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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오디세이③ 어리석음 속 숨은 진실 찾기
인문학 오디세이③ 어리석음 속 숨은 진실 찾기
  • 김종면 기자
  • 승인 2022.01.24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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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바스티안 브란트 ‘바보배’ vs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 ‘우신예찬’

 

어리석음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를 알기 위해서는 우인문학(Fool’s Literature)을 읽는 것이 가장 손쉽고 확실한 길이다. 우인문학의 장에는 바보, 광인, 광대, 그밖에 온갖 우화적 인물들이 등장해 부조리한 현실에 가차없는 풍자의 화살을 날린다. 제바스티안 브란트 ‘바보배’ vs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 ‘우신예찬’ 속에서 어리석음 속 숨은 진실을 찾아본다. Queen 인문학 오디세이 세 번째 이야기.
 

아포리즘의 바다에서 썩은 영혼을 씻는다
 

인류의 역사와 미래에 대해 남다른 통찰력을 지닌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역사는 자기가 한 일이 뭔지 모르는 멍청이들에 의해 쓰인다.”고 했다. 인류의 역사를 이끌어온 원동력이 ‘어리석음’이라는 말이다. 지혜가 아니라 우매가 역사를 움직이는 힘이라니 역설이 아닌가. 그만큼 인간이 모순적인 존재라는 뜻이기도 하다.

인간의 내면에는 어리석음과 지혜로움이 동전의 양면처럼 맞붙어 있다. 서로 간섭하며 영향을 준다. 지혜만이 선(善)은 아니다. 어리석음의 미학이라고 할까. 때로는 적당한 어리석음이 과도한 지혜를 경계하며 이성의 폭력을 억제하기도 한다.

우인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으로는 단연 15세기 독일 법학자 제바스티안 브란트의 ‘바보배’(노성두 옮김, 다 펴냄)와 네덜란드 로테르담 출신 인문주의자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김남우 옮김, 열린책들 펴냄)이 꼽힌다.
 

인간의 몽매함 일깨우는 아포리즘의 보고
 

‘바보배’는 우인문학의 원조다. 에라스무스는 ‘우신예찬’을 쓰면서 ‘바보배’를 모범으로 삼았다. 16세기 프랑스 르네상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프랑수아 라블레는 소설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에 등장하는 바보들의 유형을 이 책에서 빌려 왔다. 중세의 세계상을 가장 잘 보여준 네덜란드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는 ‘바보배’라는 작품을 남겼다. 이 책으로 말미암아 ‘바보’는 문학·예술의 유력한 주제어가 된 셈이다.

‘바보배’에는 갖가지 행색의 바보가 등장한다. 바보의 유형이 100가지가 넘는다. 진실을 외면하며 돈벌이에 혈안이 된 성직자, 후려치기에 이골이 난 장사치, 돈만 되면 무엇이든 찍어내는 인쇄업자 등 신분과 직종도 다양하다.

중세 기독교의 7대 죄악(The Seven Deadly Sins)인 교만, 탐욕, 탐식, 음란, 시기, 분노, 나태뿐 아니라 허영, 수다, 경솔함, 도박, 심지어 유행을 좇는 행위까지도 ‘바보’로 분류돼 비판의 도마에 오른다.

‘바보배’에는 ‘화를 잘 내는 바보’라는 제목 아래 이런 글이 실려 있다. “성마름은 좋은 덕목을 깡그리 파괴하니 분노에 사로잡히면 기도하는 일조차 잊고 마네. 화를 내기 전에 마음을 가다듬게나. 분노는 바보의 심성을 거처로 삼네. 바보의 분노보다 새끼 잃은 곰의 분노를 견디기가 더 수월하겠네. 어리석음은 바보가 애지중지 아끼는 재산이라네. 현자는 언제고 평정심을 잃지 않지만, 화 잘 내는 사람은 제멋에 겨워 나귀를 타고 간다네!”

저자는 현자 소크라테스가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며 “공연히 노여운 일을 찾아다니며 사방천지에다 개처럼 으르렁대는” 바보들을 질타한다. 저자의 눈에 비친 분노하는 자들은 한낱 미망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바보떼에 불과하다.

