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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오디세이④ - 20세기 영미문학을 가로지른 불멸의 초상
인문학 오디세이④ - 20세기 영미문학을 가로지른 불멸의 초상
  • 김종면 주필
  • 승인 2022.04.0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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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 ‘등대로’ vs 실비아 플라스 ‘벨 자’
인문학 오디세이④ - 20세기 영미문학을 가로지른 불멸의 초상
인문학 오디세이④ - 20세기 영미문학을 가로지른 불멸의 초상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원제 To the Lighthouse, 박희진 옮김, 솔 펴냄)와 실비아 플라스의 ‘벨 자’(원제 Bell Jar, 공경희 옮김, 마음산책 펴냄)는 이들 문학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주는 유력한 텍스트다. ‘등대로’는 울프의 소설 가운데 가장 자전적인 요소가 강한 작품이다. ‘벨 자’는 플라스가 남긴 유일한 소설로 그의 내면세계를 그대로 들여다볼 수 있다. 버지니아 울프와 실비아 플라스, 문학사상 가장 강렬한 불멸의 작가의 두 작품을 Queen 인문학 오디세이 네 번째 이야기로 만나본다.


정신병 굴레 속 시대의 억압에 맞서 미래를 살다

20세기 초·중반 영미문학계를 뒤흔든 두 명의 여성 작가가 있다. 버지니아 울프(1882∼1941)와 실비아 플라스(1932∼1963)다. 세계 문학사에서 이들만큼 논쟁적인 인물도 드물다. 1960년대 말 이후 페미니즘이 왕성해지기 전 페미니즘 문학에 뚜렷한 자취를 남긴 이들은 시대를 앞서간 만큼 논란의 중심에 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이슈를 만든 것은 그 심각한 정신병의 징후와 충격적인 죽음의 방식이다.

이들의 죽음은 기괴했다. 울프는 외투 양쪽 주머니에 돌멩이를 잔뜩 채워넣고 영국 잉글랜드 동부를 흐르는 우즈(Ouse) 강으로 걸어 들어가 세상을 등졌다. 플라스는 가스 오븐에 머리를 박고 목숨을 끊었다. 잠든 두 아이의 간식으로 빵과 우유를 챙겨놓고 가스가 새 나가지 않게 부엌 문을 테이프로 밀봉한 후 오븐 가스밸브를 열었다.

이들은 왜 이런 섬뜩한 죽음의 방식을 택했을까. 이들을 정신병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한 것은 무엇인가. 당대의 선구적인 여성 작가로서 어떻게 시대와 불화했는가.

전기적 사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개인적인 비극이 지나치게 감각적으로 다루어져 작품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방해하기도 하는 점은 특히 유의해야 한다.

버지나아 울프의 ‘등대로’(원제 To the Lighthouse, 박희진 옮김, 솔 펴냄)와 실비아 플라스의 ‘벨 자’(원제 Bell Jar, 공경희 옮김, 마음산책 펴냄)는 이들 문학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주는 유력한 텍스트다. ‘등대로’는 울프의 소설 가운데 가장 자전적인 요소가 강한 작품이다. ‘벨 자’는 플라스가 남긴 유일한 소설로 그의 내면 세계를 그대로 들여다 볼 수 있다. 

 

버지나아 울프의 ‘등대로’(원제 To the Lighthouse, 박희진 옮김, 솔 펴냄)와 실비아 플라스의 ‘벨 자’(원제 Bell Jar, 공경희 옮김, 마음산책 펴냄)는 이들 문학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주는 유력한 텍스트다.
버지나아 울프의 ‘등대로’(원제 To the Lighthouse, 박희진 옮김, 솔 펴냄)와 실비아 플라스의 ‘벨 자’(원제 Bell Jar, 공경희 옮김, 마음산책 펴냄)는 이들 문학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주는 유력한 텍스트다.

