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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희숙 대한민국역사박물관장 '여성으로는 최초'
남희숙 대한민국역사박물관장 '여성으로는 최초'
  • 송혜란 기자
  • 승인 2021.09.08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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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나선형으로 발전, 인생도 마찬가지, 지금 힘들다고 포기하지 마세요”

학창 시절 역사 선생님이 보여준 고문서에 끌려 마치 운명처럼 역사학도의 길을 걷게 된 남희숙 관장. 서울대 규장각, 국가기록원, 대통령직속 국가브랜드위원회를 거친 남 관장은 국내 서원과 사찰들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하는 업적을 남겼다. 처음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설립 소식을 들었을 때도 뛸 뜻이 기뻤다는 남 관장은 9년이 지난 지금, 역사학과 고문서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한국 근현대사를 아우르는 뛰어난 통찰력으로 여성 최초 관장 자리에 올랐다. 남 관장이 결혼과 출산, 육아를 겪으며 전업주부로 지내다 다시 사회로 나오는 데도 스스로 역사 공부를 통해 얻은 삶의 지혜가 큰 힘을 발휘했는데…. 디지털 시대 역사박물관의 역할부터 과거 역사가 현대인에게 주는 교훈, 콘텐츠 인사이트, 성장 비결, 여성 리더십까지 남희숙 관장과의 인터뷰는 그 자체로 하나의 인문 콘텐츠가 되었다.

 

남희숙 대한민국역사박물관장. 여성으로는 최초 관장이다.

 


최근 포스트코로나 시대 도래로 사회에 크나큰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다. 언택트 시대에 온택트 할 일들이 많아지면서 디지털 콘텐츠의 중요성이 한층 더 커졌고, 정치·교육·전시 등 다양한 분야에 IT 기술들이 활발히 쓰이고 있다. 디지털 시대를 맞아 박물관도 발 빠르게 대처하고 있는 모양새다. 특히 국내 대표 역사박물관인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양질의 온라인 콘텐츠들을 지속적으로 서비스하고 있다. 몇 년 전 박물관에서 제작한 6·25전쟁 동영상이 유튜브에서만 누적 조회수 418만회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희귀 영상들을 적극적으로 수집하고 관련 학자들의 자문을 받아 열심히 제작한 영상인데요. 48분의 비교적 긴 영상이지만 많은 분들이 교육에 활용하고 있답니다. 역시 고생해서 만든 우수 콘텐츠는 만인의 사랑을 받을 수밖에 없나봐요.(웃음)”


역사문화 허브


이제 박물관도 스토리가 중심이다. 여기저기 흩어진 현대사 자료를 어떻게 묶어서 스토리텔링하느냐에 따라 콘텐츠의 성공 여부가 갈린다. 전시도 전통적인 오프라인 전시뿐 아니라 작은 주제별로 묶은 다양한 디지털 전시를 기획 중이라는 남희숙 관장은 역사뿐 아니라 콘텐츠 분야에서도 전문가다운 인사이트를 자랑했다. 역사적 사료의 스토리텔링은 무궁무진한 확장성과 창조성을 요구하는 작업이다.

남 관장의 기획에 따라 올해 연말쯤엔 대한민국역사박물관 3층 전시관의 일부 공간이 첨단 전시기법이 활용된 ‘미디어 전시실’로 특화되고, 외벽은 최첨단 디지털 사이니지(Digital Signage)로 구현돼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 박물관이 광화문 광장이 지닌 소통의 공간이라는 상징성을 잘 살리면서 예술성과 첨단 IT기술이 접목된 미디어 아트 공간으로 발돋움하는 게 남 관장의 빅 피처다.

중장기적으로는 박물관 소장 자료를 활용해 인공지능 AI가 학습할 수 있는 빅데이터를 만들고, 그 빅데이터로 전시, 교육 등을 위한 온라인 콘텐츠를 제작하는 방식도 검토 중이다. 더 나아가 메타버스 같은 가상공간에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구축하는 꿈도 꾸고 있는 남 관장. 전 세계인이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가상공간에 들어와 글로벌한 주제로 각 나라가 유사한 사례를 소개하면서 다채로운 스토리가 엮이도록 협업하면 훌륭한 비교역사 전시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그녀는 가슴 벅차했다.