권세를 가진 바보는 어떤 모습일까.“수산나를 협박했던 재판관들이 요즘에도 들끓으니 권력 남용은 예사요 폭력까지 마다않네. 정의는 차갑게 식고 말았다네. 두 자루 칼이 모두 녹슬어서 칼집에서 빠지지도 않는 데다, 쓰려고 해도 칼날이 말을 듣지 않네. 정의는 두 눈이 멀고 숨통이 끊어지고 말았네.”

두 자루의 칼, 바로 국왕의 칼과 법왕의 칼을 휘두르는 권력중독자, 연줄과 뇌물의 사슬에 묶여 자신이 무지몽매의 감옥에 갇혀 있는 줄도 모르는 이성마비자, 저자는 이런 바보들을 통해 진실이 물구나무선 당대의 현실을 신랄하게 고발한다. ‘바보배’가 출간된 것이 1494년이니 지금부터 520여 년 전 이야기다. 그럼에도 마치 요즘 세태를 다루는 듯 실감으로 다가온다.
 

폐부를 찌르는 독설, 풍자는 힘이 세다

 

 

바보배는 실제로 존재했는가. ‘광기의 역사’를 쓴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흥미로운 사실을 전한다. 15세기 르네상스 시대 유럽의 강 어귀에는 광인 또는 바보들을 태운 배가 떠다녔으며 주요 도시를 드나들기도 했다는 것이다.

‘바보배’의 저자는 바보깃발을 든 박식한 바보로 등장한다. 그는 어리석은 자들을 모두 끌어모아 바보배에 태운다. 무지와 죄악이라는 승선권을 쥐고 배에 올라탄 바보들이 향하는 곳은 ‘바보들의 천국’ 나라고니아다. 그러나 배에 먼저 올라타겠다고 난리를 치던 바보들의 낙원행은 좌절된다. 깨달음은 늦게 오는 법. 배가 침몰하고 죽음이 임박해서야 바보들은 비로소 세상의 속된 가치가 모두 부질없는 것임을 알게 된다.

인생을 항해에 빗대는 전통은 유구하다. 고대를 거쳐 중세로 이어졌다. 그리스 신화에는 유명한 오디세우스의 항해가 나온다. 라틴문학에서도 항해의 비유는 숱하게 등장한다. 중세 기독교 교부들은 교회를 공동체가 탄 큰 배에 견주기도 했다.

비유는 문맥에 따라 각각 다른 빛을 발한다. 어리석음의 풍랑을 헤치고 자신들의 유토피아를 찾아가는 바보배의 비유는 탁월하다. 시계제로의 망망대해를 떠도는 인생 역로, 인간 존재의 근원적 의미를 묻는 비유로서는 안성맞춤이다.
 

야만과 어둠의 시대를 떠받친 민중의 일상
 

‘바보배’의 시대적 배경은 중세다. 유럽 역사에서 중세는 일반적으로 476년 서로마 제국이 게르만 민족에 의해 멸망한 5세기부터 르네상스와 더불어 1500년 근세가 시작되기 전까지를 가리킨다. 르네상스 시대는 14세기부터 16세기 유럽의 문예부흥이 일어난 시기를 일컫는다.

중세와 르네상스는 시기적으로 상당 기간 겹친다. 중세에도 라틴문화를 바탕으로 한 고대문화의 전통은 끊어지지 않았다. ‘중세의 르네상스’로 불리던 때도 있었다. ‘바보배’는 중세 말기 최대 걸작이자 르네상스 최초의 베스트셀러다. 괴테의 ‘파우스트’와 함께 독일어로 쓰인 가장 의미 있는 책으로 평가받는 고전이다.

중세는 흔히 암흑의 시대로 알려져 있지만 중세 사람들의 삶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와 달리 사뭇 다채롭고 변화무쌍한 시대임을 알 수 있다. 교회의 타락, 마녀사냥, 흑사병, 십자군전쟁 등 우리가 알고 있는 중세의 대사건들은 빙산의 일각이다.

중세라는 거대한 존재를 밑에서부터 떠받친 보이지 않는 힘이 있다면 그것은 민중의 일상일 것이다. 중세인들은 종교적 속박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시대를 살았지만 그들의 일상은 여느 시대와 다름없이 인생의 희로애락으로 채색돼 있다.

