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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감동시킨 수묵화의 힘. 팔 없는 화가, 석창우
미국을 감동시킨 수묵화의 힘. 팔 없는 화가, 석창우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2.07.13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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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요한 건 현실을 인정하고, 현재의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겁니다. 그 일을 찾았다면 노력을 해야지요. 무엇이든 쉽게 얻어지는 것은 없으니까요”

석창우 화백을 만나기 위해 서울 대방동의 작업실을 찾았다. 석 화백은 퀸과의 인연을 이야기하며 기자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석 화백과 퀸의 인연이 시작된 것은 1998년, 석 화백의 1회 개인전 때였다. 당시 석 화백은 장애인 화가로 화제를 모았다. 양팔이 없는 사람이 전시회를 연다는데 어찌 화제가 안 되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수많은 매체가 그의 그림보다 장애와 극복기에 초점을 맞췄다. 게 중에는 석 화백의 지속적인 창작활동에 회의적인 생각을 가진 이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14년이 지난 지금, 그는 현재까지 개인전 32회, 그룹전 210여 회를 연 중견화가가 되었다. 석 화백은 더는 장애인 화가가 아니다. 그는 그냥 화가다.

미국에 한국의 혼을 심다


미국 워싱턴 소재의 스미소니언박물관. 백악관 인근에 위치한 이 대형박물관은 주말을 맞아 관람객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그런 박물관의 복도 가운데 한 동양인 남자가 화첩을 펼쳤다. 그 동양인 남자의 양손에는 다섯 개의 손가락 대신 금속의 갈고리가 달려 있었다. 지나가던 관람객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이 기이한 이방인(두 팔이 의수로 되어 있어 더욱 낯설어 보이는)을 의혹의 눈초리로 흘겨보았다. 도대체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하지만 동양인은 이렇다 할 설명도 없이 갈고리 손에 먹을 적신 붓을 꽂고는 화첩 위에 몸을 날렸다.

그가 화첩에 일획을 그어 내림과 동시에 모든 의혹들도 잘려나갔다. 그의 붓질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의 몸이 마치 행위예술을 하는 춤꾼처럼 화첩 위를 날아다녔다. 긴장과 이완의 반복. 관람객들은 숨을 죽이고 10분간의 시연에 주목했다. 장애를 가진 동양인을 바라보는 연민의 시선이 감탄과 동경으로 바뀔 때, 그들이 서 있는 곳은 미국의 땅이 아니었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대한민국의 화가, 석창우의 화첩이었다.


“이번 시연회를 통해 동양과 서양의 마음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앞으로도 꾸준한 시연회를 통해 대중들과 만날 예정입니다. 내년 1월에는 프랑스 파리에서의 개인전이 계획되어 있습니다. 그때도 프랑스의 곳곳에서 시연회를 펼칠 것입니다.”


석 화백이 외국에서 개인전을 갖는 것은 이번이 11번째이다. 석 화백은 지난 5월 25일부터 6월 8일까지 미국 워싱턴의 한국문화원에서 ‘선과 묵과 누드의 세계’라는 제목으로 70여 점의 작품을 선보였다. 또한, 워싱턴 전역에서 선보인 4회의 시연회도 성황리에 끝났다. 석 화백은 대중 앞에서의 시연회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석 화백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서예를 배웠으며 이후 서양화의 크로키 기법을 접목하여 ‘수목 크로키’라는 그만의 독창적인 화풍을 개척했다. 그는 수묵 크로키로 누드에서부터 춤과 스포츠와 같은 다양한 주제를 표현해낸다.

“제가 그리고자 하는 것은 사람들의 삶이고, 이왕이면 정지된 상태보다는 살아 움직이는 역동성을 담고자 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스포츠와 같은 주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더군요.”


실제 석 화백의 그림은 보는 이의 숨을 멎게 할 정도로 생동감이 넘친다. 경륜경기를 표현한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경륜선수들의 허벅지를 스치고 가는 바람이 느껴지고 그들의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 냄새가 맡아진다. 선수의 맥박까지 훔쳐내는 석 화백의 그림은 선수들과 혼연일체가 되지 않고는 그리기 어려운 작품이다.


