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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고아, 거지왕초에서 시각장애인의 빛이 되기까지 실로암안과병원 김선태 병원장의 희망을 증명하는 삶
전쟁고아, 거지왕초에서 시각장애인의 빛이 되기까지 실로암안과병원 김선태 병원장의 희망을 증명하는 삶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1.10.12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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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서울 신당동의 기와집에서 태어난 소년의 어린 시절 추억 첫머리는 행복한 기억으로 시작된다. 다정다감하고 자애로운 부모와 할머니 슬하에서 부족함 없었던 생활. 그러나 한반도를 휩쓴 전쟁의 비극은 그런 행복한 소년의 어린 시절을 송두리째 쓰라린 상처로 뒤바꿔 놓았다. 폭격으로 불바다가 된 서울에서 소년의 집 역시 무사하지 못했고 철부지 소년은 하루아침에 집과 부모를 잃은 천애고아가 됐다. 불행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부모를 잃고 구걸로 연명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던 소년은 다른 전쟁고아들과 함께 허기를 달래기 위해 밭을 뒤지다가 불발탄이 터져 두 눈의 빛까지 잃고 말았다. 한순간에 세상이 암흑으로 뒤바뀌는 시련은 연약한 소년을 절망으로 빠뜨리기 충분했다. 시련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그 절망감과 외로움 때문에 삶을 포기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가혹한 운명. 그러나 소년은 절망의 바닥을 경험하는 순간에도 가슴에 품은 희망을 잃지 않았다. 처절한 시련이 시작되기 이전, 신앙을 접했고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그 끈을 놓지 않았던 덕분이었다. 삶이 더욱 혹독해지고 운명이 연이어 막다른 길로 몰아세울 때마다 그 끈은 더욱 견고하고 강한 힘으로 소년을 지탱하게 만들었다. 그러한 신앙의 힘으로 소년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뛰어넘어 가능성을 찾았고 꿈을 키웠으며 끝내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었다. 이후 소년은 성직자가 되었고 한국 최초의 시각장애인 교회와 안과병원을 설립했으며, 오늘날 수많은 시각장애인들에게 살아 있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있다. 바로 실로암안과병원 김선태 병원장의 이야기다.

거지왕초가 된 시각장애인 고아
“전쟁은 비참했어요. 서울 시내에 시체가 여기저기 놓여 있었고, 피난가면서 버리고 간 어린 아이들은 엄마를 찾으며 울어댔죠. 아마 많은 아이들이 폭격이나 병으로 죽어갔을 거예요. 어떤 경우에는 아이 엄마가 피난을 가면서 남의 집 앞마당에 아기를 묻고 가는 경우도 있었죠.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고 온통 불바다였어요.”
앞을 볼 수 있었던 어린 시절 기억 한편에서 전쟁의 광경을 되새기는 김선태 병원장의 표정은 사뭇 침통했다. 자신의 운명을 송두리째 뒤흔든 전쟁의 기억, 그리고 그 이후의 힘겨웠던 삶을 돌아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터. 그러나 김 원장은 이내 “그런 시련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내가 있다”며 예의 환한 웃음을 지었다.
“한순간에 부모와 두 눈의 빛을 잃고 나서 암담한 순간에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평소에 유난히도 저를 예뻐해 주었던 고모였습니다. 그러나 고모의 집이 있는 곳은 경기도 양주였죠. 어린 데다 눈까지 보이지 않았던 당시로서 그 먼 길을 가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도움을 요청해도 전쟁으로 시신들이 넘쳐나는 상황에서 어리고 눈먼 고아를 돌아보는 이는 없었다. 손으로 바닥을 더듬어 가며 풀과 논바닥에 고인 흙탕물로 허기를 채우며 길을 잡았다. 결국 살겠다는 신념 하나로 물어물어 고모의 집에 다다랐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이는 또 다른 시련의 시작일 뿐이었다. 그 자상했던 고모는 어렵게 찾아온 조카를 반기는 대신 “당장 죽어버려라”는 말로 그의 가슴을 찢어 놓았다. 그럼에도 살아남아야 했기에 어쩔 수 없는 더부살이를 해야 했던 그. 그 시절의 기억은 아찔하기만 하다.