‘바보배’는 중세 말의 무질서와 혼란을 경계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쓰였지만 딱딱한 도덕 교과서의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다. 웃음기 섞인 경쾌한 필치로 무지의 자각을 유도한다. 각 텍스트마다 당대 독일 최고의 판화가 알브레히트 뒤러의 목판화가 실려 있어 이해를 돕는다. 저자는 이를 ‘바보거울’이라고 부른다.

저자는 호메로스, 베르날리우스, 플루타르코스 등 고대 작가들의 글과 성서의 잠언·시편 등 교훈이 될 만한 문구를 총동원한다. 그야말로 르네상스적이다. 하지만 저자의 시각의 한계 또한 뚜렷하다. 중세 교훈시의 전통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다. 인간 존재를 무지와 어리석음으로 가득한 바보로 단정짓는 것이 그 한 예다.

인생의 길에는 곳곳에 암초가 널려 있다. 가장 행복한 순간에도 위험은 엄습한다. 바보고깔을 쓰고 바보배에 오르는 수모를 겪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바보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보며 스스로를 돌아보라고 권한다. 자계(自戒)의 메시지다.

 

바보배’가 인간의 어리석음을마음껏 조롱하고 풍자한인생독본이라면 ‘우신예찬’은풍자와 해학의 가면을 쓰고 인간의우매함을 꾸짖는 역설로 쓴‘어리석음 찬가’다.
바보배’가 인간의 어리석음을마음껏 조롱하고 풍자한인생독본이라면 ‘우신예찬’은풍자와 해학의 가면을 쓰고 인간의우매함을 꾸짖는 역설로 쓴‘어리석음 찬가’다.

 

‘바보배’가 인간의 어리석음을 마음껏 조롱하고 풍자한 인생독본이라면 ‘우신예찬’은 풍자와 해학의 가면을 쓰고 인간의 우매함을 꾸짖는 역설로 쓴 ‘어리석음 찬가’다.

‘우신예찬’은 ‘바보배’보다 17년 뒤인 1511년에 출간됐다. 16세기 초 유럽은 거의 모든 영역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던 종교적 이데올로기가 위세를 잃고 르네상스 문화가 꽃피던 시기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타락상에 대한 비판은 하늘을 찔렀다. 하느님의 섭리에 묵종하던 중세의 가톨릭적 세계관이 일대 위기를 맞은 것이다.

에라스무스의 묘비에는 “나는 무엇과도 타협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적혀있다고 한다. 야만을 몰아내고 인간적인 것을 되찾기 위해 평생을 바친 에라스무스는 영혼의 투사였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베르길리우스의 창과 호라티우스의 방패가 그 증좌다.

로마 가톨릭 교회와 성직자에 대한 에라스무스의 비판은 신랄하다. ‘우신예찬’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 교황자리를 사려는 자는 누구이며, 일단 사고 나서도 칼과 독약과 폭력으로 이를 보존하려는 자는 누구입니까?” 에라스무스가 보기에 교황은 누구보다 여유롭게 살아가며 근심이라곤 없다. 수고스러운 것들은 모두 베드로와 바오로에게 맡기고 교황은 넘쳐나는 여가를 즐길 따름이다.

에라스무스는 1506년 이탈리아로 건너가 3년간 머물며 로마 가톨릭 교회의 참상과 민중의 고통을 몸으로 체험했다. 그가 훗날 영국에서 친구인 토머스 모어의 집에 머물며 일주일 만에 ‘우신예찬’을 신들린 듯 써내려갈 수 있었던 것은 그런 배경에서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한 에라스무스의 비판은 통렬하기 이를 데 없다. 하지만 독일의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와는 달리 가톨릭 교회와 완전히 담을 쌓지는 않았다. 에라스무스는 종교개혁 당시 스위스 바젤에 머물며 신교와 구교의 갈등을 중재하기도 했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거대한 불길 앞에 그의 관용의 정신은 무력했다. 1524년 에라스무스가 ‘자유의지론’을 써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를 부인하는 종교개혁을 비판하자 루터는 이듬해 ‘노예의지론’을 발표하며 반박에 나섰다. 에라스무스는 결국 가톨릭 진영에서도 개신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안팎 곱사등이 신세가 됐다.
 

