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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의 강직한 정신 간직한 종가 충남 공주 경주 이씨 국당파 초려 이유태 종택
조상의 강직한 정신 간직한 종가 충남 공주 경주 이씨 국당파 초려 이유태 종택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1.11.11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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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사당으로 향하는 길에 위치한 용문서원 부설 전통교육원의 모습. 방학이면 전국에서 찾아온 학생들이 이곳에서 머물며 유학을 배운다.


치국경제에 힘을 쏟은 이유태 선생의 길을 엿보다
조선 후기 인조부터 숙종으로 이어지는 시절 동안 이름난 유학자이자 시무에 밝았던 정치사상가 이유태. 1607년 5형제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8세에 율시를 즉석에서 지을 만큼 조숙하고 총명했다. 열 살이 되던 해 부친을 여의었음에도 그는 슬퍼하고 곡함이 성인과 같았다고 전해진다. 뿐만 아니라 그 이후로 3년간 파와 마늘을 입에 대지 않았고 여막에서 슬피 울며 아버지를 추모하는 글을 지었다. 이유태는 열다섯 살이 되던 해 부친의 유언에 따라 처사 민재문에게 학문을 배웠다. 특히 송시열, 송준길 등과 각별한 관계를 맺었는데 이들 세 사람은 “만일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죄를 범하면 법적인 처벌을 모두 함께 받기로 하자”고 약속하여 서로의 허물을 살피고 선(善)을 권면했다. 뿐만 아니라 ‘살아서는 뜻을 같이 하고 죽어서는 후세에 전해짐을 같이 할 것’을 약속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유태는 송준길, 송시열, 윤선거, 유계와 함께 충청오현으로 일컬어졌다.
조선조 역사가 이유태를 기억할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는 <기해봉사(己亥封事)> 때문이다. 이것은 당시 국정전반에 걸친 정치개혁안을 담고 있는 상소문으로 당시 효정의 북벌의지 실현을 위한 방책으로 작성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이 봉사를 옮겨 쓰고 있는 동안 효종이 갑작스럽게 서거하면서 다음 왕인 현종 원년에 이르러서야 조정에 제출될 수 있었다. 그의 봉사를 두고 조정에서는 채택논쟁이 수년간 이어졌으나 끝내 배척을 당하게 되면서 이유태는 귀향하여 다시는 조정에 나서지 않기로 다짐한다. 이후 이조참판(吏曺參判), 대사헌(大司憲) 등이 제수되었으나 계속 출사하지 않았다.
환경이나 외압에 휩쓸리지 않고 소신을 지켜온 것은 이유태 선생뿐만이 아니었다. 일제 강점기 외세의 침입에 거세게 항거한 후손들은 재산의 상당수를 빼앗기고 옥살이 신세를 지기도 했으나 나라에 대한 충성과 올곧은 정신은 그대로 지켰다.
9대손 이철영은 1909년 일본 정부가 우리나라 국민들의 호적을 만들기 위한 명을 내리자 이에 항거하다가 경찰에 잡혔다. 그는 풀려났다가 다시 감금되기를 반복하며 10여 년간 감옥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는 등 일생을 조국과 민족을 위해 항쟁하다 1919년 53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쳤다. 시대와 처한 상황은 각각 다르지만 나라에 대한 충성심과 올곧은 정신이 몇 백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대대로 이어지고 있는 곳이 바로 경주 이씨 국당파 초려 이유태 종가다.

