를 총출동시켰다. 동유럽 국가에 가스를 공급하는 러시아가 에너지를 무기로 압박하자 평창을 지지했던 동유럽 국가 위원들은 갑자기 마음을 바꿨고 결국 기회를 얻지 못했다. 두 번의 실패를 겪었지만 낙심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평창은 곧바로 3차 도전 준비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강원도민뿐 아니라 국민적인 지지를 얻으며 시작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평창을 찾아 “반드시 유치에 성공하자”고 선언하며 본격적인 시동을 걸었다. 당시만 해도 평창의 지지표는 20표를 오르내렸다. 하지만 이후 탄력을 받으며 강력한 후보지인 독일 뮌헨과의 격차를 좁혔고 각고의 노력 끝에 남아공 더반에서 압승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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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반의 신화를 만든 사람들

평창 유치단의 든든한 후원자

동계올림픽 개최에 대한 정부의 강력한 의지 발로 뛰며 보여준 이명박 대통령
메르켈 독일 총리와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더반에 모습을 보이지 않은 것과 달리 이명박 대통령은 현장에서 유치 활동을 진두지휘했다. 전문가들은 4년 전 당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제119차 IOC 총회에서 2014 소치동계올림픽 유치를 끌어냈을 때와 흡사한 ‘국가 원수 효과’가 통했다는 분석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프레젠테이션에 발표자로 직접 나서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동계올림픽 유치 과정에서 대한민국이 한 모든 약속을 반드시 지킬 것”이라며 지지를 호소했다. 이 대통령은 대통령 취임 직후부터 IOC 위원들을 만날 기회가 있으면 평창의 지지를 호소했다. 2009년 말부터 이 대통령의 해외 순방에는 IOC 위원이나 영향력 있는 인물들을 만나 평창 지지를 호소하는 일정이 거의 매번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서울에서는 틈날 때마다 모든 IOC 위원들에게 지지를 호소하는 편지를 쓰거나 전화를 걸었다. 한 위원에게 10여 차례 통화를 시도한 적도 있었다. 개개인에 맞춰 편지의 내용을 전부 다르게 하는 정성도 보였다.


기업 제쳐놓고 올림픽 유치에 매진한 CEO 3인 

대중 앞에서 처음으로 눈물 보인 이건희 IOC 위원
평창동계올림픽 유치가 확정되는 순간 현장의 한국 관계자들은 약속이나 한 듯 손을 번쩍 들고 환호했다. 그 순간 삼성그룹 회장인 이건희 IOC 위원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어떠한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대중 앞에서 눈물을 보인 것은 처음이었다. 자식을 잃은 아픔에도, 특검을 거쳐 구속되는 순간에도 그는 대중 앞에서 눈물을 보인 적이 없었다. 이 위원의 눈물에 그를 수행했던 최지성 부회장 등 삼성 최고경영진조차 깜짝 놀랐다. 당시 이 위원은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이었다. 이 위원은 삼성 경영보다도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에 더 신경을 썼다고 한다. 110명의 IOC 위원 대부분을 1대 1로 만났으며 어떤 위원은 세 번 이상 만나기도 했다. 이 위원은 11차례 출국해 170일을 해외에 머물면서 21만 킬로미터를 이동했다. IOC 위원을 식당에서 만날 때면 미리 해당 위원의 이름을 새겨 넣은 냅킨을 준비해 상대를 감동시켰으며, 저녁식사를 약속했던 한 위원이 “다른 일정이 생겼다”며 약속을 취소하려 하자 “아무리 늦어도 좋다. 기다리겠다”고 한 뒤 2시간 가까이 기다려 결국 만났다고 한다. 그의 올림픽 개최에 대한 집념을 잘 보여주는 일화이다.

IOC 위원 80명 이상과 친분 다진 박용성 대한체육회 회장
두산중공업 회장인 박용성 대한체육회 회장은 재계에서도 알아주는 십전팔기의 사나이다. 한 번 마음먹은 일은 이루어내야 직성이 풀리는 그의 면모는 이번 평창 유치에서도 여실히 발휘됐다. 박 회장은 평소 “평창동계올림픽 유치가 나의 체육계 경력 30년의 절정”이라는 말을 자주 해왔다. 그만큼 평창 올림픽 유치에 힘을 쏟았다. 더반에 도착한 박 회장이 “이번에 동계올림픽 유치에 실패한다면 바다에 빠져 죽겠다”고 말했다. 그의 열의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박 회장은 이번까지 세 번 모두 유치전에 참여했다. 2003년과 2007년에는 IOC 위원이자 국제유도연맹 회장 자격으로, 이번에는 대한민국 체육계의 수장으로 전면에 나섰다. 그는 2002년부터 2007년, IOC 위원으로 활동할 당시 다른 위원들과 맺었던 친분을 한껏 활용했다. 또 국제 체육기구와 스포츠 행사에 최대한 참석해 IOC 위원의 90%를 만났고 지난 6월 한 달 동안 하루에 한 국가씩을 방문해 평창을 알렸다.

PT 개인과외로 ‘무대 울렁증’ 극복한 조양호 유치위원장
한진그룹 회장인 평창동계올림픽 조양호 유치위원장은 2009년 9월 “국가의 심부름꾼 역할을 하겠다”며 유치위원장직을 수락한 이후 지금까지 올림픽 유치에 다른 어떤 일보다 열을 올렸다. 조 회장은 해외를 돌며 IOC 위원들을 일일이 만나 평창이 두 차례나 동계올림픽 유치에 실패한 원인을 직접 들었다. 그의 노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조 회장은 IOC 위원들에게 평창의 장점을 알리기 위해서는 프레젠테이션 능력이 중요하다고 판단해 스피치 트레이닝 전문가를 만나기 위해 영국까지 날아갔다. 여기에 온화하고 세심한 성격은 IOC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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