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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 젊은 멘토 이지성 작가 ‘꿈꾸는 삶이 변화를 만든다’
우리 시대 젊은 멘토 이지성 작가 ‘꿈꾸는 삶이 변화를 만든다’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1.11.11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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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지성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진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의 출세작은 지난 2007년 가을 출간 된 자기계발서 <여자라면 힐러리처럼>이었다. 미국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의 성공 요인을 철저히 분석한 책이었다. 독자들의 폭발적인 반응은 출판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소위 대박이 난 것이다. 이후 <꿈꾸는 다락방>, <스물일곱 이건희처럼>이 연이어 베스트셀러가 되고 최근 <리딩으로 리드하라> 역시 200만 부 이상 판매되며 그는 출판계에 스타 작가이자 수많은 독자들의 멘토로 지목되고 있다.

꿈으로 극복한 악몽 같은 시간들
그에게는 무려 14년이라는 무명의 시간이 존재한다. 처음 작가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던 20대는 물론 지금 역시도 그의 배경은 우리 사회에 마이너에 속한 탓이다. 꿈도 없이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재수를 해서 지방 교대에 들어갔고 대학 2학년이 돼서야 비로소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 그로서는 생의 첫 목표였던 셈이다. 그러나 그 꿈과 자신이 처한 현실은 일치되지 않았다. “책을 읽고 글을 쓰기 위해 중퇴를 하겠다”는 그의 말에 돌아 온 것은 아버지의 빗자루였다. 결국 관심에도 없는 학업이었지만 그만 둘 수 없었다. 대신 그는 줄기차게 시를 썼다. 수십 군데의 출판사에 원고가 가고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채택되지 못했다. 그런 그를 주변에서는 온갖 욕을 섞어가며 멸시하고 비웃었다. 임용시험을 앞두고 치열하게 공부하는 학생의 눈에 작가가 된답시고 시만 쓰고 있는 그가 달가울 리 없었다. 결국 교대를 졸업하기는 했지만 학점은 2.2, 임용고시에 응시조차 할 수 없는 점수였다. 우직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미련하다고 해야 할까. 그는 다시 전북대 법대에 편입을 선택했다. 단지 군 입대를 좀 늦추고 작가 공부를 더 하기위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그런 와중에도 아들의 꿈을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1997년 시집 〈언제까지나 우리는 깊디깊은 강물로 흐르리라〉를 냈지만 서점에 풀어놓은 1천 부 조차 팔리지 않았다. 미루던 군대에 가서도 그의 꿈을 이루기 위한 작업은 계속됐고 그런 만큼 조직에 편입되기는 어려웠다. 꿈은 그때도 이뤄지지 않았다. 병장 말년,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임용고시를 본 것이 덜컥 턱걸이로 합격이 됐다. 당시 대거 이뤄진 교원 명예퇴직으로 인력이 모자란 탓에 응시기회를 얻은 덕분이었다. 그러나 초등학교 교사가 돼서도 자신의 꿈이 아니었으니 행복할 수 없었다. 그저 생계를 위해 일하는 월급쟁이에 다름이 없었다. 더구나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가 난 상황에서 그나마 월급조차 차압이 들어왔다. 갚아야 하는 빚은 4억원이 넘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퇴근 후 회식 대신 책을 읽고 필사에 매달렸다. 30대가 됐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가난은 더욱 그를 옥죄어왔고 그보다 더 절망적인 것은 오랜 시간 동안 노력했음에도 꿈은 이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때때로 좌절의 순간도 있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달동네 옥탑방에서 서민들의 허덕이는 삶을 보며 그들을 위한 글을 쓰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의 성공 키워드인 ‘자기계발서’ 작가가 되기로 한 것이다. 수천 권의 자서전과 평전을 읽고 필사하는 노력은 역시 계속 됐다. 불과 4년 전까지 그는 그러한 삶 속에서 꿈을 현실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등불 같은 사람
꿈이 현실이 되는 순간은 기적처럼 찾아왔다. <여자라면 힐러리처럼>이 대박을 터뜨린 뒤 그의 책은 연이어 독자들의 관심을 모으며 베스트셀러가 됐다. 가난을 비롯해 오랜 세월 발목을 잡았던 문제들이 한 번에 해결된 것은 물론이다. 그의 글이 독자들의 마음을 파고 든 이유는 자전적인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진정성 때문이었다. 그의 글을 통해 용기를 얻고, 삶의 희망을 다시 찾은 이들은 그를 멘토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조금 당황스러웠죠. 제가 좋아서 시작한 일이고 한편으로 당연히 사회에 어떤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있지만, 시대의 트렌드 탓에 작가 보다는 멘토로 부각이 되고 있네요. 사실 저는 멘토로 거론 되시는 분들에 비해 나이나 사회경험이 일천한데도 불구하고 자꾸 틀에 맞춰지는 면이 있으니까요.”