 

‘의식의 흐름’ 이끈 모더니즘 문학의 기수
 

울프는 제임스 조이스, 마르셀 프루스트 등과 함께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 사조를 이끈 모더니즘 문학의 기수다. 그는 거만한 에즈라 파운드나 권위적인 T. S. 엘리엇 같은 남성 문인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되는 남성중심적이고 패권주의적인 모더니즘 문학사에 당당히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의식의 흐름은 현대소설 특히 심리주의 소설에서 흔히 사용되는 창작기법으로 소설 속 인물의 의식세계를 자유로운 연상작용을 통해 가감 없이 드러낸다. 울프는 20세기 초반 영국 모더니즘 문학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 소설에서 보다 원숙한 형태의 의식의 흐름 기법을 선보인다. 인물의 시점을 자유자재로 옮겨가며 내면의 심리를 그린다. 

소설의 배경은 스코틀랜드 서쪽 헤브리니스제도 세인트 아이브스의 여름 별장이다. 램지 가족은 이곳에서 휴가를 보낸다. 막내 제임스가 등대에 가고싶어 하자 램지 부인은 차차 가보자며 희망을 준다. 하지만 램지 씨는 날씨가 좋지 않아 갈 수 없을 거라며 낙담을 안겨준다. 10년 후 램지 부인은 죽고 램지 씨와 막내 제임스는 등대에 도착한다. 소설은 화가 릴리 브리스코가 램지 부인의 초상화를 완성하며 끝난다. 이 소설에서 램지 부부는 울프의 부모, 그리고 릴리는 울프의 분신이다.

별다른 사건도 일어나지 않고 플롯이라고 할 만한 특별한 줄거리도 없다. 다양한 인물들의 의식과 생각, 대화가 어우러진 장면을 보여줄 뿐이다. 의식만 흐른다. 내적 독백만 울린다. 어떻게 요령을 잡을 수 있을까. 작가가 이 소설을 구상했을 즈음인 1925년에 쓴 일기를 보면 작품의 내용을 보다 선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

“이 소설은 비교적 짤막한 것이 될 것이다. 나는 이 소설에서 아버지를 완벽하게 묘사하고자 한다. 그리고 어머니, 세인트 아이브스 그리고 나의 유년 시절을 그려 넣을 것이다. 그러고는 내가 작품에 담아내고자 하는 것들, 즉 삶, 죽음 등을 다룰 것이다. 그러나 작품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배를 타고 앉아 죽어가는 고등어를 짓이기며 ‘우리는 모두 외롭게 죽어간다’라고 읊조리고 있는 아버지이다.”

세인트 아이브스는 영국 남서부 콘월 반도에 위치한 대서양 연안 마을이다. 울프의 어린 시절 추억이 서린 곳이다. 소설에서는 스카이 섬으로 나온다. 울프에게 등대는 어떤 의미일까. 옛 기억을 더듬는 시간여행, 추억여행, 의식여행의 이정표쯤 될 듯하다. 

‘등대로’는 울프 자신이 부모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쓴 정신적 고뇌의 산물로 읽힌다. 울프에게 부모는 어떤 존재인가.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울프는 전형적인 후기 빅토리아 중상계급 가정에서 자랐다. 아버지 레슬리 스티븐은 19세기 영국 지성사를 빛낸 철학자이자 비평가다. 그러나 우울증 기질을 지닌 가부장적 남성이다. 반면 에 스티븐과 마찬가지로 자녀를 여럿 둔 상태에서 재혼한 어머니 줄리아 덕워스는 남편과 자식에게 헌신적인 여성이었다.

울프는 이 부부가 낳은 네 자녀 중 셋째다. 복잡한 가계(家系) 속에서 성장한 울프는 어린 시절 의붓오빠에게 성적 학대를 당한 트라우마도 있다. 자신에게 소중한 지적 자산과 창작의 재능을 물려준 아버지, 하지만 가부장적 억압의 상징인 아버지, 울프에게 아버지는 애증의 존재다.

