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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오디세이① 욕망하는 삶의 서글픈 아이러니
인문학 오디세이① 욕망하는 삶의 서글픈 아이러니
  • 김종면 주필
  • 승인 2021.11.22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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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노레 드 발자크 ‘나귀가죽’ vs 오라시오 키로가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 이야기’
삶 속에 죽음이 있고 죽음 속에 삶이 있다. 삶과 죽음, 그 숙명의 원환(圓環)을 어떻게 풀어야 할까. 심오한 철학책을 읽는 것도 좋지만 인생을 이야기하는 훌륭한 문학작품을 찾아 읽는 것이 한결 수월하고 유용한 방법이 될 수 있다. 문학에는 삶이 있고 죽음이 있다. 사랑이 있고 미움이 있다.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것은 ‘욕망’이다. 퀸 인문학 오디세이 첫 번째 이야기 ‘욕망하는 삶의 서글픈 아이러니’를 시작한다.
삶 속에 죽음이 있고 죽음 속에 삶이 있다. 삶과 죽음, 그 숙명의 원환(圓環)을 어떻게 풀어야 할까. 심오한 철학책을 읽는 것도 좋지만 인생을 이야기하는 훌륭한 문학작품을 찾아 읽는 것이 한결 수월하고 유용한 방법이 될 수 있다. 문학에는 삶이 있고 죽음이 있다. 사랑이 있고 미움이 있다.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것은 ‘욕망’이다. 퀸 인문학 오디세이 첫 번째 이야기 ‘욕망하는 삶의 서글픈 아이러니’를 시작한다.



'삶 속에 죽음이 있고 죽음 속에 삶이 있다'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기도시집’ 제3부 ‘가난과 죽음의 서’에 이렇게 적었다.

“거기서 사람들은 살고 있습니다, 흰 꽃처럼 파리한 모습으로/ 힘겨운 세상에 놀란 눈 부릅뜨고 죽어갑니다/…/ 오 주여, 저마다 고유한 죽음을 주소서/ 사랑과 의미와 고난이 깃든/ 삶에서 나오는 그 죽음을 주소서/…/ 주여, 우리는 눈도 못 뜬 채로 죽음을 맞는/ 가련한 짐승들보다 한결 더 가엾습니다/ 우리가 아직도 죽지 못한 까닭입니다/…/ 이 삶은 죽음을 낯설고도 힘겹게 만들기에/ 그 죽음은 우리의 죽음이 되지 못합니다/ 미처 성숙하기 전에 우리를 덮치는 죽음입니다/ 그러기에 폭풍은 우리를 흔들어 떨어뜨리고 지나갑니다”

릴케에게 죽음이란 더 이상 “어린 시절에 신비로운 인사를 던지던 그 죽음”이 아니었다. 한동안 프랑스 파리에 머물며 릴케가 본 것은 인간 존재의 고독과 불안, 그리고 죽음이었다. 릴케는 종말을 향한 그 고단한 인생의 드라마를 ‘작은 죽음’이라는 말로 요약했다. 릴케의 표현을 빌리면 작은 죽음은 “익지 않은 열매처럼 그들의 가슴 속에 퍼렇게 단맛도 들지 않은 채 매달려” 있다. 성숙한 죽음을 갈구하는 릴케의 기도는 간절하다.

그렇다. 인간은 씨가 여물지 않은 채 매달려 있다가 땅에 떨어져 죽는 열매 같은 존재다. 부, 명예, 사랑, 권력…. 욕망의 푯대를 향해 돌진하지만 결국 영문도 모른 채 영원의 길을 떠나는 불가해한 존재, 그것이 인간이다. 그러나 인간은 ‘욕망의 포로됨’의 의미를 모른다, 아니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프랑스 작가 오노레 드 발자크의 장편 ‘나귀가죽’(이철의 옮김, 문학동네 펴냄)과 우루과이 출신 오라시오 키로가의 단편집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엄지영 옮김, 문학동네 펴냄)는 인간 욕망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의 열쇠를 제공한다. 다채로운 인물들이 이야기를 이끌어가지만 작품의 진정한 주인공은 욕망이다. 누구도 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프랑스 작가 오노레 드 발자크의 장편 ‘나귀가죽’과 우루과이 출신 오라시오 키로가의 단편집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는 인간 욕망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의 열쇠를 제공한다. 다채로운 인물들이 이야기를 이끌어가지만 작품의 진정한 주인공은 욕망이다.누구도 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나지못한다.
프랑스 작가 오노레 드 발자크의 장편 ‘나귀가죽’과 우루과이 출신 오라시오 키로가의 단편집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는 인간 욕망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의 열쇠를 제공한다. 다채로운 인물들이 이야기를 이끌어가지만 작품의 진정한 주인공은 욕망이다. 누구도 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나지못한다.

