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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년을 이어온 인본주의의 뿌리 원주 이씨 이원규 종가
400년을 이어온 인본주의의 뿌리 원주 이씨 이원규 종가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2.01.10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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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숱한 난리 속에서 재산은 잃었지만, 사람은 잃지 않았어요. 모두가 덕을 쌓고 살아온 까닭이죠”

 

북한강과 남한강의 푸른 물줄기가 만나고 용의 등줄기 같은 산맥이 에워싸고 있는 천혜의 땅에 역사의 한 자락을 도려낸 듯한 집이 있다. 400년이란 세월 동안 산과 들도 처음의 산과 들이 아니건만 돌과 나무로 기초를 세우고 흙으로 몸체를 빚은 한옥은 용케도 격동의 역사를 버텨냈다. 그리고 현재는 원주(原州) 이씨 사용공파 13대손인 이원규 씨가 이곳에 삶의 흔적을 더하고 있다.

평범한 가문에 깃든 선비의 내력
이원규 종가는 현달한 조상을 중심으로 형성된 종가는 아니다. 땀으로 땅을 일구고 강줄기로 목을 축이는 농가의 성실함이 바탕이 된 가문이다. 성실함으로 재산을 모아 베풀며 살아온 삶은 덕이 되었고 그 덕은 자연히 선비의 기개로 남았다.
“우리 집안은 고관대작이 살았던 집안이 아닙니다. 지극히 평범한 분들이 땅을 일구며 살아온 집안이죠. 한때는 서울까지 남의 땅을 밟지 않고 간다고 할 정도로 대단한 재력을 가졌었죠. 하지만 재산을 모으는 데에만 집착하지 아니하고 주변과 조화를 이루며 유유자적한 삶을 추구했습니다. 학문을 숭상하고 그 안에 담긴 가치를 실천하려고 노력했죠. 명문세족의 이름으로 이어져 온 종가가 아니기에 더욱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원규 종가는 선대의 이름이나 호를 빌리지 않는다. 현재를 살아가는 세대가 종가의 주인이 된다. 그렇게 후손은 선조의 얼을 받들면서도 자신의 이름으로 종가를 가꾸고 발전시킨다. 그런 가풍은 이원규 씨의 삶에 그대로 묻어 있다. 대대로 만석지기 부자라 불리던 집안이었지만 정작 이원규 씨는 가난과 배고픔으로 일가를 이뤄야 했다.
“해방 직후 시행된 토지개혁으로 대대로 이어온 땅을 모두 잃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발발한 6·25전쟁으로 아버지는 군에 끌려가시고 가세는 더욱 기울게 되었죠. 저는 중학교에 다니면서 점심이란 걸 한 번도 못 먹어봤어요. 서울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며 점심 도시락이란 걸 처음으로 먹게 되었는데 눈물이 맺히더군요. 가난이 깊은 한이 되었습니다.”

땅을 일구고 사람을 세운다
이원규 씨는 가난 속에서도 학문에 대한 뜻을 굽히지 않았다. 재산은 모두 잃었지만, 가풍으로 이어진 선비의 덕만은 사라지지 않고 더욱 뜨겁게 타올랐다. 이원규 씨는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간대학을 다녔다. 그러다 부친이 53세의 나이에 병환을 얻어 돌아가시자 종가를 잇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온다. ‘이제 무엇을 하며 먹고 살아야 하나?’ 막막한 심정으로 남의 것이 되어버린 토지를 황망히 바라보던 이원규 씨는 결국 자신이 돌아갈 곳이 땅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재산은 잃었지만, 양평의 깨끗한 물과 비옥한 토지는 그대로였습니다. 매연과 폐수로 오염되어가는 서울에서 살다 보니 그 차이를 확연하게 느끼겠더군요. 이 좋은 땅에서 나는 음식을 서울사람들도 먹을 수 있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전무하던 유기농업이라는 걸 시작하게 되었어요.”
국내에 유기농업에 대한 지식이나 선례가 거의 없던 시절. 이원규 씨는 13대를 거쳐서 내려온 고전 농법의 지혜를 그대로 답습한다. 종가에 내려온 진정한 재산은 잃어버린 땅과 돈에 있지 않았다. 손수 땅을 갈아서 씨를 뿌리고 그곳에서 난 작물로 배를 채우던 선조의 삶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렇게 선조가 물려준 성실과 정직의 가치는 언제라도 빛을 발하기 마련이다.
“유기농업은 매우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서울에 사는 내 자식들도 먹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모든 작물에 애정을 기울였어요. 제가 재배한 작물은 한 번도 농약이 검출된 적이 없습니다. 비료도 화학 비료를 쓰지 않고 소를 키워서 얻은 발효퇴비를 사용했어요.”
그런 이원규 씨의 노력은 양평을 유기농업의 원산지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원규 씨는 14년간 양평군의 유기농 회장을 역임한다.