그에게 조언을 구하는 사람은 현실의 무게에 힘겨워하는 이들만이 아니다. 때론 누구나 알만한 기업가나 정치인들 역시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그렇게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그를 찾는 이유는 뭘까. 사실 그의 삶을 돌이켜 보면 여느 멘토와 같이 뛰어난 업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학벌이 좋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것들을 극복하고 꿈을 이뤘다는 점에서 차별점이 있다.
“우리시대 멘토라 불리시는 분들과 저는 완전히 다르죠(웃음). 그분들은 대부분 스펙도 화려하고 20대는 물론 그 이전부터 최고의 길을 걸어오신 분들이잖아요. 안철수 교수님만 봐도 20대부터 그야말로 대한민국 최고의 이력을 지니셨고요. 그런 분들과 어설프게 멘토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는 것은 영광이죠. 하지만 제 경우는 그런 스펙이 없어요. 굳이 이야기하자면 인생의 밑바닥을 심하게 경험했다는 것, 지옥 끝까지 내려갔다가 기어 올라온 경험이 있다는 거죠. 그리고 그 경험을 나 혼자만의 것으로 두지 않고 독자들에게 책을 통해 함께 가자고 이야기한다는 것이고요. 다른 멘토분들에게 사람들은 ‘존경’을 갖고 선망의 눈길을 보내지만, 제게는 ‘공감’을 하고 함께 울거든요. 그분들에게 저는 별보다는 등불 같은 느낌이라고 생각해요.”

세상을 바라보는 또 다른 관점
최근 ‘우리 사회는 공정한가’에 대한 정부의 여론조사 결과는 충격적이다. 국민의 73%가 ‘그렇지 않다’고 답한 것. 상당수가 20~30대의 젊은 세대들이라고 한다. 부모의 경제력에 의해, 혹은 학벌에 의해 출발선조차 동일하지 않는 시대를 거치며 그들 중에는 간혹 최악의 선택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러한 세태에 대해 이지성 작가는 다시금 자신의 경험을 들춰낸다.
그는 극단적인 생각에 사로잡힐 때면 ‘세상의 기준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을 봤다고 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캄보디아 빈민촌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던 한 여성은 강한 태양 빛에 실명 위기에 처해 한국으로 돌아왔음에도 다시 어려운 가정의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아마존 오지에서 30년 동안 선교활동을 하는 부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남편은 인슐린펌프를 달고 생활하고 아내는 폐암에 걸렸지만 부부는 한국에서 수술을 받고 다시 아마존으로 떠났다고 한다.
“지금도 전 세계에서 1초에 여덟 명의 아이들이 배고픔 때문에 죽거든요. 그런 아이들을 생각하면 조금 마음이 달라지지 않을까요. 돌아가신 기부천사 철가방 김우수 씨의 경우도 마찬가지고요. 그분이야 말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살았지만 아이들을 도왔잖아요. 저는 그게 진정한 인간의 삶이라고 생각해요. 요즘 우리 사회는 매일 TV에서 이상한 드라마가 나오고 안 좋은 뉴스만 나오다 보니 괴물 같은 삶만을 추구하는 것 같아요.”
세상이 성공으로 치부하는 삶의 방식을 그는 ‘괴물 같은 삶’이라고 정의했다. 자신의 지난 삶을 돌이켜 보면 대학이나 군대, 직장 등 각각의 조직에서 추구하는 목적과 늘 이견이 존재했다. 비록 그로 인해 힘겨웠지만, 그는 꿈을 따르며 살아온 자신의 삶이 오히려 정상이었다고 확신한다.
“어떠한 조직의 목표를 강요받는 상황에서도 조직을 이길 수 있는 것은 개인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나라도 거대 권력의 이너서클에서 기득권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하지만 조직은 생명력이 없어요. 반면 개인은 살아 있는 인격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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