 

PART1. 오노레 드 발자크의 장편 ‘나귀가죽’
 

‘나귀가죽’은 환상소설로 못박기는 어렵지만 환상의 요소가 뚜렷하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들어주지만 욕망이 실현될 때마다 가죽의 크기가 줄어들면서 가죽을 소유한 자의 수명도 단축되는 마법의 가죽, 일명 나귀가죽의 존재 자체가 환상이다.

소설은 ‘부적’ ‘무정한 여인’ ‘죽음의 고뇌’ 총 3부로 이루어져 있다. 1830년 7월혁명 직후 파리를 배경으로 시대의 모순과 당대적 삶의 진실을 그렸다.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 시대를 거쳐 복고왕정(1814~1830)에 이르는 기간 형성된 ‘환멸의 세대’의 정서가 녹아있다.

충족되지 않는 삶에 환멸을 느낀 청년 라파엘 발랑탱은 자살을 생각하며 파리 센 강을 배회하다 우연히 들른 골동품가게에서 나귀가죽을 얻게 된다. 라파엘은 지난 시절 무엇을 꿈꾸며 살았고, 무엇에 좌절해 자살을 결심했는가. 친구 에밀과 나누는 대화를 통해 그의 꿈과 사랑, 희망과 절망의 편린을 엿볼 수 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나는 가난한 상태에서는 사랑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네. 어쩌면 그것은 내 안에 우리가 문명화라고 부르는 그 인간의 질병에 기인하는 타락이 깃들어서 그럴 거야. 그렇더라도 나로서는 설사 어떤 여자가 트로이의 아름다운 헬레네나 호메로스의 갈라테이아만큼 매력적이라 할지라도 만일 조금이라도 가난뱅이라면 그녀는 나의 욕망에 더 이상 아무런 자극도 주지 못한다네.”

라파엘이 변덕스러운 백작부인 페도라를 사랑한 데는 상류층 여인과의 결혼을 통한 신분상승 욕구도 한몫했다. 라파엘은 사랑을 얻기 위해 부인의 전횡에 속절없이 굴복했다. 페도라를 향한 라파엘의 사랑은 치명적인 것이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광기가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무정한 여인은 그를 농락하고 버린다. 욕망에 스스로 무너진 라파엘은 방황의 늪에 빠진다.

그러나 라파엘에게는 마법의 가죽이 있다. 가죽의 힘으로 라파엘은 백만장자가 된다. 그러나 점점 줄어드는 가죽의 테두리를 보며 죽음의 그림자가 짙어짐을 느낀다.

라파엘은 자기 살을 뜯어먹는 전설 속의 동물 카토블레파스처럼 삶을 지속하기 위해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갉아먹어야 하는 섬뜩한 운명의 주인이 됐다.

죽음의 심연에 이른 라파엘은 어쩔 수 없이 욕망하지 않는 ‘식물성의 삶’을 택한다. 살기 위해 삶을 포기한 것이다. 산악지방에서 살며 자연에 의탁한다. 꼼짝 않고 기계적인 몽상에 빠져 “슬픔도 안온하고 기쁨도 사뿐하며 영혼은 거의 잠들어버리는” 감각적인 삶의 경지에 이르기도 했다. 라파엘은 숨이 끊어질 듯한 육체적 고통에도 의연했다. 그러나 주위의 값싼 동정은 무엇보다 괴로웠다. “사람이 가장 견디기 어려운 감정이 바로 동정심이다. 특히 동정을 받아 마땅한 사람인 경우가 그렇다.” 라파엘은 동정을 “번지르르한 아첨의 외양을 한 악이거나 온화함 속에 감춰진 경멸이거나 아니면 공격성을 은폐한 온화함”으로 여겼다.

욕망하지 않는 삶은 정녕 불가능한 것인가. 라파엘은 어느 날 오페라극장에서 과거에 자신이 묵었던 생캉탱 하숙집 소녀 폴린을 만나며 다시 욕망에 불타오른다. 폴린과의 결혼을 계획하고 행복을 꿈꾸지만 나귀가죽은 또 줄어든다. 욕망의 사슬을 끊지 않았기 때문이다.

