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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희로애락 겪고 난 후…김청, 인생은 ‘여전히’ 아름다워
삶의 희로애락 겪고 난 후…김청, 인생은 ‘여전히’ 아름다워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1.09.14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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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쩜 이리도 소녀 같을까. 세련되고 도도한 외모와 달리 평소의 그이는 너무도 순수하고 맑았다. 그러다가도 사진촬영을 위해 셔터를 누를 때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능숙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모습을 보니 ‘아, 역시 천생 연기자구나’ 싶다. 김청의 완숙한 매력을 한껏 드러낸 사진촬영을 마친 후, 다시 소녀 같은 일상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이와 마주했다.

우여곡절 끝에 연기 인생 30년 맞아
최근 드라마 <보스를 지켜라>에서 부유하면서도 속물근성을 가진 회장 사모님 역할을 맡아 열연 중인 김청. 외모에서 풍겨 나오는 도도함 때문일까, 30년이라는 시간 동안 연기를 하며 유독 부유하면서도 차가운 역할을 많이 맡았다. 그러다 보니 오해도 많이 받았던 것이 사실.
“제 첫인상을 보고 쉽게 다가오지 못하는 분들이 많으세요(웃음). 그러다 친해지면 다들 이렇게 털털할 줄은 몰랐다고 하시죠. 그런데 처음부터 착한 인상을 줘서 실망을 시키는 것보다 차라리 ‘알고 보니 괜찮네’가 나은 것 같기도 해요(웃음).”
1981년 미스MBC 2위로 선발되어 연기자로 데뷔한 김청. 미스MBC는 1981년 MBC 창사 20주년기념 행사로 실시했던 미인대회다. 당시 김청과 함께 선발된 미스MBC 동기로는 배우 이휘향, 김혜정, 홍진희 등이 있다.
그렇게 연기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1986년, 그이의 배우 인생을 뒤바꿀 만한 대작을 만나게 된다. 바로 김수현 작가 극본의 드라마 <사랑과 야망>. 당시 <사랑과 야망>은 약 70%라는 어마어마한 시청률을 기록할 정도로 거의 전 국민의 안방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던 대작이었다. 그 드라마를 통해 김청은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그렇듯 화려하게 연기자로서 토석을 다져가는 듯했지만 그 사이 남모를 우여곡절도 많았다. 나이도 어리고, 사회생활도 처음이라 낯을 많이 가렸는데 선배들에게는 그 모습이 좋지 않아 보였던 것. 왕따 아닌 왕따(?)를 당해 혼자 도시락을 먹으며 눈물을 훔쳤던 기억도 있다.
“지금은 절친한 친구가 된 배우 이미영 씨가 그래요. 저보고 그때는 진짜 재수 없었다고요(웃음). 지금 돌이켜보면 외동딸로 엄마의 사랑만 듬뿍 받고 자랐으니, 사회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랐고 여러 모로 서툰 점이 많았던 것 같아요.”
그 후로도 김청은 배우로서 끊임없이 작품 활동을 이어왔지만 2005년 또 한 번의 위기를 겪었다. 당시 그이가 입주자 대표로 있던 오피스텔의 부실시공 문제와 관련해 시공회사와 갈등이 있었고, 시공회사 측은 김청이 공사 책임자를 감금하고 폭행했다는 허위 주장을 편 것. 결국 무혐의 처리가 되었으나 그때 역시 마음의 큰 상처를 입고 잠시 한국을 떠나 공백 기간을 가졌다.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세상은 나에게만 손가락질을 하니 더 이상 살고 싶지가 않을 정도로 괴로웠어요. 그때 한국을 떠나 잠시라도 혼자만의 시간을 갖지 않았다면 저는 지금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몰라요. 속세와 떨어져 지냈던 그 시간 동안, 제 스스로 마음을 다잡으며 좀 더 강인한 사람이 된 것 같아요. 결국에는 좋은 약이 됐던 셈이죠.”
아픔 겪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따뜻한 사랑 꿈꿔
어느덧 쉰이 되었지만 그이는 아직 솔로다. 한 차례 아픔을 겪은 적이 있지만 신혼여행을 떠난 후 3일 만에 돌아와 헤어졌기 때문에
‘이혼’이 아니라 ‘파혼’이라는 말이 더욱 적절할 듯하다. 짧은 신혼여행 기간 동안 그이를 먹이지도 재우지도 않고 노느라 바빴던 남자를 보고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직감적으로 들었고, 더 큰 불행이 닥치기 전에 관계를 정리하기로 마음먹은 것. 사실 당시 김청은 사랑했던 사람이 따로 있었는데 그와 헤어지고 나서 때마침 다가왔던 사람과 섣부른 결정을 내렸던 것이었다. 그때의 상처로 한때는 우울증 약을 복용했을 뿐 아니라 그 후 1년간은 절에 들어가서 속세와 모든 연락을 끊고 지냈을 정도로 그이는 마음이 많이 여리다. 아직도 그 아픔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새로운 사랑에 대한 꿈만큼은 버리지 않았다.
“푸근하고 자상한 사람과 사랑받는 여자로서의 인생도 한 번 살아보고 싶어요. 예전에는 남자를 볼 때 겉모습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저 착하고 따뜻한 사람이면 참 좋을 것 같아요. 그런 사람과 편안한 여생을 보내고 싶은 꿈은 아직도 진행형이에요.”
그이는 사랑이란 ‘아낌없이 줄 수 있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상대를 위해 자신의 손해나 희생쯤은 기쁘게 감수할 수 있는 사람, 그렇게 마음이 넉넉한 사람이야말로 진짜 사랑을 하고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저희 어머니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일생을 남편 없이 혼자 지내고 있잖아요. 둘이서도 충분히 행복하기는 하지만 남편이나 아빠가 있는 가정의 행복에 대한 빈자리는 늘 있으니까요.”