“생각만 해도 멋지지 않습니까?”

과거가 현재를 만들었다면, 미래를 위해 현대인이 할 일은 이렇듯 디지털 시대에 시공간을 초월하는 콘텐츠가 주목받고 있다. 굳이 박물관을 가지 않아도 숱한 역사 콘텐츠를 집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때 박물관의 역할은 무엇일까?
“그저 오래된 유물들을 전시하는 곳이라는 개념을 뛰어넘어야겠지요.”


박물관이 단순히 과거를 회고하는 곳이 아니라 현재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고 더불어 미래를 생각하고 준비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는 게 남 관장의 생각이다. 역사는 시간을 축으로 인간의 삶 변화를 탐구해 기록하는 학문이라고들 말한다. 또 역사가들은 왜 그러한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는지 인과관계를 찾아서 설명하는 사람들이다. 이에 역사박물관은 과거 역사적 장면과 사건, 인물과 제도 등에 대해 얽히고설킨 인과 관계를 풀어 유물이나 사진, 동영상 등 여러 매체로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하는 역할을 하는 곳이라고 그녀는 정의했다.

“인과관계라는 게 과거에만 머물러있지 않지요. 과거의 원인이 현재의 결과가 되고, 현재의 원인이 미래의 결과가 됩니다. 역사를 거울삼아 현재를 돌아볼 수 있고, 현재 모습으로 미래를 예상할 수 있어요. 역사의 초점은 늘 바른 현대에 있어야 하고요. 그런 점에서 역사박물관은 과거에서 현재를 다시 천천히 음미하고,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깊이 탐구하는 계기를 제공해야 해요.”

이는 역사학의 본령이자 현대인이 반드시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좀 더 구체적으로 그녀는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자신이 꼭 기획하고 싶은 전시를 예로 들어 이야기를 이어갔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사람들의 마스크 착용이 일상화될 만큼 세상에 급격한 변동이 일어났다. 언제 또 이런 리스크가 닥칠지 모르는데, 앞으로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과거에는 어땠을까요? 역사에 비슷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지요. 14세기 중반에 유럽을 휩쓸었던 페스트로 전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사망했고, 이는 중세시대 봉건 질서가 파괴되는 단초가 됐다는 평가가 있어요. 농민들이 페스트 때문에 다 죽어버려서 농노제도가 무너졌으니까요. 이와 같이 엄청난 전염병이 돌 때 사회가 어떻게 변동하는지 동서양 역사를 비교하면서 그럼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사람들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보자는 메시지를 전하는 전시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남희숙 대한민국역사박물관장은 역사박물관은 과거 역사적 장면과 사건, 인물과 제도 등에 대해 얽히고설킨 인과 관계를 풀어 유물이나 사진, 동영상 등 여러 매체로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하는 역할을 하는 곳이라고 정의했다.

 

박물관이라는 공간이 주는 감수성

아무리 디지털 콘텐츠가 대세라고 해도 박물관이라는 공간이 주는 감수성은 절대 무시할 수 없을 터. 온라인 전시는 유물의 질감을 느끼는 데 한계가 있다. 유물과의 거리감도 넘기 어려운 벽이다. 더욱이 사람은 오감을 통해 유물에 한층 더 가까이 다가가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여기서 경험하는 정서적 안정감은 우리네 상상력과 창의력을 더욱 키운다. 교육적인 측면에서도 부모가 자녀와 함께 박물관에 자주 들리는 것만큼 좋은 역사 공부법은 또 없을 것이다.

2015년 남희숙 관장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국보 78호 반가사유상과 국보 83호 반가사유상 특별전을 보러 간 적이 있다. 당시 단독의 넓은 전시실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불상 2점만 놓여 있었다고 그녀는 회상했다.

“어두운 방 안에 두 불상에만 조명이 비추면서 연출되는 그 신비로움을 결코 잊을 수 없어요. 한 시간 동안 바닥에 앉아 거기서 풍기는 아우라에 흠뻑 빠져 행복했던 기억이 있어요.”
온라인에서도 충분히 필요한 정보들을 얻을 수 있음에도 사람들이 직접 박물관에 오는 데는 실물과 공간이 뿜어내는 감동을 맛보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운명처럼 다가온 고문서들

남희숙 관장 또한 고등학교 2학년 때 실제로 본 고문서의 매력에 끌려 사학과로 진로를 결정했다. 역사 선생님이 사학과 대학원에서 배우던 고문서들을 가져왔는데, 그걸 맞닥뜨린 순간 향후 자신이 공부해야 하는 게 뭔지 선명해졌다고 그녀는 말했다.