이 소설에서 눈여겨 봐야 할 인물은 릴리다. 울프는 그를 통해 당대 결혼생활의 허실을 들춘다. 릴리의 눈에 비친 결혼한 여성의 삶, 그것은 ‘운명’이다. 그 ‘강요된’ 운명의 씨줄과 날줄은 더없이 질기고 가혹하다. 

울프의 어머니는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전형적인 현모양처다. 스티븐은 아내가 일찍 죽자 그 빈자리를 딸들로 메우려 했고 그런 독단적인 태도는 울프에게 가부장적 폭력성을 일깨워줬다. 울프는 어머니와 달리 ‘집안의 천사’가 되기를 거부했다. 

하지만 울프는 여성의 옹색한 상황을 적극적으로 타개해 나갔다. 남성이나 시대에 대한 증오 대신 자기 자신에게 충실한 길을 택했다. 자신이 여성이라는 것을 잊은 채, 때로는 ‘여성’임을 당당히 내세우고 글을 썼다. 울프는 여권이라는 개념조차 희미하던 시절 오로지 글로써 가부장적 남성 사회에 맞섰고 마침내 ‘페미니즘의 대모’가 됐다. 

울프는 20세기 전반 당대 최고의 지식인 모임인 블룸즈버리 그룹을 결성해 소설가 에드워드 모건 포스터, 비평가 리튼 스트레이치,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즈 등과 교류했다. 울프의 지적 스펙트럼은 방대하고 상상의 영역은 무한했다.


 

울프의 작품을 페미니즘의 잣대로만 재단하는 것은 그의 문학의 많은 부분을 놓치는 것이다.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통찰을 깊이 읽어내야 한다.
울프의 작품을 페미니즘의 잣대로만 재단하는 것은 그의 문학의 많은 부분을 놓치는 것이다.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통찰을 깊이 읽어내야 한다.

 

 

페미니즘을 넘어선 삶과 죽음에 대한 통찰 
 

울프의 작품을 페미니즘의 잣대로만 재단하는 것은 그의 문학의 많은 부분을 놓치는 것이다.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통찰을 깊이 읽어내야 한다. 삶이란 무엇인가. 삶은 말끔하고 명확하게 정리될 수 있는 ‘대칭적으로 배열되어 늘어선 가로등’이 아니라 의식이 시작되고 끝날 때까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빛나는 후광이자 ‘반투명한 덮개’라는 게 울프의 말이다. 

울프는 나이가 들고 허약해지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손떨림 증상을 이야기하곤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쓴 원고에서는 그런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마지막 원고까지 한점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는 문학의 장인이다. 뛰어난 장편과 단편소설, 에세이, 평론, 평전, 기고문, 그리고 엄청난 분량의 일기와 편지를 남겼다. 남편인 레너드 울프와 함께 호가스 출판사를 운영하며 읽어낸 원고량 또한 가공할 만하다. 그는 ‘르네상스형’ 작가다. 모든 위대한 작가가 그러하듯 지독한 ‘노동자 예술가’다. 

그러나 그런 불굴의 의지도 고질적인 신경쇠약증 앞에서는 무력했다. 울프가 강에 투신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의 시신이 수습되지 않고 바다로 떠내려가기를 바랐지만 3주 뒤 다리 근처에서 아이들이 발견했다. 유해는 화장되어 영국 서식스의 몽크스 하우스 정원에 묻혔다.

그의 묘비문 역시 그처럼 당당하다. “나는 정복되지도 굴복하지도 않은 채 너에게 나 자신을 던질 것이다. 오 죽음이여.” 소설 ‘파도’에 나오는 구절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시인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를 통해서도 우리에게 잘 알려진 친숙한 이름이다. 하지만 실비아 플라스의 경우는 좀 다르다. 아는 사람만 안다고 할까. 문학사상 가장 엽기적인 죽음을 통해서만 그를 기억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 낯선 듯 낯설지 않은 작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는 벨 자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  
 

벨 자는 과학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종 모양의 유리 덮개다. 벨 글래스라고도 한다. 소설 ‘벨 자’는 머리에 숨 막힐 듯 유리관이 씌워져 있는 상황을 다룬다. 