조상의 정신이 담겨 있는 종택의 면면
서울에서 세 시간 여를 달려 도착한 곳. 공주의 시내를 조금 벗어나니 산세가 마을을 안고 있는 듯한 모습의 고택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유태 선생의 종가뿐 아니라 주변에 고택 몇 곳이 줄지어 모여 있는 광경을 보고 있으면 누구라도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옛 시대에 도착한 듯한 기분에 휩싸이게 된다.
충남 공주에서 이유태 선생을 시조로 모시는 경주 이씨 국당파 종갓집은 나라의 발전을 위해 평생을 바쳐온 선생의 정신이 곳곳에 담겨 있다. 1977년에 복원된 종택 앞에 다다르면 바깥마당에 있는 뽕나무가 계절의 변화를 단번에 말해준다. 대문채, 사랑채를 지나 안채에 다다르면 집 한쪽에 나 있는 길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이유태 선생의 사당과 용문서원으로 통하는 길이다. 과거 이유태 선생이 여러 문인들을 가르치던 용문서재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는 여러 문인들이 이곳에 몰려와 이유태 선생에게 글을 배웠다고 해요. 마을에서도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곳으로 유명했죠. 과거의 정신을 현대에 그대로 이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5년 전 학생들이 유학을 공부할 수 있는 교육원을 세웠습니다. 여름이며 겨울방학이면 초등학생부터 중학생까지 아이들이 찾아와 예법과 조상들의 지혜를 배우고 돌아가죠. 학생들이 글 읽는 소리가 문 밖으로 들릴 때면 조상님들이 얼마나 흐뭇해 하실까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12대손인 이정우 씨는 이러한 노력을 두고 종가라면 당연히 지키고 이어나가야 할 것이라며 겸손함을 보였다. 종가라면 조상 대대로 내려온 전통을 현대에 알맞게 적용하여 사람들에게 널리 알릴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300년 간 지금의 자리에서 종택이 이어질 수 있었던 데에는 이러한 정신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 그는 고택과 서원을 찾아오는 많은 이들이 구석구석 마다 어린 이유태 선생의 정신을 느끼고 돌아가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이정우 씨가 고택에서도 특별히 아끼는 곳은 유물관이다. 가문의 정신이 오롯이 살아 있는 기록과 물건들이 모두 소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 이 유물관에 도둑이 들었을 때 그는 심적인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유물의 역사적인 가치 뿐 아니라 종손으로서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다행이도 피해는 없었지만 이후로 유물은 안전한 곳으로 옮겨두게 되었다.
“조상 대대로 내려온 유물만 해도 수백 점에 달해요. 가훈을 비롯해 상소문고(上疏文稿), 시필, 호패 등 종류도 다양하죠. 30여 년 전 고택을 복원할 때 유물관을 지었는데 10년 전부터 진품은 모두 공주대학교에 보관되어 있고 종택을 찾는 분들을 위해 이곳에는 견본품만 남겨두었어요.”

겸손하며 더불어 사는 것이 종손이 이어가야 할 몫
종택에서 유물관 못지않게 중요한 곳은 이유태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보통 종가에서는 1년에 한 번 사당제사를 올리지만 이유태 종가에서는 1년에 두 번 사당제사를 치른다. 그 외에도 5대손부터 내려오는 조상들의 묘제와 함께 4대 봉사, 설, 한식, 추석, 동지에 차례상을 올린다. 설 차례는 묵은세배, 참신례, 강신례, 현작, 삽시, 국궁, 사신례, 철상의 순서로 이뤄지며 동지 차례는 팥죽천신을 먼저하고 참신례 이후의 과정은 동일하게 이뤄진다. 설에는 보통 만두, 포, 떡만두국, 과일, 전, 동치미, 식혜, 약과, 홍어찜 등을 올리고 동지에 팥죽, 어회, 돼지편육, 포, 명태찜, 동치미, 식혜, 과일 등을 올린다.
“옛날에는 사시정제라고 해서 날을 받으면 풍악을 갖추고 손님을 초대해서 제사를 치렀지만 이제는 그렇게까지 하기가 힘들다보니 음식만 차려서 하고 있어요. 일부에서는 불필요한 차례는 생략하자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게 지내는 것이 종가가 실천해야 할 미덕이다”

경주 이씨 국당파 12대 종손 이정우 씨는 올해 봄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줄곧 흰 옷을 입고 지낸다. 그 옛날 조상들처럼 삼년상을 지낼 수는 없지만 마음으로 어머니를 늘 그려야겠다는 생각에서다.

 

고 말하지만 제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계속 이어갈 생각입니다. 조상을 기억하고 마음을 모으는 것이 후손이자 종손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역할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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