발자크는 자신의 소설작품 전체에 ‘인간극’이란 이름을 붙였다. ‘나귀가죽’은 ‘철학연구’ 편 맨 앞자리에 놓여 있는 일종의 테제소설이다. 그런 만큼 철학적인 대목들이 적잖이 등장한다.

그중 하나가 14세기 프랑스 스콜라 철학자 장 뷔리당이 제시한 ‘뷔리당의 당나귀’다.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른 당나귀가 귀리통과 물통 사이에서 어느 쪽을 먼저 선택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가 굶어 죽고말았다는 이야기다. 뷔리당은 자신의 결정불가능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이 우화를 만들어냈다.

프랑스 사상가 몽테뉴가 평생 화두로 삼은 ‘크세주(Que Sais-Je)’라는 말도 나온다. ‘나는 무엇을 아는가.’ 몽테뉴는 이 한 문장으로 회의주의 사상을 설파했다.

발자크는 왜 ‘뷔리당의 당나귀’ 비유담을 인용한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피와 살을 가진 인간으로서 욕망을 이겨낼 방도가 없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존재의 지속도 존재의 파멸도 해법이 될 수 없는 나귀가죽의 역설이 있다. 발자크는 욕망과 반(反)욕망 사이에서 선택이 불가능한 인간 존재의 모순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인간은 욕망 앞에 무력하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기껏해야 ‘에포케(Epoche)’, 즉 판단을 중지하는 것이다. 회의주의의 시조로 불리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피론은 독단주의자들을 상대로 ‘판단중지’를 내세웠다. 어떠한 생각에도 반론이 따를 수 있으니 판단을 중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귀가죽은 행운의 가죽이자 슬픔의 가죽이다. 불굴의 마법을 자랑하던 나귀가죽은 마침내 협죽도 나뭇잎처럼 작아져 이내 바스라질 것만 같았다.

인간의 욕망은 끝 간 데가 없다. 폴린과 재회하며 욕망과 고투를 벌이던 라파엘은 결국 사랑을 선택한다. 그들의 대단원은 광기 그 이상이다. 폴린은 “내가 죽으면 그가 살겠지!”라고 되뇌며 숄의 매듭을 지어 자기 목을 조르려 한다. 그걸 바라보는 라파엘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느낀다. 발자크의 말대로 환희에 대한 기억이 무감각했던 영혼 속에서 들고일어난 것이다. 라파엘은 폴린의 품 안에서 숨을 거둔다. 폴린은 시체를 품고 엎드려 있다.

나귀가죽은 축복이자 저주다. 라파엘은 나귀가죽을 손에 넣은 후 ‘납덩이 외투’를 걸친 듯 마음이 무거웠다. 이제 욕망의 향연은 끝났다. 모든 것은 죽음으로 돌아갔다. 나귀가죽의 딜레마는 인간이야말로 태양 아래 가장 얄궂은 존재임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오노레 드 발자크의 ‘나귀가죽’(왼쪽), 오라시오 키로가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
오노레 드 발자크의 ‘나귀가죽’(왼쪽), 오라시오 키로가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

 


PART2. 오라시오 키로가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 
 

오라시오 키로가의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 또한 ‘나귀가죽’의 감정선과 크게 다르지 않다. 모순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다룬 이 작품 역시 슬픔의 정조가 지배한다. 사랑을 갈구하고 병마에 가위눌리고 광기 속에 허망하게 죽어가는 인간군상이 애잔하다. 작가가 꾸며내는 광기어린 환상적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삶을 배우고 죽음을 배운다.

키로가의 작품에는 죽음이 흥건하다. 그것은 아름다운 환상으로 혹은 낭만적인 동경으로 다가오는 낭만주의 문학 속 죽음과는 거리가 멀다. 키로가가 천착하는 죽음은 부조리하고 느닷없고 때로는 비인간적이기도 하다.

