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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로 태어났다면
남자로 태어났다면
  • 이복실
  • 승인 2022.02.11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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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칼럼

요즘 세상에 아들과 딸 구별이 있을까? 가정 내에서의 아들딸 차별은 많이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최근 각종 통계에서도 아들보다 딸을 더 선호한다는 조사 결과가 많이 있다. ‘내가 만일 아들로 태어났다면 이렇게 살지는 않았을 텐데’라는 말은 우리 세대보다도 엄마와 이모 세대에게서 많이 듣던 말이다. 당시 보통의 가정에서는 아들은 공부시키고 딸은 집안일 시키다가 시집보내는 것이 다반사였다. 경제력이 없다 보니 남편과 시댁 식구들에게 종속적인 삶을 살게 되고 그러다 보면 신세 한탄이 나온다. 그런데 엄마도 나에게 똑같은 말을 했다.

“네가 아들로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겠니?”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어린 마음에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엄마, 아들과 딸 차이가 없는데 왜 그래?”라고 되물었다. 하지만 엄마의 눈빛은 ‘네가 무엇을 몰라도 한참 모른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서 학교를 졸업하고 결혼을 해도 엄마의 그 말 “네가 아들로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겠니?”는 계속되고 있었다. 오히려 거기다 “너도 아들 하나 낳아라”라는 주문하나가 더 추가되었다. 그 점에서는 시어머니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이들 키우며 직장 다니는 것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아들 하나 낳아라”라는 어른들 말씀은 내 귀에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기로 끝나는 잔소리로 끝났다. 아마도 어른들의 아들 집착에 대한 반항심도 약간은 작용했을 것이다.

왜 이렇게 엄마들은 아들을 좋아하는 걸까? 어느 날 이유를 물어보았다. 겉으로는 “든든하잖아” “대를 잇잖아” “딸은 시집을 가잖아”라는 뻔한 대답을 하지만 속마음으로는 당신들이 아들로 태어나지 못한 아쉬움 때문일지도 모른다. 딸들이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 아직도 험난하고 남동생들에 대한 피해의식도 한몫했을 것이다.

엄마 세대의 이러한 우려는 통계에서 아직도 여실히 드러난다. 세상이 바뀌어 다들 아들보다 딸이 더 좋다고들 말하지만, 내 딸들이 살아야 하는 사회는 아직 힘들다. 세계경제포럼이 매년 발표하고 있는 성 격차 지수가 세계 최하위 수준이고, 유리천장 지수는 최고인 각종 통계가 이를 말해주고 있다. 남녀 임금 격차도 아직 높다. 임금이 차이가 나는 이유는 여성들이 비정규직이나 하위직에 많이 집중되어있는 구조적인 문제 때문이다. 승진이나 보직에서 한두 번 소외되고, 가사와 육아의 이중고에서 허덕거리게 되면 직장을 다녀야 하나 그만두어야 하나 고민에 빠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워킹맘에게 페미니즘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당장 아이를 맡기고 일을 해야 하는 눈앞에 닥친 문제였다.

처음 공무원을 시작했던 1985년 나의 첫 발령은 문교부였다. 모든 게 낯설고 새로웠다. 여성 선배들이 없다 보니 시간이 흐를수록 ‘나도 승진을 시켜줄까?’ ‘나에게도 기회를 줄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의문은 현실로 다가왔다. 본부에서 근무하고 싶었음에도 외부기관 파견이 반복되었고 본부에서 일할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지만 돌아온 것은 ‘여성 사무관은 현재 세 명으로 족하다’는 답변뿐이었다. 여성과 남성의 자리가 나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능력만 있으면 누구나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결국 나는 그 부처에서 견디지 못하고 부처를 옮겨야만 했다.

힘든 것은 민간 기업도 마찬가지였다. 기업 채용에서의 남녀차별은 1988년 남녀고용평등법 제정 이후 많이 없어졌지만, 중간관리자 이상으로 승진하는 비율은 여전히 낮다. 대기업이 여성 공채를 뽑기 시작한 것이 1980년대 후반이다. 지금 30년 이상 지났지만 달라진 것은 별로 없다. 여성가족부가 5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여성 임원의 비율은 2017년 기준 3.0%였다. 올해는 5%대이다. 여성 임원이 있는 기업이 172개, 즉 여성 임원이 한 명도 없는 기업이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다.

세계적인 역사학자인 히브리대 유발 하라리 교수는 2015년에 펴낸 저서 사피엔스에서 인간사회에는 ‘그와 그녀’ 사이에 위계질서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생물학적으로는 근거가 없고 사회와 문화가 남성성과 여성성을 구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근거도 없이 사회 대부분이 남성성을 여성성보다 높이 평가하고 있고, 가부장 제도가 수천 년을 견고하게 버티어온 점도 이상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젠더의 역할은 지금 커다란 혁명을 겪고 있는 사실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지금까지는 딸로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을 한탄한 적은 없지만, ‘여성 사무관은 셋이면 좋다’는 말을 듣거나 일과 육아 병행이 힘들어 아이들과 가족에게 죄의식을 느낄 때는 나도 다음 생에는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통 사회는 성역할을 만들어 ‘그와 그녀’에게 강요하였지만, 지금 세상은 변하고 있다. 앞으로 우리의 자녀들은 성역할의 차별 없는 세상에서 살기를 기대해본다. 그것은 건강한 사회로 가는 기본이기도 하다.

글 이복실(전 여성가족부 차관)

 

 

이복실은…

전 여성가족부 차관, 세계여성이사협회 한국지부 회장.
서울시립대 도시행정학과를 졸업,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USC에서 교육학으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1985년 여성으로서 네 번째 행정고시 합격자이다. 30년간 중앙부처에 재직했으며,
2013년 여성가족부가 설립된 이래 최초 여성 차관으로 임명됐다.
저서로는 <여자의자리 엄마의 자리>, <나는 죽을 때까지 성장하고 싶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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