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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사회, 열린 마음
열린사회, 열린 마음
  • 전현정
  • 승인 2022.09.04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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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과 법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은 책을 읽지 않고도 그 대강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제목으로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 금융 투자로 유명한 조지 소로스가 자신을 포퍼의 제자이자 추종자로 소개하는 것이 아이러니로 다가오기도 했지만, 그 묵직한 부피에 손이 가질 않는다. 이 책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던 해인 1945년에 출간되어 전체주의 국가를 비판하기 위한 목적으로 많이 인용되었다. 그러나 고전기 서양철학을 대표하는 플라톤의 철학을 비판하면서 시작하는 이 책은 사회가 혼돈에 빠질 때마다 커다란 울림을 준다.

열린사회(open society)는 개인들이 스스로 판단하고 독자적인 결단을 할 수 있는 사회이다. 포퍼는 전체주의에 대립하는 개인주의 사회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이 표현을 사용한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사상이나 관념을 거부하고 비판과 반론을 중시한다. 법이나 제도는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 변경될 수 있다고 한다.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시대에 살았던 플라톤은 이상 국가에서 철인(哲人)정치를 꿈꾸었다. 역사는 부패로 흘러가도록 되어 있는데, 인간 이성의 힘으로 지탱되는 도덕적 의지가 역사의 추세를 깨뜨리고 변하지 않는 이상 국가, 즉 최선의 국가를 가능하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완전한 국가 다음에, 명예와 명성을 추구하는 귀족들의 명예정치체제, 부유한 문벌이 지배하는 과두정치체제, 방종을 뜻하는 자유가 지배하는 민주정치체제, 국가의 종말 단계인 참주정치체제가 나타난다고 보았기 때문에, 변화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현명하고 지혜로운 철인이 이끌고 통치해야 하며, 무지한 자는 그를 따라야 한다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지도자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오류를 빈번하게 시정하기 보다는 한 사람의 현명한 지도자를 가지는 것이 좋다고 본 것이다. 민주주의를 표방하며 자행되는 온갖 술수를 보면, 지도자의 자질에 관한 플라톤의 지적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포퍼는 냉정한 현실주의자이다. 인류의 역사나 현실 세계를 돌아보면 완전한 국가나 제도는 이상에 불과할 뿐 실제로 존재한 적이 없었다. 엉성해 보이는 구성체들이 얼기설기 모여 세상은 이렇게 저렇게 굴러간다. 세상의 많은 제도는 한계가 있는 것이고 상호비판을 통해 개선해 나가야 한다는 그의 지적은 현실을 정확하게 포착하였다는 생각이 든다.

포퍼의 통치자에 대한 지적을 옮겨보자. 탁월하고 유능한 통치자를 확보할 수 있다는 가냘픈 희망에 우리의 모든 정치적 노력을 건다는 것은 미친 짓으로 보인다. 사악하거나 무능한 통치자가 너무 심한 피해를 주지 않도록 정치제도를 어떻게 조직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최선의 통치자를 얻기 위해 노력해야겠지만, 그와 동시에 정치에서 최악의 통치자에 대비한 원칙을 채택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포퍼는 권위주의 통치야말로 가장 못마땅한 정부형태이며, 우리는 가장 악한 통치자를 만날 경우를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인간의 이성에 대해 신념을 가져야 하지만 독단주의를 경계한다. 견제 받지 않는 모든 권력은 위험하다. 국가에 제한 없는 권력을 부여하는 것 역시 위험하기 짝이 없고 인간의 자유에 대해 가장 무서운 잠재적 위험이라고 보았다. 민주주의는 정치권력의 남용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하는 유일한 장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민주적 정부에 의해 채택된 정책이 모두 정당하거나 선량하거나 현명하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개선을 위한 방편을 제공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합리적이고 효과적인 제도적 안전장치가 될 수 있다. 국민의 지적, 도덕적 수준에 따라 민주주의에 담길 내용물과 수준이 달라질 것이지만,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제도를 개혁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는 가치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열린사회란 비판을 수용하는 사회이다.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고 비판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성은 상호비판을 통해 성장하는데, 이성의 성장을 도모하려면 상호비판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 포퍼는 자신의 한계를 알았을 때만 현명하다는 소크라테스의 합리주의 정신을 이어받고 있다. 비합리주의는 이성보다 감정과 열정에 호소한다. 모든 사람을 친구와 원수로 양분하며, 감정에 호소하여 상대방을 제어할 수 있다는 점에 크게 감명을 받는다. 평등하거나 공평무사한 태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공정이나 평등의 관념은 감정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이성의 도덕적 요구이다.

수정의 기회는 매우 중요하다. 무지(無知)에 대한 자각이 지적 정직성과 과학적 수준의 척도라는 점을 소크라테스가 보여 주었다고 포퍼는 말한다. 결함 없는 이상적인 제도나 정책은 존재하기 어렵다. 현실에서 만나는 민주주의는 공허할 수 있다.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무지나 한계를 자각하듯이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 ‘민주주의에 민주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고 열려 있을 때 개인은 물론이고 사회도 발전할 수 있다.

사람은 자신이 인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다른 의견에는 귀 거슬려 할 수 있다. 오류를 비판할 수 있으려면 우리가 속한 사회나 조직이 열려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비판과 반박을 통해서 사회가 발전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상호비판을 받아들이는 사회를 만들기는 쉽지 않다. 이를 위해서는 자기 판단이 틀릴 수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열린 마음이야말로 열린사회의 출발점이다.

글 전현정 변호사 (법무법인 케이씨엘)
 

 

전현정 변호사는…

서울대 법대 출신으로 1990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23년간 판사로 일하다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를 끝으로 2016년 법원을 떠났다. 현재는 법무법인 KCL 고문변호사다. 한국여성
변호사회 부회장, 법제처 법령해석심의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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