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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의 연약함 속에서도 늘 순종하고 베풀던 삶 고(故) 하용조 목사의 일생을 회고하다
육신의 연약함 속에서도 늘 순종하고 베풀던 삶 고(故) 하용조 목사의 일생을 회고하다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1.09.14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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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그가 좋아했던 ‘열린 예배’처럼, 지난 8월 4일 온누리교회 서빙고 본당에서 열린 고(故) 하용조 목사의 장례식에는 수많은 기독교 관계자들과 교인 7천여 명의 눈물과 웃음이 공존했다. 이제는 세상에서 다시는 볼 수 없는, 한국 기독교계의 개혁과 발전에 큰 획을 그은 그를 추모하며 눈물을 자아내는 한편 이제는 더 이상 힘들어하지 않고 천국에서 쉴 수 있을 것이라는 지구촌교회 이동원 원로목사의 말에 교인들의 표정에도 한결 편안한 미소가 감돌았다. 지구촌교회 이 목사는 고인의 오래된 친구로 이날 발인 예배의 설교를 맡았다. ‘당신은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제목의 설교로 고인을 애도한 이 목사는 “하 목사님은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람이었다”며 “꿈이 그를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었으며 꿈을 먹고, 꿈을 심고, 꿈을 나누고, 꿈을 남기고 떠났다”고 말하며 고인의 넋을 기리고 교인들을 위로했다. 함께 참석한 할렐루야교회 김상복 원로목사와 사랑의 교회 오정현 담임목사 역시 “하용조 목사님은 육신의 연약함을 모두 초월하신 분이며, 교단과 신학의 벽을 뛰어넘어 모든 이와 동역, 참된 자유를 누리셨던 분”이라고 고인을 회고했다. 수많은 교인의 추모의 물결 속에 고 하용조 목사의 유해는 발인 예배 이후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 궁촌리 온누리동산으로 향했고, 간략한 하관 예배 후 영면에 들었다. 유족으로는 부인 이형기 씨와 자녀 하성석, 하성지 남매가 있다.

선교의 사명을 품고 교회 개혁의 지평을 열다
고 하용조 목사는 1946년 평안북도 진남포에서 출생, 한국전쟁을 거치며 전남 목포로 피난을 온 실향민이다. 목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건국대에 진학, 한국대학생선교회(Campus Crusade for Christ, 이하 CCC)에 입문했다. CCC 활동을 하면서는 서울 쪽방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밤새 쓴 크리스마스 카드를 한 명 한 명에게 전해줄 정도로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었다는 일화는 지금도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만든다. 이렇듯 대가 없는 사랑과 나눔을 전달하며 CCC에서 7년간 간사로 활동한 그는 1972년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에 입학, 1976년 목사 안수를 받게 된다. 그때 세우게 된 것이 바로 ‘연예인교회’인데, 목사 안수를 받기 전 코미디언 구봉서나 가수 윤복희 등 배우, 코미디언, 가수와 함께 했던 성경공부 그룹이 그 시초였다. 그의 끊임없는 전도활동으로 연예인교회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해갔고 목사로서 그의 입지 또한 높아져갔다. 연예인교회 예배당을 완공할 무렵이었을까. 지병이 점점 악화되어 간경화 판정을 받게 된다. 결국 연예인교회를 목사직을 사임하고 치료와 휴식을 위해 영국으로 건너갔다. 사실 영국에서도 그는 치료와 휴식보다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선교를 이어갔다. 결과적으로 영국에서의 시간은 사역자로서의 그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생전 그는 영국에서 있었던 일화를 소개하며 ‘신앙의 겉치레’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영국에서 하 목사 가족은 지난 7월 타계한 ‘개신교계의 교황’으로 불리는 영국 성공회의 존 스토트 신부
