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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학 이어령 선생 특별 인터뷰
석학 이어령 선생 특별 인터뷰
  • 송혜란 기자
  • 승인 2021.09.10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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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생명화 시대를 이끌어갈 주류는 여성들임을 잊지 마세요”

기적이란 무엇일까?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살아서 숨 쉬며 움직이고 있다는 것. 그것이 곧 기적이라고 말하는 이어령 선생은 코로나 팬데믹으로 생명의 가치가 더 중요해졌다고 설파했다. 인간이 만년 동안 쌓아 올린 문명도 자연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디지털 기술이 이룩한 글로벌 시대를 맞아 오히려 바이러스의 전파력이 훨씬 강해졌으며, 그 안에서 누군가는 도태되고 또 누군가는 앞서갔다. 그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 디지털의 비트와 아날로그의 아톰을 융합한 디지로그의 세계를 이끌어갈 여성의 생명 자본. 특히 문명의 뒤안길에서 원초적인 생명을 지켜온 당신이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석학 이어령 선생은 퀸 창간 31주년 기념 특별 인터뷰에서 “미래 생명화 시대를 이끌어갈 주류는 여성들임을 잊지 말라”고 조언했다.

 

퀸 창간 31주년 특별 인터뷰 초대에 흔쾌히 응해준 이어령 선생은 약 2년 전 암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이다. 그럼에도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그의 목소리는 놀랍도록 담담했다.
“우리는 이미 기적 속에서 살고 있어요.”

그는 언제 덮칠지 모를 죽음을 곁에 두고도 병마와 싸우기보다 친구처럼 지내고 있다고 서두를 꺼냈다. 대신 그 에너지를 평생 자신이 머리와 가슴에 묻어온 생각을 정리하고 나누는 일에 쏟고 있다는 이 선생.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석학의 본분을 다하겠다는 그의 강한 집념에 절로 고개를 숙이며 그가 퀸에 특별히 들려준 미래 시대에 대한 전언을 옮긴다.

신도 두렵지 않다던 인간은 어디로…

세상이 하루가 다르게 빨리 변하고 있다. 최근 사회에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 건 단연 코로나19 바이러스다. 이 선생은 특히 어떤 변화를 예의주시하고 있을까?

인류는 역사 속 수많은 전쟁과 중세시대 페스트 같은 위기를 극복하며 오늘날에 이르렀다. 그러나 코로나 팬데믹은 의미가 좀 남다르다고 그는 이야기했다. 과거 인간이 전쟁이나 전염병을 겪었을 때는 스스로 과학 기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문명에 대한 자신감이 약했으며 자가 극복 능력을 믿지 않았다.

“처용가에서 보듯이 신라시대 한국인의 가장 큰 화는 천연두였어요. 우리는 그걸 ‘마마’ 혹은 ‘손님’이라고 불렀지요. 손님으로 왔으니 마마처럼 잘 대접하면서 떠나기만 기다리는 거예요. 돌림병이라는 무서운 질병에게는 왕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예로부터 역병은 인간이 제어할 수 없을 만큼 강력했어요.”

그 시절과 달리 코로나는 인공지능, 원폭 등 인간의 모든 문명이 극에 달해 유발 하라리가 예측한 호모데우스가 되어 신도 두려워하지 않을 시기에 닥쳤다는 데 그는 주목했다.

“옛날에는 인간이 미약해서 바이러스에 당했지만, 지금은 모두 자신 있다고 큰소리 뻥뻥 쳤는데도 이기지 못했어요. 마스크만 좀 달라졌을 뿐 사람들을 집에 가두고 여행도 못 가게 하며 코로나 걸린 사람을 마치 죄인 취급하는 방역 방식 역시 1000년 전 중세기 때나 조선시대보다 한 발짝 나아진 게 없습니다. 도대체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사랑하는 사람 얼굴도 못 보고 장례도 못 지냅니까?”

결국 인류가 만년 동안 농업, 산업, 정보 혁명을 이룩하며 쌓아 올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이 한낱 미세한 바이러스에 와르르 무너졌다. IT 기술, 군대, 원자폭탄, 금융은 나날이 발전했으나 정작 자연을 다스릴 수 있는 문명은 발달하지 않았다.

“인간이 만든 문명도 자연 앞에서는 아이들이 만든 모래의 성에 불과했지요.” 
이는 이번 코로나 팬데믹이 주는 제일 큰 교훈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디지로그로 극복하는 팬데믹

인류가 다져온 가치관이 다 무효화된 지금. 이어령 선생은 15년 전 자신이 처음으로 세상에 내놓은 ‘디지로그’라는 개념을 다시 꺼내 들었다. 디지로그는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합성어로, 아무리 인공지능과 사이버 세계가 발전해도 우리 육체가 살아있는 현실에서는 디지털만으로 살 수 없다고 그는 역설한 바 있다.

“디지털의 접속과 아날로그의 접촉이 서로 균형,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산업화, 정보화 다음에 올 신문명을 창조할 수 있어요.”

우리나라 교육이 진작 디지로그 체제로 방향을 돌렸다면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양극으로 삶이 분열되는 일은 없었을 터. 지난해 코로나 대유행으로 학생들이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서 온라인 수업을 받는 날이 길어지자 여러 부작용이 드러났다. 평소 학교에 가기 싫다고 떼쓰던 아이들도 언제 다시 학교에 갈 수 있느냐며 아우성치고 있으며, 코로나 학번 대학생들은 신입생으로서 캠퍼스 생활을 제대로 즐기지 못해 코로나 블루로 힘들어하고 있다.