모든 것의 근본은 ‘사람’
400년의 이원규 고택이 보석처럼 빛나는 이유는 그 안에 ‘인본주의’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원규 종가는 나라와 사람을 지키는데 재산을 써왔다. 일제강점기 때는 나라의 해방을 위해 사용되었고, 가뭄이나 환난이 생겼을 때는 가난한 이웃을 위해 쓰였다. 재산이 아닌 덕으로 사람의 마음을 얻은 이원규 종가였기에 거친 역사의 파도 속에서도 그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와 6·25 시절은 모든 지방의 부자들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시대였습니다. 이데올로기의 첫 번째 희생양이 되어야 했죠. 하지만 우리 집안은 인명 피해가 전혀 없었습니다. 세대를 이어가며 덕을 베풀어 왔기에 가능한 일이었죠. 누구의 원망도 사지 않고 훈훈한 인정으로 살아왔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곧 인생이라 말하는 이원규 씨는 관계와 화합을 중요시한다. 이러한 이원규 씨의 정신은 원주 이씨 종문의 사상적 기조가 되고 있다. 원주 이씨 대종회의 회장직을 맡고 있는 이원규 씨는 화합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오늘날 화합은 가장 중요한 덕목 중의 하나입니다. 종사의 일은 화합이라는 바탕에서 이뤄져야 해요. 화합의 가치는 모든 세상사를 아우릅니다. 반목하려 하면 발전할 수 없어요. 좌·우의 화합을 통해 국정이 안정되고, 남녀 간의 화합으로 세대가 이어지고, 그 세대 간에도 화합을 이뤄야 역사가 이어집니다.”

젊은이들이 종가의 주인이다
종가라고 하면 케케묵고 현시대와 동떨어진 옛것만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종가를 잇는 것은 언제나 새로운 세대다. 젊은이들이 종가를 알지 못하면 종가는 이어질 수 없다. 그렇기에 이원규 씨는 세대 간의 화합을 통해 역사를 이어가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이원규 씨의 1남 4녀 역시 이러한 아버지의 뜻을 소중히 여기고 있다고 한다.
“갈수록 종중에 참여하는 젊은이들의 수가 줄어들고 있어요. 종중을 인생의 황혼녘에야 참여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종중의 미래는 없어요. 종중에 참여할 때는 꼭 자녀분을 대동해야 해요. 그리고 아이에게 뭔가를 가르치려고 훈계하지도 마세요. 그저 함께 와서 같은 또래들끼리 편하게 놀 수 있도록 해주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렇게 천천히 자신의 뿌리를 스스로 더듬어 가는 거예요.”
이원규 씨는 각 지역의 종친회에 별도의 청년회를 조직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이원규 씨 한 명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우선 어른들이 먼저 모범을 보이고자 양평종친회 일동은 함께 뜻을 모아 양평 시내에 빌딩을 지었다. 그리고 그 빌딩은 종친회의 구성원들이 편하게 모일 수 있는 쉼터가 되었다. 또한, 빌딩을 통해 얻은 이익금은 종친회를 발전시키는 기금으로도 사용되고 있어 여러모로 유익한 부가효과를 낳고 있다. 이러한 어른들의 활동을 지켜본 청년들은 자연히 부모를 통해서라도 함께 모이게 되고 스스로 구성력을 가지게 마련. 그 결과 청년회는 동아리 개념으로 운영되어 세대 간의 공감을 이끌고 온고지신의 소중함을 가르치는 자리가 되어가고 있다.
물론 종친회를 이끌어가는 것에 힘든 점도 있지만, 자부심이 더욱 크다는 이원규 씨는 종가에 깃든 지혜를 알리는 데 고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종가의 지혜란 덕으로 사람을 대하고 조화 속에서 함께 번영해 나가는 것이다. 이런 이원규 씨의 열정과 노력에는 종갓집 며느리인 김인옥 여사의 내조도 크게 한몫하고 있다. 김인옥 여사에게 종갓집 며느리로 살아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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