(성공회는 개신교에 속하나 목회자를 신부라고 칭한다)가 이끌던 런던의 한 교회에 다녔다. 한 번은 스토트 신부가 하 목사를 불렀는데, ‘러브레터’라며 봉투 하나를 건네더란다. 그 안에는 돈 50파운드가 들어있었는데 이는 당시 스토트 신부가 쓴 책의 저작료 중 일부였고 가난한 유학생이던 하 목사에게 책 살 돈을 전해준 것이었다. 그때 하 목사는 낯선 동양인인 자신에게 대가없는 나눔을 베풀던 스토트 신부의 진심 어린 마음에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할 정도로 가슴 뜨거운 뭉클함을 느꼈다. 또 100년이 넘는 허름한 건물에서도 많은 신도들이 아무 불평 없이 예배를 드리는 영국 교회의 모습을 보고서는 ‘신앙의 겉치레’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그 후 하 목사는 겉치레 없는, 진정성과 진심만이 오가는 고국에서의 새로운 교회 문화에 대한 꿈을 키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4년간의 영국생활을 접고 고국으로 돌아온 하 목사는 1985년 서울 용산구 서빙고동에 ‘온 세상을 위한 교회’라는 뜻의 온누리교회를 세우게 된다. 온누리교회는 오늘날 한국 기독교계의 새로운 문화를 불러일으켰다고 평가받을 만큼 대형교회로 성장했으나 당시만 해도 신도라고는 열두 가정밖에 없을 정도로 작은 교회였다. 그 후 25년이라는 시간 동안 온누리교회는 급격하게 성장하기 시작했고 현재는 교인만 7만5천여 명에 달한다. 서빙고동 본당을 비롯해서 양재, 부천, 수원, 대전 등 전국에 9개의 교회가 있으며 중국과 오세아니아 지역으로 28개 비전 교회를 세울 정도니 국내에서도 손꼽히는 대형교회다. 사실 하 목사가 교회를 세웠던 당시 한국의 기독교문화는 상당히 미숙한 상태였음에도 온누리교회가 그 짧은 시간 동안 이와 같은 성장을 할 수 있었던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먼저 그는 소수의 교인들만이 예배를 드리는 곳이라는 교회의 이미지를 탈피, 문화를 읽는 탁월한 안목으로 교회의 문턱을 낮췄다. ‘두란노서원’이라는 기독교 출판사를 통해 많은 기독교 정기간행물을 출판하며 복음주의운동의 창구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CCM(현대기독교음악)을 교회 예배에 도입, 이를 한국 교회 전체에 널리 전파해서 감정이 메마른 현대인의 가슴 문을 두드렸다. 올해로 설립 30주년을 맞는 두란노서원은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과 같은 기독교신자뿐 아니라 일반 독자에게도 많은 호응을 얻었던 베스트셀러를 출간하는 등 대표적인 기독교서적 발행 출판사로 자리매김했다.
또 영상과 선교를 접목시켜 위성방송을 통해 전 세계에 전파하는 복음 활동도 활발하게 이어갔다. 결국 전 세계에 1천220여 명이 넘는 선교사를 전파했고, 그의 세계적인 선교 업적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이 바로 일본에서 있었던 ‘러브 소나타’다. 전 국민 중 기독교 인구가 1%도 안 될 정도로 기독교 복음의 사각 지대로 불리던 일본에서 한류 연예인과 여러 퍼포먼스를 통해 일종의 문화전도집회였던 ‘러브소나타’를 올해까지 수차례 개최했던 것. 이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일본 기독교문화에서도 역사에 남을 새로운 시도이자 신선한 변화였다.

30년 동안 병마와 싸워오면서도 굽히지 않은 신념
생전 그가 늘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있다. 설교할 때가 가장 행복하며 선교야말로 인생의 사명이라는 말이다. 그의 그러한 굳은 신념은 병마도 꺾을 수 없었다. 사실 질병은 그의 오랜 친구였다. 대학교 3학년 때 폐결핵을 앓은 후 약의 부작용으로 당뇨, 간염까지 얻게 되고 이는 신부전증과 간경화를 불러왔다. 2005년까지는 다섯 차례 정도 간암수술을 받았으며 이후 2008년에도 횡경막 부위에 간암 세포 전이가 의심되어 대수술을 받기도 했다. 죽을 고비도 수차례, 결코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설교나 선교를 할 수 있는 몸 상태가 아니었다. 하지만 병마와 죽음 앞에서도 언제나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혈압이 급격히 떨어져 설교 도중 단상에서 내려오는 한이 있어도, 의자에 의지한 채 설교를 해야 하는 한이 있어도 목사로서의 사역활동을 멈추지 않고 이어갔다. 오히려 자신이 병과 싸워서 이길 수 있었던 비결이 바로 사역활동이며 선교라고 말하는 그의 눈빛은 어느 누구보다 뜨거웠다. 생전 그가 한 고백에선 고통과 아픔마저 감사와 축복으로 승화시킨 흔들림 없는 신념을 느낄 수 있다.
“하나님은 병이라는 고난의 풀무 불에 집어넣어 연단하셨어요. 내가 교만할 것을 아시고 바울의 가시처럼 질병을 꽂아 놓으셨죠. 저는 병이 도지면 꼼짝 못합니다. 하지만 병 때문에 설교를 못한 적은 없었어요. 병과 설교는 언제나 동행합니다.”
이렇듯 그는 아픈 몸을 이끌고도 목사로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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