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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Queen 다시보기] 1991년 4월호-스페셜인터뷰
[옛날 Queen 다시보기] 1991년 4월호-스페셜인터뷰
  • 양우영 기자
  • 승인 2022.05.07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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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4월호

38세의 나이로 초대 '서울특별시 자유시장'을 지낸 김경민 옹, 선산 기증해 나병환자 위한 교회 짓고 그들 위해 설교하며 살아가는 이야기

"정직한 사람의 정직한 사회를 위해 새벽마다 기도하지요"

미군정 하에서 초대 서울시장을 지낸 김경민 옹(82세). 한성부를 오늘날의 수도 '서울'로 개명하고 일본식 구조로 되어 있던 거리를 '을지로 · 세종로 · 충무로'등 우리 이름으로 정비하는 등 활발하게 뛰었던 그는 그러나 3년간의 시장 재임을 끝으로 어떤 관직도 맡지 않았다. 지금은 전북 익산의 선산을 나환자들에게 무상 기증, 교회를 짓고 한 달에 한 번씩 그들에게 설교하는 것으로 경건한 노후를 보내고 있는 그를 만나 원로의 목소리를 들어 보았다.

1991년 4월호-스페셜인터뷰1
1991년 4월호-스페셜인터뷰1
1991년 4월호-스페셜인터뷰2
1991년 4월호-스페셜인터뷰2

 

사회가 온통 시끌시끌하다. 하긴 사람 사는 세상이 한 순간도 조용할 리 없지만 심심찮게 터지는 대형 스캔들은 때로 알 수 없는 긴장과 초조함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이것은 저마다 제각각 귀는 닫아버린 채 입만 열고 사는 세상이 되어 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본지는 우리 시대의 '살아있는' 원로를 찾아 보았다. 자신의 명예욕과 권력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 인간 정신의 고귀함을 지키려 애쓰는 팔순 할아버지. 그가 전직 관료 출신이라는데 우리는 놀라게 된다. 관직에 몸담았던 사람으로서 휘어지지 않고 꿋꿋한 삶을 살아내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지난 수십년간 보아왔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관직에는 뜻이 없던 사람입니다. 서울시장 자리도 몇 번씩 사양했었지만 불가피하게 맡게 되어 3년간 재임했었구요. 그만둔 이후 지금까지 여러 번 정계에 들어올 것을 권유받았지만 응하지 않았습니다"

정치, 또 관(官)이라는 것이 마치 수렁과 같아서 한번 빠지면 좀처럼 헤어나올 수 없다며 허허 웃는다. 아울러 그 유혹들을 받아들였다면 지금 자신의 모습도 간데 없을 거라는 설명이다. 

미국으로 유학을 가 웨슬레안대학을 졸업하고 미시건대학에서 교육행정학 석사를 받은 김옹은 귀국하는 순간부터 일제의 조목 대상이 된다. 그곳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과 접촉했다는 등의 이유로 감시의 눈길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개성 송도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7년간 재직한다.

그러나 그의 교직생활은 끝내 순탄하게 마무리지어지지 못한 채 아쉬운 막을 내리게 된다. 수업시간 중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에 대해 불온한 발언을 했다 해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일본 경찰에 검거된 것이다. 

그때가 1942년. 아직 신혼의 부인과 두 아이를 남겨 두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간의 옥살이를 시작하게 되었다. 

"학생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는 이유였지요. 나는 뭐 크게 민족을 위해 한 일은 없어요. 겨우 2년 옥살이하고 나온 것뿐인데 후에 정부에서 내 기록을 읽고 국가유공자로 추천을 했지요"

한 일도 없이 잠깐의 옥살이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과분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것이 김옹의 겸손한 표현이다.(중략)

 

Queen DB

[Queen 사진_양우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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