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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음악계에서 ‘돈키호테’로 불리는 창조적 예술가 금난새가 말하는 ‘Classic Music & My Life’
한국 음악계에서 ‘돈키호테’로 불리는 창조적 예술가 금난새가 말하는 ‘Classic Music & My Life’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2.08.23 22: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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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음악이 존재하는 것은 살아 있는 청중,
즉 문화를 향유하는 대상이 항상 존재해왔기 때문입니다”


“깊게 생각하고 신중한 것도 필요하지만 늘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걸 좋아해요”

 

최근 지휘자 금난새의 직책이 또 하나 늘었다. 바로 아트센터인 ‘더 라움’의 예술감독으로 취임하게 된 것. 그를 만나기 위해 찾아간 ‘더 라움’은 오래 전부터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클래식 연주회를 열기에 최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은은하게 들리는 클래식 음악에서부터 특별한 음향 시설 없이도 악기의 소리에만 집중할 수 있는 훌륭한 공연장까지, 딱 봐도 금난새 감독이 탐낼 만한 곳이었다.
인터뷰 장소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단정하게 빗은 헤어스타일은 그대로였지만, 평소 좋아하는 붉은 색 옷을 입었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중후한 멋이 돋보이는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다. 특유의 여유로운 미소로 건물 이곳저곳을 안내하며 자신이 새롭게 취임하게 된 ‘더 라움’에 대해 남다른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바쁜 스케줄로 그와의 인터뷰는 두 차례 진행됐으며, 두 번의 만남으로 심층적인 내면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그는 잔잔히 흐르는 클래식 음악의 선율 속에서 클래식과 함께 해온 음악 인생, 그리고 소중한 가족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풀어나갔다.
척박한 땅에서 지휘자의 꿈을 키우다
그가 지휘자의 꿈을 갖게 된 건 13살 때의 일이다. 미국의 유명한 지휘자 번스타인 공연을 본 것이 가장 큰 계기가 됐다. 하지만 당시 우리나라에는 ‘롤 모델’로 삼을 만한 지휘자가 전무했다. 당연히 지휘자의 꿈을 지닌 학생들을 가르쳐줄 교육시설도, 인력도 부족했던 상황이었다. 지휘자의 꿈을 안고 서울예고의 작곡과에 입학한 그는 작곡 공부를 하며, 독학으로 지휘 연습을 해야 했다.
“학교 공부도 소홀히 하지 않았지만 지휘자 수업을 받기 위한 곳이 마땅치 않아 혼자서라도 지휘자가 되기 위한 공부를 많이 했어요. 책이나 악보를 사서 공부하거나 거울 앞에 서서 지휘 연습 시간을 많이 가졌어요.”
힘겹게 독학으로 지휘자 공부를 하고 있을 무렵 아버지를 통해 지휘자로서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당시 영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이사장을 맡고 있었던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청소년 음악회의 청중들 앞에 서서 처음으로 지휘를 하게 된 것이다. 한 곡의 연주를 지휘하는 것이었지만 그에게는 지휘자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이어가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그 이후 지휘자로서의 꿈은 점차 구체화되어 갔다. 그는 서울대학교 작곡과에 입학해 대학생으로서 가장 창조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생각해낸 것이 오케스트라를 조직하는 것이었다. 친분이 있었던 대학 친구들을 한 명씩 만나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포섭하는 과정을 거쳐, 그의 첫 오케스트라인 ‘서울 영 앙상블’을 탄생시켰다. 그는 대학교 시절부터 지휘자가 갖춰야 할 리더십과 포용력, 그리고 추진력이 무엇인지 조금은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친구들은 제가 지휘를 하고 싶은 마음에 오케스트라를 조직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친구에 대한 동정의 의미도 있었고, 친구들 역시 서클 활동을 통해 자기 계발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 때문에 저의 제안을 대부분 수락했던 것 같아요. 친구들과 함께 제가 좋아하는 음악을 한다는 것도 기뻤지만, 무엇보다 지휘자로서 실습을 할 수 있게 되어 뿌듯한 순간이었답니다.”
음대를 졸업한 그는 무작정 외국 유학길에 올랐다. 음악의 도시로 유명한 독일 베를린으로 유학을 떠났지만 유학에 필요한 비용뿐만 아니라, 그를 가르쳐줄 지도교수조차 없던 상황이었다. 지휘자의 꿈을 이루겠다는 의지 하나로 당시 베를린 음악대학의 지휘과 교수였던 라벤슈타인 교수를 찾아갔다. 그는 라벤슈타인 교수에게 지휘자가 되기 위한 한국에서의 갖은 노력들을 설명했고, 라벤슈타인 교수는 그를 조건 없이 제자로 받아들였다. 머나먼 타국에서 온 생면부지의 동양인에게 그러한 기회를 주는 경우는 극히 드문 일. 그는 지금도 자신의 스승인 라벤슈타인 교수에게 무한한 감사와 존경심을 갖고 있다고 했다.
“라벤슈타인 교수님을 만나서 지휘자로서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어요. 너무 오랫동안 기다렸던 지휘자 공부를 하게 되면서 물 만난 고기처럼 정말 열심히 배우고 연습했던 것 같아요. 저 스스로 독일에서 공부하면서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였죠. 그래서 너무 행복했어요.”
천부적인 재능과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 그리고 노력이 더해지자 그의 지휘 실력은 날로 향상됐다. 그 결과 유학을 떠난 지 3년 반 만에 한국인 최초로 카라얀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 3위로 입상하며 본격적인 지휘자의 길을 걷게 됐다. 그는 카라얀 콩쿠르 입상으로 세계적인 권위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수 있는 자격까지 얻게 되었고, 그 이후 한국을 대표하는 지휘자로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콩쿠르에서 입상해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게 1977년도의 일이에요. 그 당시 지휘를 한 것이 지휘자로 입문하는 계기가 되었고, 지휘자로서의 앞날을 열어주는 시발점이 되었지요. 제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에요.”

