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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 되새기다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 되새기다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1.09.16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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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47번 국도를 따라 조금 들어가면 지하철 4호선 대야미역이 나온다. 대야미역을 지나 수리사 방향으로 2km 더 들어가면 갈치 저수지가 낮게 펼쳐져 있고 그곳을 따라 우회전하면 소박한 글씨체로 속달마을 초입을 알려주는 표지판이 보인다. 속달마을이라는 간판이 보이면 아스팔트길 대신 고향의 정취가 물씬 느껴지는 흙길을 달려야 한다. 마을 어귀를 지나 좁고 울퉁불퉁한 길을 오르면 500년의 역사를 가진 동래정씨 동래군파 고택이 보인다. 고택에서 거주하며 건물을 관리하고 있는 둘째, 셋째 동생들과 함께 수시로 들러 관리를 하고있는 17대 종손 정성수(75) 씨와 종부 김연자(71) 씨. 고희를 훌쩍 넘긴 나이, 최근에는 허리와 무릎 관절이 좋지 않아 거동마저 불편하지만 부부는 종택을 돌보는 데 시간과 정성을 아끼지 않는다.
“종손으로서 종택을 돌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원래 종손이 할 일은 조상님들의 산소를 잘 지키고 제사를 잘 지내며 일가친척들과 화목을 도모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선조들이 가르쳐주신 전통과 정신을 이어받아 그것을 따르고 실천하도록 노력하며 평생을 살고 싶습니다.”
고택은 우리나라 역사의 증인과 같다
동래정씨 동래군파 고택은 조선 중기 문신 정광보가 이 마을에 들어오면서 지은 건물이다. 현재의 건물은 안채, 큰 사랑채, 작은 사랑채, 광채, 마방채로 구성된다. 안주인이 생활하면서 집안 살림을 맡았던 안채는 ‘ㄱ’자 형이고 사랑채, 광채에 둘러싸여 있는 형태로 자리 잡고 있다.
사랑채는 큰 사랑채와 작은 사랑채로 구분되며, 큰 사랑채는 바깥주인이 생활을 하면서 손님을 맞이하는 개방된 공간으로 규모는
11칸, 옆면이 2칸이고 형태는 ‘ㅡ’자형을 갖추었다. 큰 사랑채 외부의 구성은 출입을 위한 툇마루와 조망을 위해 한단 높이에 설치된 누각 형태의 누마루가 있다. 큰 사랑채 상부는 마루방이며 하부는 부엌을 이루는 2층 구조이다. 내부의 구성은 행사청, 마루방, 방 2칸과 쪽방 2칸, 광으로 이뤄져 있다.
작은 사랑채는 방과 툇마루 그리고 별도의 부엌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방채로 불린 바깥행랑채에는 농기구 저장고인 광과 말을 매어 기르던 외양간이 있고 솔거 노비를 위한 방과 군불용 부엌, 툇마루가 설치되어 있다. 광채에는 귀중품을 보관하던 수장고와 식량인 곡물을 저장하던 광, 화장실 등이 설치되어 있다. 전체적인 건물은 간략한 구조인 민도리집(기둥이나 벽체 윗부분이 소로 없이 도리와 장여만으로 된 한식 주택)으로 지었지만 사대부 주택의 구조를 지니고 있고 난간을 두른 누마루 등은 조선시대 민가 건축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정성수 씨는 취재진에게 소담한 매력이 있는 고택의 역사적 의미도 설명해주었다. 고택은 화려한 대저택은 아니었지만 우리나라 역사의 여러 가지를 오롯이 담고 있었고, 그러한 사실은 기와 한 장도 허투루 보지 않게끔 숙연하게 만들었다.
“종가의 건물은 외부에서 보면 일반 민가처럼 보이지만 조선 후기 살림집의 모습을 잘 보여줘 역사적으로 의미가 깊습니다. 고택의 작은 사랑채와 큰 사랑채는 선비들과 높은 어른들이 생활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사랑채 내부에 진입하려면 꼭 다른 방을 거쳐 들어오도록 설계되어 있는데 이는 사랑채를 쓰는 어른의 일신상 안전뿐 아니라 추위와 더위에 대한 온도 변화를 최소화하도록 한 배려였습니다.”
고택은 마을 중심에서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해 있다. 이는 고택이 마을에서 다양한 의미를 지닌 곳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종가에서는 중국 청나라시대 원세계가 쓴 현판과 추사 김정희가 쓴 현판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러한 것을 보면 종택이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선비들에게 사랑을 받은 곳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종가에는 현대문학의 시발점이 되었던 문예지들도 남아 있습니다. 이는 문인들이 사랑할 정도로 글을 쓰기에 적합하고 아름다운 곳임을 증명합니다. 이 외에도 종가에서 발견된 것 중에는 역사적으로 가치를 띤 것이 많은데, 전문가들이 추측하기로는 종가가 6.25전쟁 중에 아군과 적군이 혼전하는 상황에서 지휘소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더욱이 6.25전쟁 중에도 고택이 소실되지 않고 현존하고 있어 역사의 증인과도 같다는 평가입니다.”