플라스는 이 소설을 통해 그의 시대가 마주하기 꺼린 진실을 드러낸다. 그것은 남성지배 사회의 억압적 구조일 수도 있고 섹슈얼리티의 폭력성일 수도 있고 인간 내면의 이기적 욕망일 수도 있다. 

‘벨 자’는 플라스가 자신의 자살 시도와 정신치료 경험을 바탕으로 쓰여진 자전소설이다. 1950년대 미국 사회에서 줄곧 모범생으로 살아온 젊은 여성 에스더 그린우드가  주인공이자 내레이터다. 러시아 형식주의이론가 빅토르 슈클로프스키가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라고 명명한 사실주의적 문학 기법을 통해 주인공의 과거와 현재, 변화하는 심리적 정황을 치밀하게 그린다.

시골 출신 대학생 그린우드는 패션잡지사 콘테스트에서 입상해 뉴욕에서 인턴 생활을 하며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다. 하지만 설렘과 기대는 사라지고 무력감에 빠진다. 미친 듯이 공부하고 읽고 쓰고 일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살아왔지만 다들 한가락 하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뉴욕에서 점점 작아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거리에 던져진 경주마가 된 기분이다. ‘조악한’ 전기충격 요법까지 받지만 우울증은 깊어간다.

그린우드, 즉 플라스의 정신병적 징후는 소설 첫머리에 암시되어 있다. “찌뿌드드하고 후텁지근한 여름이었다. 그 여름 로젠버그 부부가 전기 사형에 처해졌고, 나는 뉴욕에서 뭘 하는지도 모르고 지냈다.” 로젠버그는 옛 소련에 핵 기밀을 넘겼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한 인물이다. 그린우드는 섬뜩한 상상을 이어간다. “전기 사형을 당하면 어떤 기분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경이 산 채로 몸이 타면 어떨까.”

이 소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플라스는 평생 정신병에 시달렸고 수차례 자살을 시도했다.

 ‘벨 자’는 1963년 런던에서 빅토리아 루카스라는 가명으로 처음 선보였다. 문학적 가치와 평가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실비아 플라스라는 이름으로 출간된 것은 그의 사후 1966년 영국에서다. 1971년에는 미국에서도 나와 호평을 받았다. 보스턴 글로브는 J. 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에 비견되는 걸작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내면의 광기로 얼룩진 그로테스크의 미학
 

남성중심 사회에서 인정받고 궁극적으로는 여성 해방을 이룩하는 것이 플라스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그의 시는 그런 개인의 욕망과 광기로 들끓는다. 플라스가 ‘아빠(Daddy)’라는 시에서 착한 딸이 되기를 거부하며 퍼부어대는 격렬한 언어는 차라리 저주에 가깝다.

당신은 못해요. 더 이상은/ 못해요. 나는 지난 30년을/ 검은 구두 속의 발처럼/ 살았어요. 불쌍하고 창백한 모습으로/ 감히 숨도 못 쉬고 재채기도 못하면서/.../ 고문과 압력을 좋아하는 남자를 그래서 택했던 것이에요/ 알겠어요. 알겠어요. 나는 이렇게 말했어요/ 그래서 나는 결국 끝난 거예요/ 시커먼 전화는 선이 뽑히고/ 목소리는 밖으로 새어 나갈 수도 없어요/ 내가 한 사람을 죽였다면, 두 사람을 죽인 거예요/ 자기가 당신이라고 하면서/ 1년 동안 내 피를 빨아먹은 흡혈귀를 죽였으니까요/ 아니, 사실은 1년이 아니라 7년이었어요./ 아빠는 이제 다시 누우실 수 있게 됐네요/ 당신의 살찐 검은 가슴에 말뚝이 박혀 있네요/ 마을 사람들은 당신을 좋아한 적이 없었어요/ 그들이 당신 위에서 춤을 추며 발길을 구르고 있어요/ 그들은 그게 당신이라는 걸 알고 있었을 거예요/ 아빠, 아빠, 이 개자식아, 나는 끝났어

