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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논산 광산 김씨 사계종파 염수재
충남 논산 광산 김씨 사계종파 염수재
  • 관리자
  • 승인 2011.10.12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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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을 뛰어넘어 예를 이어가는 곳
충남 논산 광산 김씨 사계종파 염수재
조선시대 명문가의 하나로 꼽히는 광산 김씨 가문. 충남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에 자리한 염수재는 사계 김장생의 재실(齋室)이자 사계종파의 종택으로 알려져 있다. 전통을 지켜가며 조선시대 선비정신을 이어온 종가의 면면을 들여다 보았다.



예부터 명문가의 선산이나 사당 인근에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세운 재실이 자리를 잡고 있다. 재실은 문중의 공유 재산이지만 보존 책임자는 대대로 종손이나 직계 장손이 맡아왔다. 오래전 재실은 시향제나 묘사를 준비하는 곳이었다. 또한 제향과 관련된 제반 문제를 의논하던 종회 장소이자 때에 따라 문중회의가 이뤄졌기에 대를 이어 그 중요성이 강조되는 곳이었다.
충남 논산은 다른 곳에 비해 재실이 잘 보존되어 있는 지역이다. 논산에 있는 대표적 재실로는 광산 김씨 사계종파(문원공파) 염수재를 비롯해 광산 김씨 의정공파 재실, 여흥 민씨 위양공파 재실, 파평 윤씨 문정공파 재실, 함평 이씨 함은군파 재실 등이 있다.
서울에서 차로 세 시간여를 달리면 충남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에 위치한 광산 김씨 사계종파 염수재에 다다른다. 국도에서 사계선생유적지 입구라는 푯말을 지나 이어지는 농로를 따라 가보면 이 일대가 광산 김씨의 유적지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길 끝에는 조선시대에 연안 이씨, 달성 서씨와 더불어 3대 양반으로 불린 광산 김씨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재실이자 사계파(문원공파·文元公派)의 종택인 염수재(念修齋)가 자리를 잡고 있다.
본래 사계의 종손은 대대로 서울 사대문 안에서 살았으나 일제 침략 당시 연산으로 낙향했다. 집이나 재산을 모두 서울에 둔 채 서둘러 내려오느라 논산의 재실을 거처로 삼은 이후로 내내 지금까지 종손들이 재실에서 살고 있다.



예학을 집대성한 사계 김장생의 숨결이 담긴 고택
사계 김장생은 조선시대 유학에서 영남학파와 쌍벽을 이룬 기호학파의 태두로 예학을 집대성했다. 율곡 이이의 제자이자 송시열의 스승인 그는 처음에 구봉 송익필에게 예학을 배우고 후에 이이로부터 성리학을 배워 예학과 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김장생은 400년 전에 절하는 예법을 그림으로 정리했으며 예학자로는 유일하게 성균관 대성전에 모신 우리나라 18현에 포함되어 있다.
김장생의 예학은 양란 이후 혼란해진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아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당쟁과 이괄의 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국가적 위기에 처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개혁과 민생 회복이 절실하던 때이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장생은 이념적 체계로서 예(禮)에 주목했다. 김장생은 예를 실천하기 위해 개인의 수신(修身)을 강조했다. 심성의 온전함을 지키면서 예에 맞게 행동하고 하늘을 우러러 조금이라도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예의 강조는 유교적인 가족질서 확립을 위한 노력을 이끌어냈으며 <가례(家禮)>를 고치고 보급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광산 김 씨는 일곱 명의 대제학을 배출했다. 특히 사계 김장생 한 사람의 자손에서 대대로 석학이 많이 나왔다. 숙종의 장인인 김만기와 아들 진규, 손자 양택이 연이어 대제학에 오른 것이 그것이다. 광산 김 씨 중에 사계가문, 사계 자손이라는 말은 모두 문원공 사계 김장생의 자손을 일컫는 말인 것이다. 오랜 세월 김장생의 예학 정신을 이어온 재실인 염수재는 산 아래 사계의 묘소와 함께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 위치해 있다. 오랜세월 이름을 떨친 예학자의 종택이라 하기에는 소박하다 싶지만 솟을대문에 붙은 붉은 편액의 효자문만으로도 예학을 지켜온 가문의 정신을 느낄 수 있다. 대문에 붙여놓은 홍살문은 사계의 5세손인 김재경의 효성을 기린 것으로 이러한 형태는 쉽게 볼 수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염수재는 정면 네 칸, 측면 두 칸의 팔작지붕을 올린 건물로 옛 모습을 거의 그대로 지켜오고 있다. 본채, 사랑채, 행랑채 등이 ‘ㅁ’ 형태로 이루어져 있고 뒤편에는 김장생 사당으로 이어지는 문이 있다. 이곳에는 13대 종부인 홍용기(88) 씨가 살고 있다. 종부가 열아홉 나이에 시집오던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규모의 한옥 두 채가 더 있었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식구가 줄고 관리가 힘들어 20년 전 두 채를 헐어 지금의 모습에 이르렀다.
과거에는 한 해에 차례와 제사를 모두 합치면 서른 번이 넘을 정도였고 일가의 발길도 줄을 이었다. 제사 때 마다 오는 손님도 100여명에 달해 염수재는 늘 북적였다. 이제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제사 손님도 많이 줄었지만 재실을 지키는 종부의 마음은 한결같다.
“조상이 있기에 내가 지금까지 있을 수 있는 거죠. 종부로 제사를 모시는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니 이곳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적이 없어요.”
50년이 넘는 세월동안 종부로 식구를 돌보고 그 많은 제사를 모시는 살림살이는 결코 쉽지 않았다. 20년 전까지만 해도 일가 사람들이 몰려들어 접빈객도 만만치 않았다. 집을 돌보고 농사를 짓다가도 손님이 오면 반갑게 맞이해야 하는 것이 종부의 역할이었다. 그 모든 일이 고되고 힘들다 생각할 법도 하지만 홍용기 씨는 종부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며 지금까지 종택을 지켜왔다. 집 안의 곳곳에 종부의 손이 닿지않은 곳이 없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아끼는 곳은 사당과 사랑채다.
“사랑채에서는 항상 어르신들의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왔어요. 가문의 정신이 그대로 살아 있는 곳이죠. 사당은 이 재실과 종택이 존재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고요. 가례의 틀을 세운 종가의 사당이니 무엇보다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봐야겠죠.”