“같은 반 친구들은 모두 한자로 가득한 고문서를 보곤 ‘저렇게 어려운 걸 어떻게 읽어요?’라며 난색을 표했는데요. 이상하게 저는 ‘나는 배우면 읽을 수 있을 것 같은데’란 생각이 번쩍 들더라고요. 아마 운명이었던 것 같아요.”

특히 남 관장은 국사학과 박사과정 시절 서울대 규장각에서 고문서들을 정리하고 해제하는 일을 하면서 역사에선 무엇보다 사료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물에도 여러 가지가 있지요. 그중 문서류가 제일 재미없어 보이지만, 찾아보면 숨은 감동이 가장 많은 유물이에요.”

이윽고 그녀는 그 기록들을 잘 정리하고 보존해서 후세에 물려주는 게 역사학자로서 보람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1999년 국가기록원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한 그녀는 일제강점기 이후 1980년대까지 생산된 수많은 국가기록들을 평가, 선별하고 주요 내용을 정리, 설명을 붙이는 작업을 하며 한국 근현대사를 거시적으로 조명하는 안목을 키웠다. 이어 2009년부터 4년 동안 대통령직속 국가브랜드위원회에서 근무하며 한국사와 문화를 국제 사회에 알리기 위해 전문가들, 문화재청, 해당 지자체들과 함께 국내 9개 서원과 7개 전통사찰을 유네스코세계유산에 등재하는 공을 세웠다.

그러던 중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건립이 추진된다는 소식을 듣고 뛸 듯이 기뻤다는 남 관장은 9년간 박물관 전체의 기획업무부터 학술사업, 전시, 자료수집 및 관리까지 핵심 업무들을 맡으며 지금의 관장 자리에 올랐다.


여성 리더의 특별한 인생관

물론 그녀가 공공기관, 역사학계에서 리더가 되기까지 순탄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여느 여성과 마찬가지로 그녀도 결혼과 출산, 육아로 인해 8년간 전업주부로 살았다. 사회 활동에 대한 염원이 큰데도 육아 때문에 내적 갈등이 극에 달했을 때 그녀는 역사학계 원로 교수가 강조했던 ‘나선형 역사관’을 수없이 되새기며 주저앉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역사는 앞으로만 나아가지 않고 어느 계기가 되면 퇴보하게 되고, 그 시기를 이겨내려고 반성하다 보면 또 다시 앞으로 나아가는 때가 온다는 뜻이에요. 역사는 나선형을 그리면서 진행된다는 것인데, 대학교 신입생 때 강의에서 들었던 그 말이 아직도 제 가슴 깊이 박혀있습니다. 저는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어요. 누구나 살다보면 인생에서 퇴보하는 듯한 시기가 올 수 있잖아요. 그때 절망하지 않고 계속 노력하다보면 반드시 또 좋은 시기가 오기 마련입니다. 여성들이 절대 포기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요. 저도 둘째를 어린이집에 보낼 때까지 키운 뒤 박사과정에 들어가면서 사회생활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경력단절 여성에게 냉정하다는 푸념이 들리는 게 사실이다. 이에 남 관장은 청렴성, 공익성, 유연성, 개방성 등 리더로서 갖추어야 할 가치를 중요시하되, 여성 직원이 결혼과 출산, 육아로 애로사항을 겪을 때 진정성 있게 해결해주려는 여성 리더의 본보기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직원들의 자기 개발이나 근무 환경 개선을 위해서도 세심하게 노력하려고 해요. 서로 의견을 개진하고 소통할 수 있는 조직 분위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지요. 직원들을 믿어주고 단점보다는 장점을 부각해 격려해주면 조직이 저절로 활기를 띠지 않을까요?”

남 관장의 부드럽고 따뜻한 여성 리더십이 사회에 훈풍을 불러오길 응원해 본다.


퀸 송혜란 기자 | 사진 양우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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