 

시가 100억원 상당의 부동산 무상 기증
고택에 도착하면 소담하게 둘러친 담장과 억수같이 퍼붓는 장대비에도 꺾이지 않고 꼿꼿이 서 있는 풀포기가 눈에 띈다. 옳은 것에는 의지를 다하고 그른 것에는 눈길조차 두지 않던 그 옛날 선조들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동래정씨는 조선시대에 정승만 13명을 배출하고 최고의 인격과 학식을 갖춘 사람만이 오를 수 있는 대제학이 2명이나 있는 명문이다. 정광보는 조선 세조 때의 문신이며 뛰어난 서예가였던 동래군 정난종의 큰아들. 정광보의 동생은 조선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정광필이다. 정광보·광필과 그 자손들의 묘도 종택 뒷산에 모셔져 있다. 20세기 대표적인 국학자인 위당 정인보 선생도 이 집안사람이다. 정인보 선생의 아들인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을 비롯해 정진석 청와대 정무수석, 정동영 민주당 최고의원 등이 매년 시제(음력
10월에 5대조 이상의 조상 무덤에 지내는 제사) 때마다 모두 종택에 모인다고 한다.


집안의 큰 어른 중에서 정광필에 대한 미담은 지금까지도 종가에서 전해지는데, 정광필이 이조참의로 있다가 충청도 아산으로 유배를 갔을 때 새벽마다 싸리비를 들고 관청 앞 세 개의 문 앞을 쓸었다고 한다. 주위에서는 정3품 당상관이 천한 종들이 하는 일을 한다며 말렸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이런 정광필은 자신보다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너그러이 보살펴 늘 존경을 받아왔다고 한다. 그러한 면면은 동래정씨 집안의 가풍이 되어 대대로 내려져왔다.
정성수 씨의 아버지인 16대 종손 정운석 옹과 자녀인 9남매는 지난 5월 3일 18대째 내려오는 고택과 인근 토지 1만8,176m²(약 5천500평)을 문화유산 보존 민간 기구인 문화유산국민신탁에 무상 기증했다. 집과 땅을 합치면 공시지가 35억2천만원(시가 100억원)의 부동산 소유권을 넘긴 것이다.
가족들은 종택 일대가 군포시의 재개발 계획에 편입되자 토지 보상금을 포기하고 기증을 결심했다. 대대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땅이 없으면 종가도 온전히 보존될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가족들은 고택과 인근 토지를 내놓아 친환경 생명농업을 실천하고 농촌 공동체를 이루며 살자고 뜻을 모았다.
가족들의 마음이 이같이 모아질 수 있었던 이유는 아버지 정운석 옹이 살아온 삶에서 찾을 수 있다. 종택의 사랑채는 134년 전 2년여에 걸쳐 지어졌는데 당시에는 흉년이 심해 밥을 굶는 농민들이 많았다. 정운석 씨는 사랑채가 지어지는 동안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굶주린 사람을 위해 밥을 지어주었고 고마움을 느낀 사람들은 틈이 나는 대로 사랑채 짓는 것을 도왔다고 한다. 또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기 전 경기도 군포시와 안산시에 한국전력의 전기를 공급 받는(송배전선망을 설치) 사업에 적지 않은 액수의 사비를 털어 지역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개인보다 공동체를 생각한 집안 어른의 큰 뜻은 자녀들에게 올바르게 전해졌다. 정성수 씨는 “형제 중 단 한 명도 기증에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며 가족의 선택을 자랑스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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