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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애리, 화려하지 않아도 우리네 삶에 스며든 배우
정애리, 화려하지 않아도 우리네 삶에 스며든 배우
  • 송혜란 기자
  • 승인 2022.01.03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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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가 수많은 책들 사이에서 유독 빛났던 <채우지 않아도 삶에 스며드는 축복>. 책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잿빛이었던 마음이 어느덧 밝은 핑크빛으로 물들었다. 일상을 담은 사진과 시처럼 써내려 간 글들에서 마치 위로와 희망을 말하는 정애리의 따뜻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기 때문이다. 이 배우, 과연 어떤 사람일까? 이번 정애리 화보 인터뷰는 그 궁금증에서 비롯되었다.

정애리는 1978년 KBS 공채 탤런트로 데뷔해 43년간 연기 활동을 해왔다. 남다른 연기력으로 백상예술연기상, MBC 방송연기대상 최우수연기상, 서울연극제 최우수연기상, MBC 연기대상 중견부문 황금연기상 등을 수상하며 대한민국 대표 배우로서의 입지를 굳힌 천생 연기인.

그녀를 표현하는 단어는 크게 두 개, 배우와 봉사활동이다. 지금의 정애리에서 배우를 빼면 단연 봉사활동이 남는다. 1989년 드라마 촬영 차 간 노량진 성로원에서 많은 아이들을 본 뒤 그냥 ‘다시 와야겠다’고 생각했다는 정애리.

그 마음은 어느 날 불현듯 떠오른 것이라 무엇이 그녀를 그곳으로 이끌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아마도 기독교인인 그녀의 종교가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그게 그녀의 나눔 인생의 시작이었다. 그렇게 30년 넘게 월드컵비전, 연탄은행, 생명의전화, 더 투게더 등 단체와 함께 손을 잡고 나눔을 실천해온 정애리. 국내에서 해외로 봉사활동 필드를 넓히면서 만난 해외아동들도 많을 터. 자주 보지 못하는 아이들을 만나고 헤어질 때마다 느끼는 감정 때문에 꽤 힘들 법도 하다.

“1년에도 몇 번씩 아이들한테 많은 사람들이 왔다 가요. 저도 늘 오가는 사람 중 한 명일 거예요. 그런 사람에게 온전히 마음을 주기는 어렵겠지요. 너무 정이 들면 헤어지기 싫으니까요. 그런데 계속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다 보니 그것마저도 없어지더라고요. 나도, 그 아이도요.”

마침내 진짜 가족이 되었다는 의미다. “우리가 아침마다 가족들과 헤어지면서 울고불고하진 않잖아요. 마찬가지예요.”

 

패션은 그 사람의 외모가 아니라 내면을 담는다는 말이 있다. 정애리는 이날
정서미 단한국의상 디자이너의 한국 오리엔탈 의상을 멋지게 소화해내 찬사를 
받았다. 이번 의상은 배우와 디자이너 소장 현대복과 단 한국의상을 믹
스 앤 매치해 더욱 우아하고 고혹적이며 기품 있는 스타일로 완성되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

그녀 인생에서 봉사활동은 굉장히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처음 그녀의 눈길이 갔던 아이들은 방실방실 웃던 아이, 깨끗한 아이들이었다. 한참을 그랬는데, 언젠가부터 그녀의 마음이 바뀌었다.

“늘 구석에 앉아 힘없고 아픈 아이한테 다가가게 됐어요. ‘이리와, 왜 혼자 거기 있어?’라고 아이를 부르는 게 아니라, 제가 먼저 가서 코를 닦아주고 무릎에 앉혀 말을 걸어줬지요. ‘오늘 누구랑 싸웠니?’, ‘우리 저기 가서 같이 놀자’라면서요.”

비로소 있는 그대로의 아이 모습을 사랑하게 된 순간이었다. 이 변화를 그녀는 하나님이 준 제일 큰 선물이라고 이야기했다.
“봉사는 배우로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제가, 반드시 감당해야 할 사랑의 수고라고 생각해요.”
 

봉사로 연마한 연기력

나눔은 또 다른 방식으로 그녀의 삶에 혜택을 더했다. 봉사활동을 통해 제3세계에 있는 아이들의 작은 마음들까지 보게 되면서 연기도 더욱 깊어졌기 때문이다.

하물며 노숙자에게 밥 한 끼를 대접했을 때의 일은 더욱 그럴 수밖에. 그들에게 따뜻한 밥을 퍼 나르면서 그녀는 문득 누군가가 주는 밥을 처음 먹게 됐을 때 그들의 기분은 어땠을까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한 여자의 남편이었고, 한 아이의 아버지였을, 분명 찬란한 시절이 있었을 텐데 이제는 누가 밥을 주지 않으면 굶을 수밖에 없게 된 그들을 이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데….
“때로는 그들도 좀 더 노력했으면 좋겠다 싶기도 하지요. 그러나 겉으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는 건 연기자한테 엄청난 자산이에요.”