“맨날 친구들이랑 카톡만 주고받으면 뭐 합니까? 집 근처 카페라도 가서 함께 커피 마시며 대화하는 게 행복인걸요. 교육도 마찬가지예요. 앞으로 또 언제 코로나 같은 리스크가 올지 모르는데, 3일은 오전에 학교에서 수업 하고 오후에는 집에서 디지털로 숙제하며 온라인과 오프라인 교육을 겸한다면 팬데믹은 어렵지 않게 극복할 수 있을 거예요.”

이처럼 교육뿐 아니라 음식도 디지털로 접속해 배달만 시켜 먹는 게 아니라 식당에 가서 접촉도 균형 있게 하는, 이른바 사회 전체를 디지로그 체제로 만들어야 한다는 이 선생. 그는 K 방역이 아니라 디지로그 사회가 가장 건실하게 코로나 시대를 이겨낼 수 있는 체제라고 강조했다. 더 나아가 엔트로피 사회에서 디지로그를 글로컬화 한다면 더 이상 전 세계가 바이러스로 정지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그는 자신했다.


생명 자본에 집중하라


이어 이 선생은 코로나로 인해 증명된 중요한 가치가 하나 더 있다고 강조했다. 다름 아닌 ‘생명’이다. 사람들이 살고 싶어 해야 코로나가 무서운 병이 되고 방역에 의의가 생긴다. 모두가 생명을 중요시 하므로 5인 이상 모임금지, 오후 10시 이후 식당·카페·술집 내 취식 금지 등 생명 정치가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기존 사회질서, 사회관습, 사회제도가 코로나에 속절없이 부서지는 걸 바라보면서 발견한 게 생명이라는 가치의 위대함이에요.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적 가치의 최종점에 생명이 있었습니다.”

현재 유일하게 바이러스를 상대할 수 있는 게 백신이다. WHO의 임상시험 승인을 받은 코로나 백신으로는 화이자, 모더나, 아스트라제네카, 얀센 등이 있다. 반면 중국, 러시아에서는 세계적인 공표 없이 자체적으로 개발한 백신을 사용하고 있다. 이렇게 코로나 백신만으로 세계가 두 갈래로 나뉘면서 우리는 과연 어디에 속해있는지 생명 좌표도 분명히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생명이 곧 자본인 시대다. 인지·철학·인문학이 코로나 시대를 지배하는데, 물질·기술 중심의 자본이 아니라 생명 가치를 바닥에 깐 의료·복지·교육·농업·엔터테인먼트 그리고 인지(認知)분야가 각광받을 것으로 그는 예측했다. 특히 지금도 심마니와 해녀가 활동하고 있듯 채집 문화를 제일 많이 가지고 있는 한국인이 세계적으로 경쟁력이 있을 것이라고 그는 널리 내다봤다.

 

이어령 선생은 "생명화 시대는 여성의 힘이 지배한다"고 전언했다.
이어령 선생은 "생명화 시대는 여성의 힘이 지배한다"고 전언했다.

 

생명화 시대는 여성의 힘이 지배한다


농경시대, 산업시대, 정보화 시대 다음에는 생명화 시대가 온다. 그 때 여성들의 역할이 꽤 막중하다. 코로나의 팬데믹으로부터 인류를 구할 수 있는 희망을 준 위인 중에 유독 여성이 많았다는 것도 그 징후다. 화이자 백신을 개발하는 데 큰 공을 세운 바이오엔테크의 공동 대표 우구르 사힌, 외즐렘 튀레지 부부 이야기다. 부부는 터키 이민자 출신으로, 독일 사회에서 터키 이민자는 막노동자로 멸시당하고 차별받기 일쑤다. 코로나 승자가 대기업이나 실리콘밸리의 어마어마한 과학기술을 가진 연구소도 아닌 여성, 그것도 마이너리티라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고 그는 지적했다.

“중국 우한에서 최초로 코로나가 발생하자마자 외즐렘 튀레지라는 여성은 남편과 함께 자택 컴퓨터를 이용해 지금까지 쓰지 않던 새로운 mRNA 역학방식으로 단 일 년 만에 백신을 만들었어요. 세계 초유의 일을 해낸 것입니다. 인플루엔자 같은 백신을 개발하기 위해서도 무려 4년이 걸렸는데 말이지요. 영국에서 그 백신을 최초로 맞은 사람도 간호사 출신의 할머니였답니다.”

어디 그뿐인가. 부부가 시제품을 만들 때 실제로 기술개발을 한 것도 카트린이라는 여성 학자 였으며, 그녀 또한 헝가리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마이너리티 여성이었다.

“이 사람들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요? 생명 자본의 텃밭인 어머니와 할머니의 파워가 인류를 구했어요. 항상 생명자본은 사회의 약자로 억압받던 젠더나 인종적 마이너리티에서 생겨났습니다. 주류문화에서 버린 이삭이나 쓰레기통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한 예는 역사 속에 수두룩해요. 그렇게 해서 역전 드라마, 생명 자본의 승리를 얻게 되는 것이지요.”

산업주의 정보 사회에서는 남성들이 중심이었다면, ‘미래 생명화 시대를 이끌어갈 주류는 여성들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는 이어령 선생. IMF 환난 때 7번 아이언으로 헤자드에서 맨발로 빠져나온 박세리가 우리에게 주었던 힘을 생각해보자.

“향후 수없이 찾아올 위기를 원초적 생명력으로 극복할 힘, 바로 당신에게 있습니다.”
이어령 선생이 마지막으로 남긴 메시지가 퀸 여성 독자들에게 큰 용기를 심어주길 기대해 본다.


퀸 송혜란 기자 | 사진 양우영 기자(Queen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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