키로가는 죽음을 통해 삶을 그린다. 키로가가 죽음에 집착하는 것은 그의 불우한 개인사와 무관치 않다. 키로가는 한 살도 안 돼 아버지를 잃고 의붓아버지마저 뇌출혈로 반신불수가 된 후 자살한다. 총기 오발 사고로 친구를 죽게 만드는 일도 벌어진다. 누나와 형은 장티푸스로 요절하고 첫 번째 부인은 자살한다. 그의 후원자였던 발타사르 브룸 대통령은 쿠데타에 항거해 자결한다. 죽음의 행렬은 키로가가 위암 판정을 받고 청산가리를 마시고 자살하는 것으로도 끝나지 않는다. 그의 장녀와 장남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가 죽음에 대해 강박관념을 갖는 것은 차라리 자연스럽다.

키로가가 그리는 죽음에는 애련한 여운이 남는다. 하지만 그는 죽음에 특별한 의미나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하드보일드한 문체로 적을 뿐이다.

키로가의 삶과 문학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아르헨티나 북동부 미시오네스주의 아열대 밀림 지역에 둥지를 튼 일이다. 밀림에 매료된 키로가는 차코 지방에 거처를 마련해 목화를 재배하며 변경의 삶을 일군다. 키로가가 자신의 소설 ‘멘수들’에서 그린 대로 밀림의 수도는 그의 삶에 예루살렘이자 골고다와 같은 존재였다. 키로가는 삶의 태반을 변경지방에서 보냈다. 남미대륙 파라나 강을 따라 펼쳐진 미시오네스의 밀림은 키로가 문학의 수원지가 됐다.

키로가가 거친 자연에서의 도전적 삶을 택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문명에 대한 환멸도 작용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자신을 포박하고 있는 죽음의 올가미를 벗어던지고 삶의 조건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싶었을 것이다. 하이데거나 사르트르 실존주의의 기본개념 가운데 하나가 기투(企投)다. 현재를 초월해 미래로 자기를 내던지는 실존의 존재 방식을 일컫는 말이다. 키로가의 밀림에의 투신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의 실존적 기투다.

독사와 식인개미 떼가 사방팔방으로 인간의 생명을 노리는 밀림의 세계, 그 무한 공포의 장에 자발적으로 몸을 담근다고 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죽음은 영원한 미지의 영역이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우리가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 이야기’에는 대표작으로 꼽히는 ‘목 잘린 닭’, ‘깃털베개’ 등 모두 18편의 작품이 실렸다.

‘목 잘린 닭’은 기괴함과 광기의 정점을 이룬다. 서두부터 의미심장하다. “마시니페라스 부부에게는 아이가 넷 있었는데 모두 백치였다. 아이들은 온종일 앞마당에 있는 벤치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하는 일이라고는 입을 헤벌리고 혀를 내민 채 초점 없는 멍한 시선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백치 아이들도 한때는 부모의 인생에 커다란 기쁨이었다. 부부는 이들이 동물처럼 끔찍한 상태에서 벗어나 최소한 인간의 본능만이라도 되찾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무진 노력했다. 하지만 구원의 희망이 사라지면서 백치 아이들은 불화의 씨앗으로 전락했다. 부부는 서로에게 백치 아이들을 “우리 아이들”이 아니라 “당신 아이들”이라 불렀다. 그런 중에 딸이 태어났다. 베르티타라는 이름의 딸아이는 정상적으로 컸다.

그러나 또 다른 불행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어느 날 하녀가 부엌에서 닭의 목을 자르고 피를 뽑아내고 있는 장면을 바라보던 백치 아이들이 외쳤다. “시뻘게…시뻘게”

담 위에 걸터앉은 베르티타는 누군가 자신의 다리를 잡아채는 것을 느꼈다. 담 아래에는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여덟 개의 눈동자가 있었다. 베르티타는 머리채를 움켜잡힌 채 낮에 잡은 닭의 피가 고여 있는 부엌으로 끌려갔다. 백치 아이들은 베르티타의 몸에서 서서히 생명의 기운을 빼냈다. 여동생은 백치 오빠들에 의해 그렇게 목 잘린 닭처럼 죽었다.

그것은 억눌린 자아의 분출, 광기의 폭발이었다. 백치 아이들이 진정으로 원한 것은 어둠이 아니라 빛이었다. 백치 아이들은 “마치 먹을 수 있는 음식인 양 태양을 바라보면서 짐승들처럼 즐거워했다.” 그들에게 태양은 진리처럼 반짝이는 존재인가 보다.