 

청중을 향한 애정은 클래식 음악의 본질

그는 클래식 음악 대중화에 누구보다 큰 열의를 갖고 있다. 클래식 음악에 대한 이해를 한 권의 책으로 돕는 <금난새와 떠나는 클래식 여행>, 청소년을 위한 해설이 있는 음악회인 <금난새와 함께 하는 세계음악여행>, 장소를 불문하고 청중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연주회를 여는 게릴라 음악회 등 그의 최근 행보는 클래식 대중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클래식 음악을 즐기는 문화적 향유 주체가 다소 제한적인 상황에서 클래식 대중화를 실현하려는 그의 의지는 클래식과 청중 사이의 보이지 않는 벽을 허물게 했다.
“조심스러운 이야기입니다만, 우리나라의 일부 음악가들은 제한적, 권위적, 폐쇄적이라는 느낌을 갖게 해요. 제가 장소를 마다하지 않고 건물 로비나 도서관, 성당, 소년원, 아파트 같은 장소에서 음악회를 연 것은 클래식 음악을 많이 접하지 못한 청중들을 위한 것이에요. 음악이 닿지 않는 곳에 직접 찾아가서 클래식 연주를 들려줌으로써, 음악의 문을 여는 소통의 장을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죠. 다시 말해, 훌륭한 연주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연주자가 보통사람과 함께 소통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클래식 음악인들이 가질 수 있는 우월감은 클래식 음악 대중화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예술가의 실력을 향상시켜 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청중을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 자신을 내세우기 위한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그의 클래식 음악의 철학과 소신은 철저하게 청중을 향해 있는 듯 했다.
“지휘자로 활동하면서 내 본위의 클래식이나 내 본위의 예술이 아니라 제가 하는 예술이 청중에게 희망과 꿈이 되고 행복감을 줄 때에 그 의미가 있다는 데 초점을 잡았어요. 근데 일부 예술가들은 자신의 음악적 업적과 우월감에 빠져 가장 중요한 청중을 잊기도 하거든요.”
클래식 대중화를 위해 흘린 땀방울은 조금씩 알찬 열매를 맺고 있다. 요즘 클래식 음악을 즐기는 세대가 청소년층까지 확대된 것만 봐도 우리나라 클래식 음악의 현주소를 단번에 알 수 있다. 특히 그의 제안으로 음악회에 지휘자의 해설을 도입한 <금난새와 함께 하는 세계음악여행>은 6년간 총 54차례 전회 매진을 기록하기도 했다. 한국 클래식 음악 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독일에서 공부할 때 베를린 필하모닉 같이 세계적인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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