“모진 학대를 당하면서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슬픔을 느꼈습니다. 때때로 이어지는 매질은 끊이지 않았고, 언젠가는 부지깽이와 도끼로 머리를 맞아 피를 흘리고 죽을 위기도 넘겼죠. 다행히 하나님의 보살핌 탓에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흉터만 남았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런 슬픔과 상처 때문에 오늘날의 제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후 그는 모진 학대를 견디다 못해 고모의 집을 도망 나와 거지 생활을 시작했다. 열 살의 눈먼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깡통을 들고 전국을 누비며 생을 연명하는 것뿐이었다. 하늘을 이불 삼고 땅을 베개 삼아 살아가는 와중에도 죽을 고비를 무수히 넘겼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김 원장은 기도를 했다. 동냥으로 얻어먹다가도 주일이 되면 종소리를 따라 교회를 찾아 예배를 했고, 동냥으로 모은 돈에서 새 돈을 추려 헌금을 하기도 했다.
“이상하게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구걸에 나서면 사람들이 먹을 것이나 입을 것을 선선히 내주더군요. 그래서 항상 다른 거지들 보다 얻는 게 많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살길이 무엇인가를 생각했죠. 거지들 세계에서도 구걸하는 구역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다른 구역의 거지가 오면 몰매를 맞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저는 그렇게 하는 대신 동냥을 해서 얻은 것을 나눠주기 시작했죠. 그렇게 하니 제게는 구역의 제한이 없어지더군요. 또 다른 동료 거지들이 보호해주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부터는 왕초로 세워줬어요. 그때 남을 섬기면 존경받고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을 배운 셈이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고 섬기러 오셨다’는 말을 떠올린 덕분이었습니다.”

배움에 길로 들어서서
부산에 터를 잡고 거지 생활을 하면서 그는 동료 거지들을 교회로 데리고 가며 주일 학교에서 성경공부를 하기도 했다. 그렇게 이어진 거지 생활 속에서 어느 날부터는 ‘이렇게 살다 죽으면 너무 허무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별달리 뾰족한 수는 없었다.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뿐이었다고 한다. 그런 그의 인생이 변화를 맞이하게 된 것은 거지 체포령에 걸려들어 아동보호소로 가면서 부터였다. 매일 같이 예배를 드리며 성경을 암송하는 그를 착실하게 본 보호소 원장은 그를 송도에 있는 맹아원으로 보냈고 김 원장은 그곳에서 점자를 배워 맹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그가 바라는 삶은 없었다. 그대로 있으면 그가 원하는 공부도, 성직자도 될 수 없었고 그저 안마사가 되는 길 뿐이었다. 결국 초등학교 과정을 마친 그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길을 택했다. 서울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싣고 서울맹학교로 떠났다. 그러나 그곳 역시도 그가 바라던 공부를 할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안주할 수 없었던 그는 도움을 구할 수 있는 곳을 수소문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우여곡절 끝에 한국에서 대를 이어 선교활동을 펼치던 서양인 곽안전(알렌 클라크) 선교사와 만난 그는 드디어 자신이 바라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곽안전 선교사님은 시각장애인 학생 한 사람을 키우기 위해 학비를 준비하고 계시던 중이었어요. 조건은 반드시 성경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죠. 선교사님의 도움으로 종로 2가의 영수학원에 등록할 수 있었고 중학교 시험을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목표로 하는 것은 장애인들이 다니는 학교가 아닌 정상인들과 함께 공부할 수 있는 중·고등학교였다. 몇 곳에 원서를 내고 기다리던 중 연락이 온 것은 후암동에 위치한 숭실중·고등학교. 학교장을 비롯한 다른 선생님들은 시각장애인인 그가 과연 정상 학생들과 공부를 할 수 있을지 반신반의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그는 학원에서 열심히 공부한 덕분에 어렵지 않게 시험에 통과할 수 있었다. 전쟁 이후 이어졌던 힘겨운 삶에 드디어 희망의 빛이 비추는 순간이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수많은 고난과 역경을 뛰어넘었던 그 순간을 그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초등학교 때 헬렌 켈러에 관한 내용을 읽고 크게 감동을 받았었죠.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세 가지 장애에도 불구하고 박사학위를 세 개나 받았다는 내용을 읽고 저도 열심히 공부해서 박사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했죠. 그러기 위해서는 땀과 눈물을 바치며 순교하는 마음가짐으로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상인들과 함께하는 공부는 그에게 몇 배나 많은 노력을 요구했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교회에 가 기도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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