생각하면 눈물부터 나는 이름 ‘어머니’
김청의 어머니는 18세에 그이를 낳고 지금까지 수절하며 혼자의 몸으로 꿋꿋이 살아왔다. 어머니의 나이 17세에 군인이었던 그녀의 아버지를 만났는데 띠동갑도 넘는 나이 차이로 집안의 반대에 부딪쳐 결혼식을 올리지 못했다. 김청이 태어나고 100일쯤 지났을 무렵, 그이의 아버지는 딸을 보기 위해 본가가 있던 서울에서 밀양까지 내려오던 중 교통사고로 운명을 달리 했다. 그렇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한참 후 어머니와 아버지는 영혼결혼식을 올려 비로소 온전한 부부가 되었다는 슬픈 사연도 고백했다.
“저희 어머니는 정말 대단하신 분이에요. 한평생을 ‘여자’가 아닌 ‘어머니’로서의 삶만 살아오신 분이에요. 제가 지금껏 어려운 일을 이겨낼 수 있었던 단 하나의 이유는 바로 어머니예요.”
이제는 함께 나이를 먹어가는 모녀는 여가 시간이 생기면 영화도 보고 맛있는 것도 먹으러 다니고 자주 데이트를 한다. 때론 친구 같기도 하고 애인 같기도 한 어머니가 있어 적적한 삶에 작은 행복을 누리고 있다는 그이다.
“어머니가 한 번씩 ‘나 죽으면 너는 어떡하니’라는 말씀을 하세요. 그럴 때마다 그런 소리 하지 마시라고 화를 내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이 너무 아프더라고요. 제가 어머니처럼 평생 혼자 외롭게 살아갈까봐 염려하시는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니까요.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사랑을 찾아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많이 아팠던 만큼 더욱 성숙해진 김청. 그이가 바라고 꿈꾸는 그 소박한 행복이 하루 빨리 그이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채워주길 진심으로 바라본다.

 

 

 

“비가 올 때 우산을 쓴다고 빗물을 모두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듯 언제나 행복할 수만은 없는 것이 인생, 기쁨도 슬픔도 아픔도 이제는 좀 더 의연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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