바보여신, 어리석은 현자를 비웃다

 

 

‘우신예찬’의 성가를 드높인 또 다른 요인은 그 독특한 인문학적 풍자 형식이다. 에라스무스는 라틴어로 ‘어리석음의 신‘을 뜻하는 모리아(Moria) 여신의 입을 빌려 인간의 ‘순수한’ 어리석음을

비웃는 어리석은 현자들을 비웃는다. 이 바보여신은 인간의 쾌락과 행복을 주관한다. 이성이 아니라 본성과 정념에 충실한 유쾌한 여신이다.

바보여신은 이성주의자인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행복한 바보와 어리석은 현자의 예를 들어 해석한다. 플라톤의 동굴에서 사물의 그림자와 이미지를 보고 그 이상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바

보들은 마냥 즐겁기만하다. 그런가 하면 현자는 동굴에서 나와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본다.

그들도 바보처럼 행복할까. 바보여신은 주저 없이 바보의 손을 들어준다. 누가 진정 바보인가. 그리스어로 ‘학문’이라는 단어가 ‘모든 악행을 만들어 낸 사람’, 즉 ‘악마’라는 낱말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바보여신의 독설에 가까운 풍자는 전방위에 걸친다. 말만 번지르르한 논리학자 내지 궤변론자들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할까. 바보여신은 그들을 ‘도도나의 청동솥’보다 더 수다스럽다며 논리학자 한 명이 스무 명의 말 많기로 유명한 여자들을 능히 대적할 수 있다고 비꼰다.

도도나는 고대 그리스에서 신탁을 받는 성지로 사제들은 이곳 청동 솥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신탁을 전했다고 한다. 에라스무스는 논리학자를 염소 털로 양모를 만들 수 있는지를 놓고 목숨을 걸고 싸우는 딱한 존재로 본다.

바보여신은 그리스도가 사도들에게 ‘어리석은 광기’를 가지도록 권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사도 바오로가 “정말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바보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듯이 하느님도 모종의 광기가 필요함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광기’라고 할까 ‘바람직한 광기’라고 할까. ‘우신예찬’에는 묘한 어리석음의 아우라가 감돈다.

인문학 지성의 노골적인 반여성주의 시각 ‘우신예찬’은 지금의 도덕률이나 시대 정신과는 동떨어진 이야기도 적지 않다. “사랑에 빠진 저 늙은 여자들, 지옥에서 돌아온 시체처럼 어기적거린다.” 에라스무스는 연애를 하려는 늙은 여성을 이렇게 맹렬히 비난한다. 사람들은 젊은 시절 미모에 가려 보이지 않던 정신적 추함이 늙어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여겼다.

‘바보배’ 또한 세상과 인간에 대한 편견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꽃뱀’이라는 제목 아래 실린 글에서는 여성을 거의 ‘악(惡)’에 근접한 존재로 본다. “지혜의 거울에 비추어 보면 여자야말로 가장 무서운 독초일세. 여자의 심장에는 덫과 올가미가 도사리고 있어서 바보들이 줄줄이 걸려든다네.”

“여자라도 학문을 사랑할 수는 있다. 하지만 모든 학문이 여자에게 적합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아무 학문에나 여자가 몰두하는 것은 합당한 일이 아니며 십중팔구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고 주장한 인물도 있다. 인간의 본성에 관한 풍자문으로 유명한 17세기 프랑스 작가 프랑수아 드 라 로슈푸코다.

문화혁신을 부르짖은 르네상스 시대 인문주의자들이 이처럼 반(反)여성주의적 시각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은 아이러니다. 평범하게 들리지만 그 안에 체험적인 진리가 녹아 있는 금언이나 경구, 그런 것들을 아포리즘이라고 한다. 음미하면 할수록 인생의 본질, 인간 존재의 심연에 가닿게 하는 힘이 있다. 우리가 지혜의 문학을 찾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그러나 경계해야 할 것이 있다. 단장취의(斷章取義)의 오류다. 남의 문장이나 시의 한 부분을 전체적인 뜻을 살피지 않고 끌어다 쓰며 자기 주장이나 생각을 합리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서양 속담에도 있듯이 위대한 시인 호메로스도 때로는 졸면서 쓴 것 같은 시가 있다. 지혜의 서(書)도 지혜롭게 읽어야 약이 된다.
 

글 김종면 주필 | 사진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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