‘깃털베개’는 신혼생활에 대한 환상이 무너진 뒤 환각에 시달리는 여인의 이야기다. 남편 호르단의 차가운 성격에 환멸을 느낀 알리시아는 어느 날 독감 증상을 보인다. 병은 좀처럼 낫지 않는다. 알리시아는 결국 죽는다. 사후 정리를 하던 하녀가 베개에서 빨간 얼룩을 발견한다. 뭔가에 물린 듯한 자국이다. 알리시아는 자기 베개를 아무도 만지지 못하게 했다. 베개를 열어보니 끔찍한 벌레들이 우글댔다. 벌레가 밤새 알리시아의 피를 빨아 죽게 만든 것이다.

키로가의 소설에서 개연성을 따지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근대 단편소설의 거장’으로 평가받는 키로가가 지어낸 환상적인 이야기의 참뜻을 이해하는 게 우선이다.

알리시아의 불행은 어디서 왔는가. 알리시아는 호르단이 자신을 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사랑해주기를 원했다. 미물도 서로 온기를 나눈다. 하지만 알리시아에게는 나눌 온기가 없었다. 무관심 속에 방치된 알리시아는 을씨년스러운 집에서 잠만 자며 지냈다. 유인원 같은 짐승이 자신을 노려보는 환각에 시달렸다. 사랑의 불가능성에 절망했다. 인간 내면의 욕망은 종종 광기로 돌변한다. 절대고독 혹은 절대소외는 광기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키로가 소설은 으레 죽음으로 끝난다. ‘깃털베개’의 알리시아는 ‘괴물벌레’에 의해 죽었고, ‘목 잘린 닭’의 베르티타는 백치 아이들의 ‘닭도살 모방범죄’에 의해 죽었다.

키로가의 작품에서 죽음은 영혼의 해방을 가져다주거나 구원을 선사하지 않는다. 죽음의 형이상학적 의미는 기대하기 어렵다. 17세기 영시의 거장 존 던은 “죽음아, 뽐내지 마라(Death be not proud)”라며 ‘불쌍한 죽음(Poor Death)’이 자신을 죽일 수 없다고 일갈했다. 죽음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무찔러야 할 적으로 간주하고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키로가의 작품에서 죽음은 삶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이의 없이 받아들여지는 수동적인 존재다.

환상과 역설에 의존한 키로가 소설이 독자에게는 당혹감을 안겨줄 수 있다. 그러나 사랑과 광기, 죽음을 한 덩어리로 묶어 인간 존재의 모순을 생각해 보게 하는 미덕이 있다.


PART3. 어떻게 욕망할 것인가
 

중남미 문학은 우리에게 더 이상 낯설지 않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이른바 ‘라틴 아메리카 붐’을 만들어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나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같은 작가들의 영향이 크다. 현실과 환상이 뒤섞인 마술적 사실주의(Magical Realism)를 구사하는 이들의 작품은 어느 서구 작가의 작품보다 친숙하다.

그러고 보면 중남미 환상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키로가는 우리에게 너무 늦게 소개된 감이 없지 않다. 키로가의 환상문학을 마술적 사실주의의 범주로 묶을 수 있을까. 환상문학을 마술적 사실주의와 동일시하는 것은 물론 논란의 여지가 있다.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통용된 것은 1980년대에 들어서다.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 이야기’가 아르헨티나에서 출판된 것이 1917년임을 감안하면 키로가의 환상문학은 상당히 선구적이다.

세상에 인간의 자유의지로 이룩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될까. 발자크와 키로가 소설의 키워드인 욕망은 인간의 자유의지의 문제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자유의 철학’을 주장한 네덜란드 철학자 스피노자는 우리의 의식에서 피어나는 자유로운 의지, 곧 자유의지는 환상에 불과하다고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온전한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이란 없다. 무의식적인 욕망의 선택만이 있을 뿐이다. 스피노자 철학의 중심개념 중 하나가 ‘코나투스(Conatus)’다. 자존성(自存性), 즉 자기보존의 욕망을 가리킨다. 스피노자는 코나투스가 인간의 모든 행동을 지배한다고 말한다. 인간은 각자의 코나투스에 따라 살아간다.

욕망하지 않고 살 수는 없다. 욕망은 삶뿐 아니라 죽음까지 관장한다. 줄어드는 나귀가죽 앞에서 생존의 몸부림을 치는 라파엘도, 기이한 모방능력으로 광기의 살인을 저지르는 백치 아이들도 애처롭기는 마찬가지다.

어떻게 욕망할 것인가. 발자크와 키로가의 철학소설을 통해 우리는 욕망하는 법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글 김종면 주필 사진 양우영기자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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