“경륜경기를 그리기 위해 줄곧 6개월을 경륜장에 붙어 있었어요. 선수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각인시키며 머릿속에 원하는 장면들을 차곡차곡 담아나갔죠. 작품 하나를 그리기 위해 수개월간 관찰하고 연구하는 것은 기본적인 일이에요.”

장애인과 장인의 차이


석 화백을 모르는 이들은 그가 장애를 입기 전부터 그림을 그리던 화가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지 않고는 빼어난 그림을 그리기는커녕, 그림을 그릴 생각이나 할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석 화백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두 팔이 잘리고 부터다.


석 화백은 중소기업 전기관리자로 근무하던 1984년, 2만 2천900볼트의 전류에 감전되어 양팔과 발가락 두 개를 절단했다. 그 후 1년 반 동안 병원생활을 하며 대수술만 12번을 받아야 했다.


“신께서 보기에 내가 가진 재능을 소모하며 살아가는 게 안타까워 보이셨나 봐요. 그래서 팔을 절단하면서까지 이 길을 가게 한 거 같아요. 저를 통해 장애가 있어도 해낼 수 있다는 걸 세상에 알려주고 싶었다고 생각해요.”


석 화백이 사고 이후 붓을 잡은 것은 아들 때문이었다. 당시 네 살이었던 아들이 석 화백에게 그림을 그려달라고 졸랐다. 아들이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사고를 당했던 터라 석 화백은 아들과 놀아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이 항상 있었다. 그래서 석 화백은 의수에 볼펜을 끼우고 비지땀을 흘려가며 아들에게 참새 한 마리를 그려주었다. 한나절이 꼬박 걸린 일이었지만 좋아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니 힘든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아들의 미소를 자주 보고 싶은 마음에 그림을 배우기로 결심했다.


“중요한 것은 현실을 인정하는 거예요. 과거에 내가 어땠는가 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요. 옛날에 팔이 있었다는 건, 현재를 살아가는 데 아무런 소용이 없는 거예요. 현재의 상태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게 가장 중요해요. 그리고 그걸 찾았다면 노력을 해야지요. 무엇이든 쉽게 얻어지는 것은 없으니까요.”

석 화백이 화가로서 현재의 위치에 오기까지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의 노력이 필요했다. 석 화백은 매일 10시간 이상을 붓질에 매진했고, 발가락으로 먹을 가느라 물집이 가실 날이 없었다. 그리고 돌에 낙관을 새기는 데만 5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는 법이 없었다.


“생각을 바꾸는 것만으로 당장 할 수 있는 게 있고, 다소의 노력과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게 있어요. 그리고 평생의 목표로 삼고 노력해야 하는 것도 있지요. 그렇게 나눠서 하나씩 차근차근 해 나가다 보면 다른 데에 눈 돌릴 틈도 없이 시간이 금방 가버려요. 인생을 즐겁게 사는 비결이지요.”

희망을 그리다

석 화백의 삶은 많은 이들에게 희망이 되고 있으며 그의 그림 역시 화단에서 인정을 받아, 중학교 2학년 미술 교과서에까지 실릴 정도가 되었다. 그런 석 화백이 가장 고마워하는 이는 그의 아내다. 아내는 석 화백이 사고를 당한 후 그의 곁을 그림자처럼 지켰다.


“중환자실에서 일주일 만에 의식이 돌아왔을 때, 처음 본 것이 아내의 밝은 표정이었어요. 다른 건 자신이 다 알아서 할 테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빨리 낫기나 하라고 하더군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원망도 없었고, 울며 걱정하지도 않았어요. 마음이 새까맣게 타들어갔겠지만, 내 앞에서는 편안한 모습만 보여줬어요. 그런 아내 덕분에 장애를 좀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어요. 아내에게 감사하는 마음이야 다 말로 할 수 없지요. 오늘의 저를 있게 한 원천인걸요.”


석 화백은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많은 것을 한다. 블루투스를 통해 언제 어디서나 핸드폰 통화를 하고, 갈고리 손으로 독수리 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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