국내에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음에도 그녀가 해외 봉사활동을 떠나는 이유도 같은 맥락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일단 죽어가는 아이들을 살리고 봐야 하니까요. 어른들도 그렇지만, 아이들도 마냥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더라고요.”

자신이 후원하는 아이들을 안타깝게 떠나보내게 되면서 얻은 깨달음이다. 제발 로또라도 당첨돼서 그 오지에 난민촌을 지어주고 싶다는 그녀에게서 자신보다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을 생각하는 뜨거운 마음이 느껴졌다.
 

천천히, 조금만 더 천천히

그러나 분명 누군가에게 위안과 희망을 주는 사람도 또 다른 이의 도움이 필요한 법이다.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만큼 그녀도 자신을 잘 챙기고 있을까?

“스스로를 잘 돌보는 것도 중요하지요. 그런데 오랫동안 그걸 말로만 했던 것 같아요. 어쨌든 생명은 중요하니까 ‘성실’, ‘열심’이라는 포장으로 저를 혹사시켰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땐 정말 뭐든지 감사했어요. 밤새우는 것도 전혀 아무렇지 않을 정도로 사람들을 도와주는 게 즐거웠어요.”

그러다 몇 해 전 그녀는 난소암을 앓았다. 인생에서 쉼표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잘 알고 있었으나 잠깐씩 쉬는 쉼이었을 뿐, 깊은 쉼, 제대로 된 쉼은 없었다는 데 그녀는 크게 반성해야만 했다. 무슨 일이든 열정적으로 하는 일중독 사람들에게는 잘 쉬는 데도 노력이 필요하다고들 말한다.

“깨달음이라는 게 참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것 같아요. 이렇게 오늘 머리로는 잘 알았어도, 또 내일이 되면 분주해지는 절 발견하는데요. 그때마다 주문을 외우죠. ‘천천히, 조금만 더 천천히’.”

다행히 지금 그녀의 건강은 많이 호전되었다.

 

패션은 그 사람의 외모가 아니라 내면을 담는다는 말이 있다. <br>정애리는 이날 화보 인터뷰에서 정서미 단 한국의상 디자이너의 한국 오리엔탈 의상을 <br>​​​​​​​멋지게 소화해내 찬사를 받았다. <br>
1989년 드라마 촬영 차 간 노량진 성로원에서 많은 아이들을 본 뒤 그냥 ‘다시 와야겠다’고 생각했다는 정애리.
그 마음은 어느 날 불현듯 떠오른 것이라 무엇이 그녀를 그곳으로 이끌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아마도 기독교인인 그녀의 종교가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그게 그녀의 나눔 인생의 시작이었다.

 

나누며 비워야 비로소 채워지는 것들

봉사는 나눔이지만 비우는 것은 아니라는 정애리. 자신의 마음, 물질이 가면 닳는 것은 맞으나 사람에게 가는 것은 산수, 물리가 아니라 즐거움, 축복으로 다시 바로 채워지는 것 같다고 그녀는 덧붙였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자신이 돌보는 해외 아동들과 못 본 지 오래다. 이에 그녀는 후원으로나마 진심을 전하고 있다. 물리적으로 허락된 시간에는 수익금 전부를 기부하자는 취지의 에세이를 썼다. <채우지 않아도 삶에 스며드는 축복>. 생활 속에서 깨달은 그녀의 지혜들이 뿌리 깊은 나무 위 잘 익은 열매들처럼 엮였다.

 

 

인생은 계속 플레이

향후 배우 정애리의 나눔, 연기 인생도 계속 플레이될 예정이다. “제 도움을 원하는 곳에서 모세혈관 같은 역할을 꾸준히 하려고요.”

앞으로 괜찮은 사람, 괜찮은 배우로 기억되고 싶다는 그녀가 설날을 맞아 새해 인사도 빠뜨리지 않았다.

“지난해는 코로나로 업앤다운 하다가 금방 지나가 버렸어요. 올해는 어찌어찌하다가 지나가 버리지 않고, ‘잘’ 지나가는 한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도 덕분에 일상의 소중함을 배웠으니 하루하루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봐요, 우리. 무엇보다 건강 꼭 챙기시길 바랍니다.”
 

[Queen 송혜란 기자] 사진 양우영 기자 | 의상 정서미(단 한국의상 디자이너) | 헤어 레디(치치라보 팀장) 메이크업 김정주(치치라보 원장) | 장소 한글전각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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