새벽 제사를 지내며 전통을 이어가는 종부의 정성
홍용기 종부는 예나 지금이나 항상 새벽에 제사를 지낸다. 요즘 대다수 집안에서 저녁이나 자정 무렵에 제사를 지내는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제사 뿐 아니라 우리나라 가례의 틀을 세운 사계 선생의 종가인데 우리 손으로 그 전통을 허물 수는 없죠. 요즘은 후손들 편한 데로 모여서 제사를 지낸다지만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가문이 지켜나가야 할 정신이 있는 법이니까요. 예전보다 먹고 살기가 좋아졌다지만 조상을 모시는 정성은 그전에 비해 더 부족해진 것 같아 섭섭한 마음이 들 때가 많아요.”
20년 전만 해도 사계 김장생의 기제 때면 일가들은 마을 초입에서 버스를 내려 10리가 넘는 길을 걸어와야 하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어찌나 많은 자손들이 모였는지 종가의 기제를 마을 전체가 다 알 정도였다. 자손들은 종가나 다른 일가에 흩어져 잠을 자다가 새벽이 되면 제사를 모시러 사당으로 모였다. 종가의 대소사를 의논하는 날도 바로 이날이었다.


재실의 사랑채와 손님들이 왔을 때 묶고 가는 행랑채의 모습.

지금은 찾아오는 자손의 수가 많이 줄었지만 종부의 정성만큼은 여전하다. 제사 지내기 며칠 전부터 제수를 하나하나 챙기며 조상에 대한 마음가짐도 준비한다. 모든 것이 준비된 제사 당일에는 잠깐 잠이 들었다가도 새벽 2시 30분에는 어김없이 눈이 떠진다. 때문에 제사가 있는 날은 마음 편히 잠을 잔 적이 없다. 여름에는 그런대로 괜찮지만 한겨울에는 난방시설조차 없는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쉽지 않다. 하지만 종부는 지금껏 제사시간을 어긴 적이 한 번도 없다.
지금은 기력이 부족해 일일이 다 챙기지는 못하지만 과거만 해도 종부의 정성은 음식 준비에서도 드러났다. 제사 준비 외에도 명절이 오기 한 달 전부터 술을 담그고 조청과 엿을 고아 강정을 만들었다. 설날이면 집에 와서 일손을 돕고 가는 사람들은 가족이 함께 와 떡국을 먹고 가기도 했다. 당시 떡국을 만드는 데 사용하는 쌀만 한 가마니 정도였다. 세월이 흐른 지금도 모셔야 하는 상은 여전하지만 몇 해 전부터는 돕는 손길이 부족해 명절이 가까워지면 종부의 시름도 클 수밖에 없다.
제사와 명절 차례상에 관한 이야기는 가문에서 대대로 사용해온 백지병풍에 대한 내용으로 이어졌다. 가문에서는 제사 때마다 제상 뒤를 가리는 병풍으로 아무런 글씨도 적혀있지 않은 백지를 사용했다. 이는 훗날 글을 모르는 후손을 위한 선조들의 배려였다. 흔히 병풍이라고 하면 그림이나 좋은 붓글씨가 쓰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바닥의 돌이 십자로 놓여 있는 염수재 앞마당도 다른 종택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중앙에 돌로 만들어진 십자길에서도 가운데 길은 제사를 지낼 때 제관이 다니도록 표시를 했다. 제관이 아닌 사람이 지나갈 때에는 머리와 허리를 약간 숙여 예를 표해야 했다. 조상을 모시는 일을 평생의 의무와 책임으로 여겨온 정신이 집안의 면면에서 드러났다.
종부는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후손을 배려하며 전통을 지켜온 조상의 정신만큼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부모 자식 간의 연을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듯이 후손들 역시 조상을 모시는 것을 당연한 의무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상이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도 있을 수 없어요. 예부터 전해 내려온 선비정신이 옛 이야기처럼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현대에서 도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해요. 가족 간에 내리사랑과 위로 존중하는 마음, 화합하는 모습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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