그로테스크의 미학이라고 해야 할까 분노의 시학이라고 해야 할까. 쓸쓸하다. 이 시에는 개자식(Bastard), 흡혈귀(Vampire) 말고도 장갑차 남자(Planzer-man), 발 대신 턱이 갈라진 악마 등 아버지로 상징되는 남성에 대한 온갖 저주의 언어가 폭주한다.  

플라스가 말하는 흡혈귀 두 사람은 아버지와 자신의 남편인 영국의 계관시인 테드 휴즈다. 7년이 플라스의 결혼생활 햇수임을 감안하면 휴즈에게도 분노의 화살을 날린 것임을 알 수 있다. 미국 보스턴 태생인 플라스는 휴즈를 미국 문단에 알려 첫 시집 ‘빗 속의 매’가 나오도록 주선하기도 했다. 그러나 휴즈의 외도로 둘은 헤어졌다. 

플라스의 아버지 오토 플라스는 저명한 생물학 교수이자 땅벌 연구가였다. ‘벨 자’를 보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지 않았으면 곤충에 대해 가르쳐 주었을 텐데. 아버지는 대학시설 곤충학을 전공했다. 또 독일어와 그리스어, 라틴어를 알았으니 가르쳐 주었겠지”.라고 회상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리움의 표백인가. 플라스가 정말로 아버지를 뼛속까지 증오했는지 의심이 들기도 한다. 

내가 당신을 죽였어야만 했는데 그럴 기회를 가져보기도 전에 죽어버렸다고 읊은 플라스다. 그럼에도 그는 “나는 잔인하지 않다. 단지 솔직할 뿐이다.”라고 그의 시 ‘거울’에 적었다. 플라스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플라스의 비극적인 죽음이 말해주듯 그는 자신에게도 잔인했다. 그는 끝내 자신과 화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적어도 그의 문학 언어는 솔직했다. ‘벨 자’에 등장하는 냉소적 언어는 거침이 없다.  

“최근 나는 가톨릭 신자가 될까 고민했다. 가톨릭에서는 자살을 엄청난 죄로 본다는 걸 알았다. 정말 그렇다면 자살을 만류할 방법을 알고 있을 터였다. 물론 나는 사후 세계나 동정녀 잉태, 종교재판 따위는 믿지 않았다. 또 원숭이 같이 생긴 교황이 오류가 없다는 교황무오설도 안 믿었지만…” 비록 소설 주인공의 입을 통해서이지만 플 플라스는 신부가 입이 가볍다는 말도 한한 치의 망설임 없이 쏟아낸다.  

플라스의 유고시집 ‘에어리얼(Aerial)’이 출간될 무렵인 1960년대 초반은 페미니즘 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난 시기다. 플라스가 자살한 1963년에는 미국의 페미니스트이자 사회심리학자인 베티 프리던이 쓴 ‘여성의 신비’가 나왔다. 이런 시대 분위기 속에서 플라스의 죽음은 그를 페미니즘 문학의 신화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벨 자’는 20세기 후반의 여성주의 문학과 여성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 됐다.  

그러나 울프와 마찬가지로 플라스의 문학도 페미니즘의 울타리에 가두는 것은 온당치 않다. 인간 삶과 죽음의 근원적 의미를 묻는 ‘성찰의 문학’으로 승화되어야 한다.
 
시대를 끌어안고 시대 그 너머를 상상한 버지니아 울프와 실비아 플라스. 운명의 비극과 성격의 비극을 한몸에 구현한 이들은 문학사상 가장 강렬한 불멸의 작가임에 틀림없다. 


글 김종면 주필 | 사진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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